94. 지역N문화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가 화인처럼 남을 때가 있다. 도저히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고, 용서라는 단어가 사치처럼 느껴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미워할수록 괴로운 건 나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법만 없다면...", "소리 없는 총이 있다면..." 하는 서슬 퍼런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한다.
최근 문화계 어른이신 김승국 선생이 페이스북에 남긴 '원수를 갚는 법'이라는 글을 읽으며 나는 한참을 멈춰 여러번 읽어보고 공감했다. 그는 과거 자신을 야비하게 짓밟고 직장까지 그만두게 했던 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복수심에 황폐해져 가던 그에게 스승인 고(故) 홍윤식 선생은 뜻밖의 종이 한 장을 건넸다고 한다.
"그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대신 너의 퀄리티를 높여라. 욕됨을 참고 정진하라(인욕정진, 忍辱精進)." 용서가 아니라 '나의 가치'를 높이는 것. 김 선생은 그 가르침대로 자신의 브랜드를 높이는 데 전념했고, 결국 그와 대등한 위치에 올라 당당히 승승장구했다.
그에게 원수를 갚는 법은 상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이 글은 마치 지금 나에게 건네는 위로 같았다. 사실 나에게도 그런 상대가 있다. 생각만 해도 자다가 눈이 떠질 만큼 깊은 생채기를 낸 사람. 하지만 김 선생의 글을 읽으며 나는 마음의 방향을 조금 틀어보기로 했다.
억울함에 매몰되어 과거에 머물기보다, 차라리 그 상처를 동력 삼아 공부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미움에 쏟았던 에너지를 오롯이 나를 채우는 시간으로 바꾸니,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이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그 시련이 없었다면 나는 안주했을 것이고, 내 삶을 이토록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제 나는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나를 무너뜨리려 했던 그 시련은 오히려 내가 더 단단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준 거름이 되었다. 김 선생이 말한 '인욕정진'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며, 나는 오늘도 책장을 넘기고 바다가 보이는 묵호 '논골담길커먼즈'에서 내일을 설계한다. 최고의 복수는 상대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행복하게 웃는 것임을 이제는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