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면 축제를 여는 도시가 있었는데

232. 노트_ 동쪽여행

by 조연섭

몹시 건조한 도시에 어제부터 오늘까지 고마운 비가 이어지고 있다. 기억은 안나지만 비가 내리면 도시는 축제장이 된다던 해외 한도시를 소환해 본다. 어제와 오늘 이어지는 동해안의 비는 축제 이상의 가치가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동해의 공기는 바짝 말라 있었다. 바람은 거칠었고, 산은 쉽게 타오를 듯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봄이 오기도 전에 산불 걱정을 먼저 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건조특보, 잿빛 뉴스 화면, 검게 그을린 능선들. 동해의 산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연약하다. 한 번 불이 붙으면 해안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번진다.


그래서 어제 시작한 비는 산을 식히는 손길이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눌러놓던 불안을 씻어내는 세례였다.


높은 산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한다. 설악과 태백의 능선이 하얗게 덮였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눈은 천천히 녹으며 땅속으로 스며들어 봄의 물이 된다. 숲의 뿌리를 적시고, 계곡을 살리고, 결국 동해 바다로 흘러들 것이다. 오늘 동해 도심에 내리는 비와 산 위의 눈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하늘이 한 번에 두 가지 방식으로 산불을 막고 있는 셈이다.


동해는 바다와 맞닿은 도시다. 바닷바람은 늘 청량하지만, 건조한 날에는 그 바람이 오히려 위협이 된다. 그래서 더 고맙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어지는 빗줄기가.


아침에 우산을 쓰고 골목을 걸어보니, 흙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먼지 대신 젖은 땅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마른 낙엽은 힘없이 바닥에 붙어 있고, 나무들은 빗물을 받아 한결 색이 짙어졌다. 산은 비를 맞으며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대개 불편을 먼저 말한다. 교통 체증, 젖은 신발, 흐린 하늘. 그러나 오늘만큼은 다르다. 이 비는 불을 막아주는 방패다. 누군가의 논과 밭을 지키고, 산자락 마을의 밤을 지켜주는 조용한 힘이다.


봄은 불안과 함께 온다. 따뜻해질수록 더 말라가고, 초록이 돋기 전까지 산은 가장 취약하다. 그래서 이 비는 시기적으로도 정확했다. 너무 늦지도, 너무 이르지도 않게 내려줬다.


자연은 스스로 균형을 맞추려 한다. 우리는 그 균형을 자주 흔들어 놓지만, 오늘처럼 하늘이 먼저 손을 내밀 때면 겸손해진다. 산불을 막아줄 수 있어서 고마운 비.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오늘 동해는 젖어 있다.

그리고 그 젖음이, 참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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