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논골담길 커먼즈
묵호를 배경으로 쓴 소설로 알려진 한 소설가가 묵호 배경의 새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
묵호를 배경으로 쓴 소설은 '묵호의 꽃', '여기가 안묵호입니다', '묵호를 아는가' 등 몇 편이 있다. 그리고 이 사연은 아직 미공개 이야기이다.
제목은 아직 작품 속에서 더 살아 움직이겠지만, 그는 지금 ‘묵호 00’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시간을 붙들고 있다고 했다. 그 소설의 한 장면을 위해 묻고 또 묻는 질문들 속에는, 묵호라는 항구를 일반 풍경이 아니라 실제로 숨 쉬는 삶의 무대로 옮겨놓으려는 작가의 셍각이 담겨 있는듯 했다.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인상적이었다.
묵호의 어업 역사 속 가장 작은 배는 어느 정도 크기이며, 실제로 혼자서도 조업이 가능한가. 그리고 항구에 며칠 머물던 여행자가 어느 날 배를 배우고, 문어잡이를 위해 바다로 나가는 설정은 가능한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최근 묵호의 오래된 현장 감각을 품은 한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전 묵호 어촌계장의 동생으로, 지금도 배를 운영하고 있는 분이었다. 소개는 묵호 일출로 121번지, 리솔티드 카페 대표 최미숙 씨를 통해 이루어졌다. 장소를 생각하면 더욱 흥미롭다. 바로 그 일대, 논골담길 커먼즈와 리솔티드 카페가 자리한 공간이 이번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구상한 장면은 이렇다.
묵호 해랑전망대 앞 리솔티드 카페에 일주일가량 드나들던 한 여행자가 어느 순간 묵호의 바다와 사람들에게 스며들고, 마침내 작은 배를 타고 새벽 바다로 나간다. 관광객으로 왔다가 항구의 결을 배우고, 관찰자로 머물다가 삶의 안쪽으로 한 발 들어가는 순간이다. 이 설정이 가능한가를 묻는 것은 결국, 묵호라는 장소가 낯선 사람을 어디까지 받아들이는가를 묻는 일과도 닮아 있다.
리솔티드 로비에서 실제 배 사업 종사자와 통화로 들은 이야기의 요지다.
묵호에는 약 1.5톤 내외 규모의 소형 문어배가 존재하며, 이 배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가진 간편 작업형 어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관, 그러니까 엔진 구조도 복잡하지 않고, 어구를 연결해 바로 출항하는 식의 실용적 성격이 강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1인 조업도 가능한 형태라고 했다.
이 말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설 속 인물이 거대한 어업무리나 집단 조업이 아니라, 바다와 더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작은 배를 타고 나간다는 설정이 충분히 묵호답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소설 설정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꼭 전문 선장이 아니더라도, 배를 배우고 문어잡이에 나서는 인물을 상상하는 일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전혀 없지 않았고, 항구라는 곳은 원래 책상 위에서 정리된 이력서보다 몸으로 배운 시간을 더 오래 기억하는 장소다.
물론 현실의 법과 제도 속으로 들어가면 자격과 안전, 등록과 책임의 문제가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판결문이 아니라 인간을 다루는 장르다. 현실의 질서를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한 인물이 어떤 계기와 배움 속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서는 장면은 충분히 문학적 재현의 영역 안에 들어온다.
이 대목에서 나는 묵호라는 장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묵호는 오랫동안 바다와 사람, 노동과 이별, 귀환과 침묵이 겹쳐진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큰 사건보다도 작은 움직임 하나가 더 오래 남는다. 새벽에 조용히 시동을 거는 배 한 척, 선착장 가장자리의 젖은 밧줄, 커피잔을 비운 뒤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보는 여행자. 이런 것들이 묵호에서는 쉽게 장면이 되고, 또 서사가 된다.
시대 고증과 관련한 자문도 소설의 결을 더 단단하게 해 준다.
약 20~30년 전만 해도 묵호의 작은 배들 가운데는 1톤이 조금 넘는 목선, 그러니까 나무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FRP, 즉 섬유강화플라스틱 선박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재질의 변화가 아니다. 항구의 시간도 함께 달라졌다는 뜻이다. 나무 냄새와 손때가 배어 있던 시절의 배가 있었다면, 지금의 배는 효율과 내구성, 관리의 편의가 앞서는 시대의 얼굴을 닮아 있다. 소설이 어느 시기를 배경으로 삼느냐에 따라, 배의 재질 하나만으로도 독자가 느끼는 현실감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작가가 묻는 것은 배의 무게만이 아닐 것이다.
정말 궁금한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일지 모른다.
한 사람이 낯선 항구에 들어와, 어느 순간 그 항구의 리듬을 배우게 되는 일이 가능한가.
그리고 더 나아가, 묵호라는 장소는 그런 사람을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깊고 넓은가.
나는 그 답이 ‘그렇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묵호는 오래전부터 사람을 한 번에 다 보여주지 않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처음엔 풍경으로 보이지만, 조금 더 머물면 냄새가 보이고, 더 머물면 리듬이 들리고, 그다음엔 말수가 적은 사람들의 표정이 읽히기 시작한다. 리솔티드 카페에 일주일쯤 드나드는 여행자라면, 이미 그는 관광객의 시간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논골담길 커먼즈와 일출로 121번지 일대는 지금, 그런 낯선 사람에게도 이야기가 걸려드는 자리다.
어쩌면 소설은 늘 그렇게 시작된다.
거창한 사건보다 먼저, 누군가가 현장 사람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이 동네 작은 배는 어느 정도입니까.”
“혼자서도 나갈 수 있습니까.”
“낯선 사람도 배를 배워 문어를 잡으러 나설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은 정보 수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장소의 영혼을 빌리는 과정이다.
묵호를 제대로 쓰고 싶다면, 묵호의 바다만 볼 것이 아니라 묵호의 배를 알아야 하고, 배만 볼 것이 아니라 배를 다루는 사람의 손을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손의 온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소설은 항구의 표면이 아니라 그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소설가 모 씨가 쓰고 있는 소설 속에서, 리솔티드 카페를 드나들던 여행자가 결국 작은 배를 타고 나가는 장면은 아마도 구경하던 사람이 삶의 편으로 건너가는 순간, 묵호를 바라보던 사람이 묵호의 일부가 되어보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간 때문에, 한 척의 작은 배는 소설 속에서 바다보다 더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