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50. 기획자가 답하다. 묵호 논골담길
묵호사람 마음의 고향, 논골담길 비탈길 골목은 오징어와 명태를 바지게와 고무대야로 지고이고 덕장으로 오르는 골목으로 유명했다. 송정 평지골목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잠시만 딴생각하면 길을 잃기 일쑤였다. 힘보다 골목길 찾기가 더 무서운 골목길로 군데군데 아픔의 역사를 상징하는 적산가옥과 함께 아직도 원형이 남아 있다.
애국가 첫 소절 영상 배경 추암 촛대바위가 있는 동해는 아침의 나라로 불린다. 그만큼 아침 일찍 해를 맞이하는 상징적인 도시며 동풍으로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해 살기가 좋다. 이곳 동해는 다양한 언덕골목과 평지 골목이 있다. 그중에서도 묵호의 비탈길 논골과 송정동의 평지 골목길이 이야기가 있는 길로 유명하다.
과거 명주군 묵호와 삼척군 북평이 합쳐 탄생한 신생도시로 다양한 상반되는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다. 내륙과 어촌문화로 발생하는 문화의 차이는 골목길에서도 독특하게 나타난다. 묵호의 골목길은 묵호등대 정상을 기준으로 뒤쪽 ‘논골 1, 2, 3길’과 앞쪽 ‘등대오름길 바람의 언덕’과 스카이밸리가 조성된 ‘도째비골’ 등이다.
이 길은 대부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의 장소가 되고 있다. 묵호 비탈길 언덕으로 조성된 논골은 대부분 언덕 정상 평지에 마련된 덕장에 오징어와 명태를 나르기 위한 길로 활용됐다. 바지게 할아버지, 고무대야 할머니 짐에서 흘러내리는 바닷물로 골목은 물 마를 날이 없었다. 묵호 언덕 골목길 논골마을은 장화를 신지 않으면 길을 오르기 힘들어 늘 장화를 신고 다녔다. 당시 골목길은 바지게꾼 구합니다. 한번 오르는데 30원? 구인광고가 전봇대 곳곳에 붙어 있을 정도로 최대 인기 직업이기도 했다.
마을 주민 손만택(남. 85)씨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도시화된 묵호등대 아래 수변공원 앞에서 오르는 등대오름길 바람의 언덕은 1963년 묵호등대가 건립될 당시 참여한 마을주민의 모래자갈을 나르던 길이라며 마을사람들의 땀과 정신이 깃든 길이다. 마을주민들은 현재 수변공원 주변모래자갈을 언덕 정상 등대 건설현장으로 이고 지고 날랐다. 여자는 고무대야에 남자는 질통지게를 활용했다. 이때 여자는 반표, 남자는 온표를 받아 밀가루나 먹거리로 교환해 생활했다. “라고 한다.
동해 송정에서 힘자랑, 글 자랑 하지 마라!
송정 출신 홍경표(남. 86) 전 동해문화원장은 “동해 송정마을은 예부터 '송정에서는 힘자랑 글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유행했다.” 고 했다. 송정은 그만큼 힘 좋은 사람이 많은 건강한 학비형국(학이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모습)의 지형의 마을이었고 또한 송정팔경이 상징하듯 글과 서단의 계보를 잇는 서화 대가들이 많았다.
주먹 맛보다 골목길이 더 무섭다.
영동남부권 문화의 중심이던 송정 마을 골목길은 평지 골목으로 신작로와 구관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골목길이었다.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잠시만 딴생각하면 길을 잃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외지 '어깨'들은 '송정 애들 주먹 맛보다 골목길이 더 무섭다.'라는 멀이 공공연하게 들릴 정도였다. 한때 어깨로 불린 김범수 씨는 회상한다. "송정역 전에서 외지 패거리들을 만나면 훈기부터 준다. 그러면 대다수 움찔하며 하라는 대로 하는데, 마음먹고 온 놈들은 폼을 잡곤 하죠. 자! 정정당당하게 붙어 보자 이거지요? 그러면 우리는 역전에서 이러면 금방 지서에 신고가 들어가 순경이 찾아온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자며 골목으로 데리고 갑니다.
골목길에 도착해서도 또 슬쩍 꼬리를 내라는 척하다 선방을 날리고 골목으로 도망갑니다. 그러면 그 애들은 우리가 겁먹어 도망가는 줄 알고 따라오는데, 코앞에서 우리를 놓쳐요. 송정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보기 드문 골목길 때문이지요. 그래서 송정의 골목은 토박이도 헷갈리고 골목이 갑자기 푹 꺼지는 곳이 많아요. 또 지붕이 낮아 덩치 큰 사람은 머리가 서까래에 부딪치고 길이 좁아서 등치 좋은 사람은 양 어깨가 벽에 닿을 정도였어요. 송정을 잘 모르는 외지 애들은 그 상황을 모르니 그대로 거꾸로 처박혀 면상을 갈거나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가 나타나 그냥 한방 먹이면 두 손 싹싹 비비는 거죠"
담이 낮고 좁은 송정의 골목은 농부들이 지게나 리어카에 짐을 가득 싣고 지나면 사람이 지나갈 틈이 없어 남의 집 마당에 피해 있어야 할 정도였다. 송정은 예부터 송시열 송자대전 간소기록의 중심에 있던 유생 홍재모 씨를 비롯해 글 쓰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등 서화 인물과 근 현대 지도자 인물까지도 많았던 고장이다. 이 마을은 힘이 센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 최계철(1926~2001)씨는 일 욕심이 많고 힘이 센 마을 사람이었다. 리어카에 볏단을 싣고 지나가면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우물가에 있던 아낙네들이 한소리씩 했다.
" 아이고, 오늘도 최씨네 초가집 한 채가 이사 가네"라고!
동해 남부 송정의 평지 골목길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골목길 매력도 볼만하지만 마을을 말하자면 당시 주먹의 이야기를 빼면 말발이 안 선다고 한다. 아무리 강하고 많은 수 패가리라 할지라도 송정에 오면 개장수 앞에 똥개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도 있었지만 당시 주먹들은 송정해수욕장 벌판에서 운동을 통해 체력과 단결력을 다져온 내공들도 있어 악명 높았던 영주, 제천, 묵호나 삼척 정라진 어깨들도 송정의 주먹 앞에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송정의 주먹들은 쌔물스럽고 강했기 대문이다. 송정 주먹들은 선배가 당수, 유도, 권투, 태권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싸움 기술을 자연스럽게 전수해 줬고 선후배 의리가 남달랐다.
동해항 들어오기 전 동해 송정 마을지도
본 지도는 1979년 송정에 동해항이 들어오기 이전 송정 그림지도로 송정초등학교 60년 사에 공개됐다. 지도에서 나타난 송정의 앞섬과 앞섬 길, 재미있는 여자길과 남자길이 따로 있던 옛 송정의 모습이다.
송정에서 비행기 타고 청와대에 업무보고를 다녔다는 홍경표(전 동해문화원장, 86) 원장이 늘 말씀하시던 송정해변의 공항 활주로도 해변을 품었다.
그 앞쪽에는 유명한 영주상회와 1930년대 개교된 송정초등학교 원형모습도 보인다. 명사십리 송정해수욕장은 당시 비행장 활주로만 아니라면 갯목까지 동해안 최대 해변을 자랑했을 것이다.
뒤쪽은 구 북평극장도 보이고 전천 옆 낡은 집을 명명한 일명 거지집도 표시했다. 그림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송정시장 좌우의 골목길도 상상되는 송정마을의 지도를 담아봤다. 큰 꿈을 가지고 동해항을 개항하면서 사라진 마을이다. 꿈꿔온 동해항의 완성을 못한 채 사라진 송정 모습은 영원한 마을주민의 마음의 고향이다.
참고문헌_ 송정이야기(동해문화원)
마을지도_ 동해문화원, 동해학기록센터 홍협 연구원
송정막걸리축제로 골목길 문화를 이어가!
송정의 골목은 동해의 남부지역 KTX 종착역인 동해역 앞을 나와 좌, 우로 펼쳐진 골목들로 일제강점기 남겨진 적산가옥도 곳곳에 보이고 오래된 폐가 등이 송정마을의 오늘은 보여주는 듯해 마음이 짠하다. 이 마을은 지난 2019년 축제를 통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그것은 바로 마을에서 3대째 이어오는 노포 송정막걸리 정신을 이어가는 제1회 송정막걸리축제 개최다.
평소 막걸리 팬클럽을 만들고 막걸리를 즐겨마시던 동지들과 솔 숲에서 막걸리축제를 해보자는 의견을 던졌다. 며칠뒤 어찌 들었는지 송정동주민센터 당시 이정희 동장이 면담을 요청했다. 만나보니 축제를 송정동축제로 같이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대책만 마련해 준다면 좋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동장은 그렇게 하겠다는 답을 줬다. 필자가 기획하고 총감독을 맡고 활동가 후배가 현장감동을 담당하는 등 지역 활동가 동료들과 함께 만든 대학축제형 송정막걸리축제가 송정시장을 중심으로 개최대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그러나 기획자와 원주민을 몰아내는 젠트리피케이션은 현실로 닥쳤고 기획자인 필자는 빠진 채 축제는 이어가고 있다. 좋다. 지금은 물론 물러났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하고 싶고 송정이 성장하는 축제로 남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송정시장을 중심으로 위크앤드 막걸리 야시장을 만들고 시장을 중심으로 막걸리 거리를 조성하는 일도 기억했으면 한다.
Q. 김창래_ 동해시자원봉사센터 사무국장
제목_묵호 골목길, 송정 골목길 유명하다.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