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연섭 Mar 27. 2023

묵호 ‘명태덕장’ 생존신고!

1. 브런치와 떠나는 동쪽여행

1937년에 개항한 묵호항을 배경으로 조성된 어판장은 매일 이른 아침부터 싱싱하고 갑싼생선을 찾아 나선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어판장 앞 산짓골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 언덕에 마치 무대를 만들던 아시바 쌓은 모습의 개량된 덕장모습이 여러 개 눈에 들어온다. 겨울의 명태, 여름의 오징어가 동해바다에 잡히지 않아도 묵호 덕장은 아직 남아 있다.

묵호덕장 모습, 사진_임황락작기
묵호 덕장마을 로컬 브랜드, 문화팩토리 도전!

오히려, 규모는 옛날보다 더 커지고 전문화되고 있으며 최근 덕장 마을은 ’ 문화팩토리 덕장‘으로 묵호태를 내 걸고 로컬 브랜드에 도전하고 있다.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주민공동체 참여는 물론 묵호의 찬바람을 활용한 언바람 묵호태 명품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6,70년대는 하루 두 번씩 고기잡이를 할 정도로 묵호에 개락이던 명태가 동해시가 개청 하던 1980년을 고비로 서서히 어획량이 감소되다가 1999년 이후에는 아예 씨가 마른 종으로 분류되었다. 수많은 묵호 사람들에게 수많은 일거리를 제공하고 경제를 책임진 명태 노가리가 지구온난화 영향인지 중국의 쌍끌이 어선의 영향인지 제 무덤 제가 판 식으로 씨까지 너무 많이 잡아서인지, 지금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묵호진동에서 덕장일을 30여 년간 해온 신경훈(남. 56)씨에 의하면 “등대 아랫부분에서 운영하던 소규모 덕장들은 대부분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요, 여기 덕장골에도 이제 열 셋집 많이 덕장을 하고 있어요(2023년 현재는 열 집만 운영), 주인은 60세 전후의 네 집을 제외하면 전부다 70대 이상이에요. 무엇보다 대를 이어 물려받아할 사람이 없어요. 하도 힘이 들기 때문이고, 목돈이 들기 때문이지요, 저기 덕장기둥이 동해시 전역에 쓰던 전화선 전봇대지요. 저 전봇대를 중고 값으로 사 와 중심 기둥으로 땅에 박고 파이프를 연결합니다. 콘크리트로 바닥을 만드는 비용도 500평 정도면 약 2억 정도가 들어가요.

묵호 명태덕장, 사진 _ 임황락

예전에는 그냥 흙바닥에다 통나무를 박고, 손목 굵기의 소나무로 고랑대를 2층으로 역어서 썼지요. 나무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어요. 망상이나 옥계 사람들이 산림 공무원 단속을 피해 한두 개씩 슬그머니 베어 보관하다가, 새벽녘에 덕장에 가지고 와 팔았던 시절도 있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덕장 일을 안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중국산 북어나 황태가 엄청나게 잡혀 들어와 건조 일은 장래가 블투 명했기 때문이지요.

덕장도 기후변화로 찬바람 늦어 건조 피해

그나마 덕장일의 장점은 일 년 중 두 달 정도만 죽어라 일하면 돼요. 동해바다에서 명태가 잡힐 때만 해도 9월부터 덕장 준비를 했지만, 이젠 기후 변화로 찬바람이 늦고 고르지 않아 12월부터 2월까지 두 달 반 정도 반짝하다 말아요. 그때는 집안 식구 모두 잠잘 시간도 없이 덕장일에 매달려야 해요. “


묵호 덕장 사람들이 부산에 있는 냉동 공장에서 원양태를 사오기 시작한 것은 약 30여 년이 넘었다. 묵호 북어(묵호 먹태, 묵호태로 알리고 있다)는 제수용품, 굿판, 상량식 등 민속 제의 용품으로 가장 많이 팔려, 신선한 명태는 필수였다. 육질이 단단하고 눈알이 빠지지 않게 하려면 깊은 물에서 잡은 한 달 이내 싱싱한 명태여야 했다.


당시 신 씨는 부산에 한번 내려가면 25톤 트럭으로 1.200편(1편은 보통명태 크기의 20마리)을 사 와 냉동창고에 보관해 놓고, 필요한 양을 꺼내 북평공단에 있는 할복장으로 가져갔다. 할복장 1칸에는 7명이 한 조가 되어 명란, 창난, 곤지와 내장을 분리하고 명태를 세척했다. 그 후 용달차에 다시 싣고 덕장으로 와서, 두 마리씩 아가미에 끈으로 꿰어 고랑대에 거는 작업을 마친 후에는 신 씨는 건조장 불침번을 선다.


“고랑대에 건 후부터 잠을 거의 못 자요. 비나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낭패를 보기 때문이죠. 몇 년 전에는 시에서 산복도로를 만들면서 공사장 마무리를 안 해,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자 공사장에서 흙먼지가 덕장으로 날아와 우리 덕장 사람들이 기겁을 해 시청으로 쫓어가 항의했지요. 묵호 덕장에서 두세 달 거래되는 돈이 100억에 이르고, 인건비가 5억이나 주민들에게 지급되는 경제주체라 강조했어요. 담당자는 처음에 밎지 않다가 우리가 조목조목 설명하자 수긍했어요. 다행히 항의가 받아들여져 공사도 조기 마무리 되고 먼지 방지도 대책을 세우고 해서 큰 피해를 줄일 수가 있었지요. 건조할 때는 제일 큰 골칫덩어리는 폭설이에요. 눈 예보만 있으면 그날은 비상대기죠.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고랑대 위로 시트를 쳐요. 그러다 눈이 그치면 다시 그 시트에 쌓인 눈을 털어 내리죠. 바닥으로 떨어뜨린 눈은 다시 용달차로 싣고 이동해 언덕아래로 버리죠. 눈이 바닥에 얼어붙으면 아무 일도 못하고 다치기 쉽잖아요. 그래서 눈만 왔다 하면 덕장 사람들은 죽을 맛이죠. “
옛 덕장은 현장에서 할복, 아침에 덕장목에 걸어

지방태가 한창 잡힐 때는 바지게꾼이 어판장에서 바소쿠리에 명태를 담아 하루 수십 번 덕장으로 지고 오르곤 했다. 그들이 명태를 덕장 작업장에 쏟아 놓으면, 기다리던 아주머니들이 할복을 시작한다. 해 뜨는 아침에 고랑대에 걸면 때깔이 곱게 나온다 하여 새벽녘까지 할복을 했다.


당시 노임체계는 덕장주가 값비싼 명란을 갖고 창난과 곤지는 인건비 대신 할복 아주머니들의 몫이었다. 집으로 가져간 창난은 아이들 몫이 되어 손질을 하곤 했는데 아이들은 미끈거리고 냄새나는 이 창난을 손질하다가 귀찮은 생각이 들면 몰래 숲 속에 버리곤 했다. 이걸 안 엄마들은 아이들을 닦달하고 때려주다 어쩔 수 없이 용돈을 주며 달랬다.


그래서 묵호 산짓골 아이들은 어느 동네 아이들보다 주전부리를 많이 했다. 덕장일이 한창일 때, 이 마을 아이들은 학교 갈 생각은 안 하고 늘 엄마들이 일하는 덕장으로 갔다. 엄마가 밥 해 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으니 아이들은 엄마를 찾아와 일을 돕다가 덕장집에서 차려온 밥을 엄마와 같이 배부르게 먹었던 시절이다. 배가 부르니 학교 갈 생각은 안 하고 아예 덕장에서 어머니 일을 돕는 게 다반사였다. 신 씨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다 덕장 곳곳에 보이는 드럼통과 돌의 사용처를 설명했다.

“냉동 공장에서 꽁꽁 언 동태를 용달차에 싣고 와, 저 고랑대 밑바닥에 쫙 깐다음 수돗물을 뿌려 녹이지요. 6시간쯤 지난 다음, 녹기 시작한 명태를 돌덩이로 내리쳐요. 그러면 얼음이 깨지면서 갈라져요. 그걸 저 드럼통에 넣고 물을 붓고 난 후, 긴 장화를 신은 남자들이 드럼으로 들어가 밟아줘요. 그러면 얼음덩어리는 밖으로 물과 함께 나오고, 녹은 명태가 말랑말랑 해지지요. 그러면 할복이 시작되지요. 할 복 후에는 아가미에 끈을 꿰어 두 마리씩 고랑대에 걸어 건조했지요. 다 마르면 또 싸릿대에 20마리씩 관태를 해 한 쾌씩 묶어 보관했다가 출하했어요. “
마른명태 손질하는 덕장, 사진_ 임황락작가

명태는 예전부터 버릴게 하나 없는 고기로 널리 아려졌다. 옛날 함경도 명천 땅에 태 씨 성을 가진 어부가 생전 처음 보는 물고기를 잡아 원님에게 보여주며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원님은 ‘명천의 명자에다 태 씨의 성을 가진 자가 잡았으니, 명태라 부르도록 해라’고 해서 명태라 불렀다.


명태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요리 방법이 다양하다 보이 이름도 갖가지다. 언 명태는 언태, 바람으로 말린 바람태, 골아버리면 골태, 물러지면 찐태, 딱딱하게 마르면 깡태, 고랑대에서 떨어진 건 낙태, 대가리가 없는 무두태, 꾸덕꾸덕 반건조 코다리, 그물에 걸려 죽은 망태, 음력 1월에 잡으면 일태, 투망으로 잡으면 망태 등 다양했다.


그러나 어떤 이름보다 동해 근해에서 잡히는 지방태와 최근 새롭게 찬바람에 짧은 시간 건조하는 방식으로 로컬 브랜드에 도전하는 언바람 묵호태다. 지방태는 얼리지 않고 무만 넣고 푹 끓이면 생태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생태는 구경 못한 지 20년이 넘었다. 동해에 한류가 형성 안 되니 명태가 잡히질 안았다.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진 오호츠크해나 배링 해에서 잡히는 원양태를 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거기서 잡는 원양태는 좋아진 기술 때문에 잘 빠진 상태로 동태가 되었다. 즉, 잡자마자 전기로 기절을 시키는데, 몸을 쭉 뻗은 상태로 동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북한산 명태가 많이 수입됐는데, 묵호 덕장 사람들은 낭패를 보았다. 북한은 기술력이 부족해 명태 몸통이 뒤틀리거나 머리가 떨어지고, 눈알이 빠진 상태로 냉동했기 때문이다. 묵호 덕장 사람들은 ‘묵호 먹태’란 말을 싫어했다. 묵호 덕장의 생명은 태깔인데 잘못 말려 색이 검은 북어를 흑태, 먹태로 불렀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비자가 황태와 비교해 먹태라 이름을 붙였다지만 덕장 종사자 입장에선 듣기 싫은 이름이었다.

북어, 과거 민간요법 재료로 인기

예전에는 북어가 서민의 민간요법 재료로 널리 쓰였다. 특히 6,70년대 연탄을 많이 쓸 때 연탄가스에 취했을 때, 가마솥에 북어를 넣고 푹 삶아 그 국물을 먹이면 의식이 돌아왔다. 또 어른 키 높이의 왕태를 푹 구운 국물은 헛배 부르거나 각기병, 독감에 걸렸을 때 먹으면 금방 나았고 한다. 먹을게 귀하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북어 몇 마리는 꼭 항아리에 보관을 했다가, 귀한 손님이 오면 술안주로 내놓았다. 항라라에 넣는 이유는 벌레가 끼지 않고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다.

참고 문헌_ 이야기가 있는 묵호(동해문화원 8년간의 기록, 조연섭 기획, 홍구보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