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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r 28. 2023

어쩌다 어달, 어달항 사람들!

2. 브런치와 떠나는 동쪽여행

어달마을은 강원도 동해의 북쪽 묵호와 대진동 사이 마을로 지형상 큰 부자가 없었고 새치등 바다고기를 많이 접해서 인지 주민들은 힘이 세고 소신 있고 주관이 분명했다. 마을 사람들은 기차굴로 학교를 다니며 미래의 어달항을 꿈꿔 오는데….!

요즘 사회적 건강 개념은 웰니스 등 새로운 용어가 생활용어가 되고 있지만 새천년이 시작되던 2000년 전후 ‘웰빙’ 이란 말이 한창 유행했다. 강원도 동해도 웰빙 도시를 조성한다고 묵호항을 중심으로 먹거리, 문화거리 사업이 활발했다. 묵호진동의 수변공원, 시원하게 뚫린 4차선 도로, 묵호항과 어달항, 대진 선착장, 깨끗하게 조성된 회 센터와 숙박시설 등이 현재의 결과물이다. 어달리 일대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토박이들은 확 달라진 마을을 보고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고 말한다.

어달항 옛보습, 사진_동해문화원 DB
지금의 어달리 모습, 사진_ 조연섭
어달항 알출, 사진_박재준

어달 마을에서 평생을 보낸 김인복(2020년 70세, 별세)씨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1958~1964)을 2013년 동해문화원이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묵호’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 어달리 학생들은 학교와 묵호시내로 가는 길이 서로 달랐어요. 학교는 앞재밭들로 해서 기차 굴로  빠져나가 사문재 아래로 갔지요. 시내로 갈 때에는 바닷가로 나 있는 길로 갔어요. 그런데 그 길 폭이 50센티쯤 박에 안돼  어른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좁았어요. 더구나 앞으로며 걷는 게 아니라 노상 바다 쪽으로 보며 파도의 크기를 살폈어요. 큰 파도가 칠 것 같으면 길갓집 마당으로 냅다 피했어요.
까막바위 앞 돌산을 지날 때는 일꾼들이 입구에서 빨간 깃발을 흔들며 ‘발파’ 하고 소리치면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며 귀를 막았었죠. 발파 소리와 함께 잘  벽에 있던 바위 덩어리가 깨지며 ’콰르르릉‘소리 내며 흘러내렸지요. 사실 이 돌산 덕에 묵호항 방파제 축조공사를 마무리하고 어달리 길도 넓어졌어요. 새마을사업이 전국으로 퍼질 때 그 좁던 길이 차 한 대 지나갈 만큼 넓어졌어요. 어달리 당시 마을 이장이자 새마을지도자인 유기동 씨가 앞장서고 주민들이 일삼동체가 되어 길을 넓혔어요. “
어달리 까막바위, 사진_동해문화원 DB
어달리에 사나? 어리 하기는!

어달於達의 어원중 어於는 고구려 말로 샘 또는 물, 달達은 산 또는 높은 곳을 뜻하는 말이다. 어달의 또 다른 속지명으로 어랠 또는 어랠골이라 부른다. 그래서 “어달리에서 사나? 어리 하기는!”, 어쭈, 힘이 센 걸 보니 어달리 새치를 많이 먹었나? “라는 우스갯말이 묵호 일대에서 유행했다. 김인복 씨는 이 말의 근거로 다시 기차굴로 학교로 다니던 때를 기억한다.

“어른들은 관솔불을 들고 다녔지만, 우리는 보름날 쥐불놀이 할 때처럼 깡통에 구멍을 내고 솔가지를 넣고 망우리를 돌리듯 갔어요. 기차 소리가 들리면 맨 앞에서 작대기로 굴 벽을 대고 걷던 아이가 ‘대피소다’ 라 소리치면 잽싸게 그곳으로 피신했지요. 그렇게 5백 미터쯤 되는 굴을 빠져나오면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며 낄낄댓어요. 얼굴, 목과 손에 묻은 때 자국이 시커멧으니까요. 우리는 창피해서 얼음물 같은 발한천 물로 때를 대충 씻고 학교로 가곤 했죠. 그런 걸 읍내 애들이 매일 봤으니 우릴 놀렸지요. 또 시내 애들도 미역 철이나 여름이 되면 우리처럼 굴을 지나 어달리나 대진으로 왔었죠. 내 친구 동생 중에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별 두 개 달고 예편한 사람이 있는데, 이 장군이 바로 저 넓적 바우에서 자기 진로를 정했다 해요. 1969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때 형들과 소나무가지 고리로 바위 밑의 미역을 채취하는데, 동해안 영공을 비행하던 군 헬기 한 데가 갑자기 나타났대요. 그런데 그때 비행사가 손을 흔들어주더래요. 그 모습이 너무 멋져 중3 짜리 학생은 그날부터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 결국 꿈을 이뤘다고 해요. “
관솔불_ 송진이 엉기어 붙은 소나무의 옹이 따위 부분에 붙은 불.

어달동은 예전부터 큰 부자가 없었다. 논은 아예 없고, 뒷개밭들, 앞재밭들, 부두밭골의 좁은 밭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또한 선주도 몇 없어서 주민들은 묵호 어판장에서 오징어나 새치를 받아와 바닷가에다 줄을 쳐서 건조해 팔거나 앞바다의 솔밭, 뱀바위, 넓적 바우, 검덩바우에서 미역, 진종 아리, 보리나물, 퇴박, 파래, 골뱅이, 홍합 등을 채취해 살았다. 그래서일까, 창호초등학교 올라가는 골짜기인 장자골엔 큰 부자가 살았고, 삼척 심 씨 시조인 심동로와 어달 주민의 가난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삼척 심 씨 시조 심동로 설화

심동로는 고려 공민왕 때 예의판서, 대제학을 역임하다 낙향해 추암 바닷가에 ‘해암정’을 세우고 말년을 이곳 일대에서 지냈다. 그가 사망하자 그의 후손들은 향로봉 정상의 ‘일출문’에서 한 마장 떨어진 곳에 묘지를 썼다. 그곳은 일출문에서 나온 빛이 지치는 곳이라 하여 명당으로 불렀다. 시제가 다가오면 심씨네 땅에서 농사짓는 대진과 어달 주민들은 성심껏 어물을 마련했다.


어느 해, 시제를 앞둔 어느 날 풍랑이 계속 일어 고기를 잡을 수 없는 성황이 됐다. 애가탈 정도로 바다를 바라보며 풍랑이 잦아들기를 바라며 발을 동동 구르던 중, 삼화사 주지 스님이 마을로 와 시주를 청했다. 불심이 깊은 한 노파가 주지에게 하소연했다.

“ 스님 지금 우리 형편에 시주할 겨를이 없어요. 매일 저렇게 풍랑이 일어 바다로 나갈 수 없으니, 심 대감에 제수 어물을 장만하지 못해 쫓겨 날 판이니 어디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 “
“글쎄요, 나무아미타불.”
“방도만 알려주면 앞으로 우리 모두 시주를 열심히 하겠으니 제발…..!”
주지는 노파와 주민들이 너무나 애절하게 부탁하는지라, 그 길로 심씨네 종갓집 원로를 찾아갔다.
“소승이 보기에 저 향로봉 일월문구멍이 너무 작아, 명당대지에 있는 임자의 후손들에게 음덕이 적게 가는 듯싶습니다. 그러니 금년 시제 때는 제사를 지내지 말고 저 바위를 아예 깨는 행사를 하면, 매일 아침에 동해바다에 떠올라 만물을 비춰주는 해처럼 만복이 후손에게 가득할 겁니다.”

원로 또한 불심이 깊은지라 긴급 문중회의를 열고 스님의 말을 전했다. 심 씨 일가는 만복을 받으려면 일월문을 깨야 한다는 스님의 말을 받아들여, 시제 날에 일월문을 깨는 역사를 거행했다. 그러자 바다의 풍랑이 잦아졌고, 어달 주민들에게도 제수 어물을 준비 못한 죄를 묻지 않고 예전처럼 농사를 짓게 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왔다.


어달 마을에서 마을의 정신과 정체성을 찾기 위해 평생을 보내며 마을을 지켜온 중심에 김인복 씨라는 인물이 있었다.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난 김 씨는 동해시 수협에서 30년 이상 경매사로 근무하면서 평가와 실적이 좋아 정년이 늘어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 후 2010년 논골담길이 조성되면서 해설사로 10년 마을 통장으로 10년 , 청춘 노인회장 등 봉사활동을 펼쳐오다 지난 2020년 10월 지병악화로 별세했다.

어달마을 어촌 뉴딜 사업도 사실상 김인복 씨 의견에 의해 시작
고 김인복씨 해양수산부 장관 표창, 2019 사진_조연섭

김인복 씨는 평소 늘 어달 해변마을의 문화재생을 통해 잘 사는 마을을 원했다. 어달마을의 어촌 뉴딜사업도 오래전에 이미 김 씨가 건의 한 사업으로 사업이 진행되던 2019년 어촌 뉴딜 300을 통한 어촌재생과 혁신성장에 기여한 공로로 해양수산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특히 마을의 수호신 서낭당 관리에도 큰 관심을 보여 다양한 민속 신앙 아카이브의 장소로 널리 소개되기도 했다.

어촌 뉴딜로 새단장, 어달항, 사진_ 조연섭
참고문헌_ 이야기가 있는 묵호(동해문화원 8년간의 기록, 조연섭 기획, 홍구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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