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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r 29. 2023

327명 사망, ‘대화퇴’어장 최대 해난 참사!

3. 브런치와 떠나는 동쪽여행

어민들은 오직 용왕님과 영등할머니, 성황신 배성주신께 조업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마을마다 오래된 큰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면 마을 신앙 서낭신을 모시는 서낭당이 있었다. 어민들은 제물을 풍성하게 차려 놓고 지극정성으로 바다를 관장하는 신께 비는 것만이 파도와 바람을 이겨내고, 만선이 되어오리라 믿었다.

어선 17척, 침몰과 실종 327명 이상 사망

그러나 1976년 10월 28일, 이런 믿음이 소용없음을 일깨워준 큰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나라 어선 해난  사고 사상 최대 참사가 된 ‘10.28 태풍’이 독도와 대화퇴 중간에 있는 ‘삼각지’에서 벌어진 것이다. 묵호, 속초, 주문진 어선 41척이 이곳에서 조업하다, 7척은 침몰하고 10척은 실종되었는데 사망 선원이 327명에 달한다. 실종된 선원 가족들은 부두에 불을 피워놓고 열흘이 넘도록 혹시나 살아 돌아오려나 기다리며 통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실종자들은 끝내 저 넓고 깊은 동해바다에 소리 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묵호항 노젓는 목선, 사진_동해문화원 DB

대화퇴는 독도에서 동북쪽 240마일에 있고, 일본과 '공동수역'이었다. 수심이 60-100m이고 바닥은 암반으로 되어 있어 수많은 해초와 플랑크톤이 서식했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곳이라 각종 고기가 모여들었다. 특히, 오징어는 우리나라 어획량 60%가 잡힐 만큼 큰 황금어장이었다. 그날 일기예보는 경보가 아닌 폭풍주의보였지만, 삼각파도가 불시에 닥쳐왔다. 당시 선원이었던 오우일(가명 68세, 묵호진동 거 주)씨가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어민들은 ‘대회퇴’를 '삼각지'로 불렀다
“우리는 늘 그곳을 대하퇴라 하지 않고 삼각지로 불렀어요. 수심이 60m 정도로 낮아 오징어가 유난히 많이 잡혔어요. 폭풍주의보가 내려졌다 해도 물 풍이라 부르는 C-앙카를 내려놓으면 큰 지장이 없었어 요. 낙하산 같은 자루에 바닷물이 가득 들어있어 조류 흐름에 따라 배가 움직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태풍이나 파도는 견뎌냈지요. 그런데 무슨 연유에선가 같이 조업하던 일본 배들이 물풍을 걷어 올리더니 태풍 전날 완전히 철수해 버렸어요. 그걸 본 우리나라 배들도 다음날 겁이 나. 한 척 두 척 삼각지를 벗어나 울릉도로 향했지요. 바로 그때 10m 높이가 되는 삼각파도가 밀려오면서 우박과 소나기가 내리붓고 거센 폭풍이 불었어요. 안타깝게도 침몰되고 실종된 배들 전부 피항 중이던 배들이었어요. 조업을 계속하다 삼각파도를 만났던 배들은 거의 피해 없이 그 아수라장을 나중에 탈출할 수 있었어요. 당시 우리나라 일기예보는 초보 수준이라 맞는 확률이 30% 수준밖에 안 되었지만. 일본은 이미 요즈음 우리 수준의 예보를 그때 했어요. 일주일 후까지 예보를 했기에 일본 어선은 삼각파도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또 일찍 피항했기 때문에 피해가 전혀 없었지요. 이 사고는 동해 안 어업인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어요. 나도 그때 선진 어업만이 이런 불 상사를 막을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묵호항 소속의 어선 중 무동력 범선에서 동력 철선으로 전환되는 시기가 70년대 중반부터였다. 범선과 교체된 '고데구리'라는 새끼 트롤 선은 작았지만 엔진이 있어 빠르고 힘이 있었다. 연안의 고기를 싹쓸이할 정도로 잡아 올렸다. 이 시기는 꽁치, 양미리, 노가리, 가자미, 명태. 이면 수 등이 엄청나게 잡히던 시기였지만, 고기 값이 싸 노력에 비해 큰 소득 이 없었다. 냉동 기술이 부족할 때라 당시 모든 배는 얼음으로 신선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묵호에는 돈을 깍지로 끌 듯 버는 곳이 제빙 공장과 목재소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워낙 많은 배들이 조업했기에. 수협 소속의 제빙공장에서 만드는 얼음은 늘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어민들은 울며 겨 자 먹기로 비싼 삼삼제빙과 대원제빙에서 만들어내는 얼음을 쓸 수밖에, 얼음으로 신선도를 유지하는 고기는 저장성이 없어 비싼 값으로 팔 수 없었다. 영동지역의 토박이 소비자들은 양미리. 가자미, 임연수어, 오징어. 명태 등 건조가 가능한 것 외의 생선은 꼭 오후 늦게 어판장이나 시장에 가서 떨이'를 샀다. 상인들도 밤을 넘기면 고기가 상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떨이. 떨이! 소리쳐 오전보다 반의 반 값에 팔아넘겼다.


젊은 선주들은 잡어를 많이 잡아봐야 힘만 들고 돈을 벌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오징어. 노가리. 명태 등을 잡기 위한 배와 어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오징어는 크고 작고를 떠나 덕장에서 건조만 하면 면 전량을 수출했기 때문에 늘 값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집어등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었다. 카바이드와 석유를 이용한 호롱불에서 획기적인 백열등으로 전환 30km 백열전구를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백열구는 전기를 엄청 먹고 발열로 수시로 터졌다. 또. 빗방울이라도 한 방 맞으면 그대로 터져. 어민들은 오징어 낚는 것보다 날씨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그 후 할로겐, 메탈 할 라이드라는 집어등이 개발되어 한참이나 유용하게 썼다. 그러나 이 전구 역시 열이 심해 선원들이 화상을 입기 일쑤였다. 2007년부터는 LED 발광전구가 개발되었지만 값이 너무 비싸. 정부에서 보조해 주어도 아직 보편화되지 못하고 있다.


동해를 찾는 관광객 중에는 밤바다의 오징어배 불빛의 신비로움에 넋을 잃기도 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데다 밤새도록 동해를 환하게 비추고 있으니 장관일 수밖에 없었다. ‘고데구리'는 장점이 많았지만 결국 연근해 어장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바다 밑바닥을 훌듯이 그물로 끄는 바람에 새끼 고기까지 다 잡아버렸다. 그러다 겨울철 자산인 노가리 명태마저 점점 잡히지 않게 되었다. 연근해와 대화에서 고기 잡아 큰돈을 만지던 몇몇 선주들은 큰 배를 사서 더 먼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다. 멀리 남미 칠레 앞바다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투자한 만큼 고기가 잡히지 않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많은 선주들이 망하고 말았다.


어민 스스로 3중 그물 저인망을 금지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다. 그들은 1990년 경부터는 무전기, 어군탐지기, 방향탐지기, 냉동기, 자동항법 장치 등을 장착한 배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경비가 엄청 들었지만. 같은 급의 배보다 선원을 반밖에 고용하지 않고도 어획량을 최고로 올릴 수 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오우일 씨 등 젊은 선주들이 주축이 된 어선 현대화를 시작했다. 현대화된 배는 기존 배들과 경쟁 자체가 되지 않았다. 첨단 시설을 갖춘 배는 출항을 했다 하면 고기를 더 실을 수 없을 만큼 늘 만선이었다. 다른 배들도 3년 정도 지나자. 스스로 현대화 시설을 갖출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거의 모든 배들이 평준화되었지만, 선진국 어업정책처 럼 감척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묵호항 소속 젊은 어업인들은 이제 거의 쉰 살을 다 넘겼다. 그 동 안 어선 현대화와 활어 잡이로 인한 소득은 늘어났으나. 연근해 황폐화는 여전해 늘 근심 속에 있다. 더구나 부정 어획이 횡행하고 바다 밑바 닥에는 버려진 그물이 그득하고, 한류 난류의 난조로 어군이 제 각각이라 예측을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문제는 묵호항 소속의 선주협회, 선원협회, 수협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과학어업을 도입해 지원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고 할 것이다.

고기잡이 떠나는 묵호항 고깃배, 사진_동해문화원 DB
참고문헌_ 이야기가 있는 묵호(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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