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연섭 Mar 30. 2023

묵호등대 지키는 노부부 이야기

4. 브런치와 떠나는 동쪽여행


맘보바지와 노란샤스를 좋아한 손만택 총각과 어달리 색시 조분남 씨의 사랑이야기!

묵호등대마을 논골담길은 장발머리에 맘보바지와 노란샤스를 좋아했던 이발소 총각사장이 있었다. 평소 노래를 좋아하던 총각은 이발소 문을 열어놓고 당시 유행하던 가수 한명숙이 불러 히트 한 노래"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를 틀어놓고 맘보춤을 추거나 묵호항 어판장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흥얼거리기로 소문난 인물이다. 더구나 총각은 붙임성이 좋고 활달한 데다, 이발소 손님도 많아 돈 잘 번다는 소문이 나서 일등 신랑감으로 통했다.


이웃에 사는 중매쟁이는 여러 번 오고 간 후, 어달리에 사는 20살 갓 넘은 '조분남'씨와 선을 보게 했다. 이발소 사장인 총각은 첫눈에 반해 오징어 할복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그녀를 매일 바래다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때는 묵호에서 어달리로 넘어가는 길은 폭이 좁아 옆으로 나란히 서서 손잡고 지날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까막바위 쪽 높다란 절개지가 보이지만, 당시는 하루에 몇 차례씩 돌산을 발파가 이어졌다. 바닷가 쪽으로 뻗은 돌산 끝과 까막바위 사이에 길이 나있어, 비가 내리거나 밤이 되면 조심조심 반 발짝 씩 걸어야 했다.

손만택(남,85), 사진_동해문화원 DB

'조분남' 양의 손의 잡아 주던 노란 사쓰 입은 사내인 손만택(남, 85)씨는 이후 동해문화원 이사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거쳐 이젠 마을을 지키는 큰 어르신이 되었고, 묵호등대 주차장 '종점슈퍼' 주인이다. 어르신은 지금의 부인인 조분남 씨와 연애시설 추억을 기억하신다.   

염소는 귀에 물이 들어가면 죽는다.
"지금은 까막바위가 바다에 있지만, 돌산을 발파할 때는 어달리로 가는 길과 거의 맞붙어 있었어요. 길이 좁기 때문에 거리를 가늠하려고 손을 뻗어 더듬으며 지나갔어요. 가막바위는 모서리가 각이 진 데다 결이 미끄럽고, 꼭대기에는 나무도 있고 풀도 있었어요. 하루는 내가 열자가 넘는 경심에 납돌을 달아 떨어트렸는데 바닥에 닿지 않아 올린 적이 있어요. 한 번은 돌산에서 풀을 뜯어먹던 염소 세 마리가 발파 소리에 놀라 이 까막바위 위로 건너뛰었어요.  지금은 상상이 안되지만 그때는 돌산과의 사이가 반발 넓이밖에 안 되니 염소가 건너뛸 수 있었지요. 염소 주인이 설설 바위로 기어올라가 염소를 붙잡다 그만 세 마리 모두 바닷물에 빠지게 됐지요. 그런데  빨리 건져냈지만 그만 귀에 물이 들어가 죽고 말았어요 염소가 귀에 물이 들어가면 죽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살평상 끝에 앉아서 남편의 까막바위 이야기를 조용하게 듣던 조분남(여, 80) 할머니가 사실인지 아닌지 헛갈리는 왕문어 이야기를 꺼냈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할복, 왕 문어 이야기
"한창 이까(오징어의 방언)가 많이 날 때였어요. 어달리에 사는 대다수 남자들은 이까배를 탔고, 여자들은 어판장에 나가 이까 배를 할복해 살았어요. 하루는 서낭당 뒷산에 살던 '새말댁'이 일 욕심이 생겨 밤까지 일했어요. 가끔  뱃사람들이 뒷방 치는 이까를 할복해 주면 품으로 이까를 줬어요. 품보다 그걸 바닷가에 건조해 잘 팔면 목돈이 되던 시절이죠. 하루는 밤 10시가 되도록 '새말댁'이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이 소나무 송진목을 활용한 관솔불을 밝혀 마중을 나갔었죠. 그런데 세상에 '새말댁'이 까막바위 앞에 다리가 하나 없어진 채 넘어져 죽어 있었어요. 평소에 남에게 원한 살 사람도 아니고 죽자 하고 일만 했던 새말댁이라 많은 사람이 왜 그런 모습으로 죽었는지 의아해했어요. 또, 이상한 건 '새말댁'의 고무신은 두 짝다 있는데 대야에 있어야 할 이까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어요. 사고현장에서 날밤을 세운 경찰 세 명이 날이 밝자 동네 사람들과 돌산 발파 인부를 상대로 이것저것 조사했지만, 단서를 찾지 못했어요. 경찰이 미 해결로 수사를 마무리하자, 가족들은 할 수 없이 시신을 공동묘지에 묻었어요. 동네 사람들은 장사를 지낸 후에도 한참이나 '새말댁'의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어요. 일부 주민은 '이 짓은 틀림없이 까막바위 굴에 사는 왕 문어가 그랬을 거'라고 우겼다. 이유는 없어진 다라 하나 때문이었지요. 왕 문어가 배가 고파 까막바위로 나왔다가, 마침 '새말댁'이 지나가자 이까를 문다는 것이 그만 실수로 다리를 물어 그래 됐다고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믿기 시작했어요. 또 다른 사람들은 절개지에서 큰 돌이 굴로 ‘새말댁’의 다리 하나를 쳤기 때문에 없어졌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절명했다고 우겨댔어요."

'할머니, 그 이야기를 들은 겁니까? 아니면 그날 현장에 있었습니까? 하고 막 물으려는데, 갑자기 '도째비골'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째비골 이야기
" 등대 저쪽 산비탈을 보고 누구는 '또제비골'이라 부르는데 그건 잘못된 거예요. 예전 저 산은 소나무와 아카시아나무가 띄엄띄엄 있었고, 그 사이에 찔레나무가 엄청 많았어요. 그 뒤로 온통 공동묘지였고요. 밤이 되면 주먹만 한 파란불이 여기저기 떠다녔어요. 하루는 우리 이종오빠가 어달리에서 제사 지내고 '도째비골'을 지나는데, 어떤 처녀가 “오라버니 일루 와요!" 하며 앞에서 자꾸 끌더래요. 자세히 보니 긴 머리에 치마저고리는 입었는데 발이 보이지 않고 마치 날아가는 모습처럼 길더래요. 그래,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면서도 자꾸 따라가다 보니 날이 새, 집으로 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 입고 있던 겉바지, 속바지가 걸레 조각처럼 회 처져 있고, 온 다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어요. 찔레나무 가시에 긁힌 거지요."

할머니는 목이 말랐는지 상점으로 들어가 시원한 캔커피를 가져와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할머니의 두 이야기를 믿어야 하나 마나 망설이는데 이번에는 노랸샤스의 남자, 할아버지가 다시 빈 캔을 밟으며 할 말이 더 있다며 요즘의 생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묵호등대 산복도로 개설의 중심, 손만택 어르신
"저기 주차장 앞에 있는 쓰레기를 치우러 매일 새벽 청소차가 오면, 이 캔 거피를 세 개씩 꼭 서비스해 왔어요. 또, 젊은이들 한떼가 저 등대 벽화나 논골담길 글이나 그림을 그릴 때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갠 커피를 서비스했어요. 우리 동네를 찾아온 손님들인데 나이 든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유? 그런데 저 할멈이 잔소리했다면 못 했겠지, 무언의 동조를 해 줬으니 감사할 따름이지 뭐. 지금 이 등대로 오는 찻길이 여러 개지만, 옛날에는 사문재로 해서 창호초등학교로 돌아오는 길 하나뿐이었어요. 내가 통장일을 볼 때 양면괘지 10권에 874명의 주민 도장을 받아 산복도로를 내 달라고 시청에 민원을 넣고, 시장과 국회의원을 볼 때마다 졸라댔었죠. 그래서 겨우 길이 났어요. 길이 나고 버스도 들어오니 좋은데, 우리 집 있는 곳이 종점인 게 아쉬워, 이번에는 순환도로를 내달라고 민원을 넣었어요. 담당자가 직접 와 조사해 보니 '등대 아래쪽은 급경사고, 뒤로 순환도로를 내면 주민중에 반 이상이 이 마을 떠나게 됩니다.'라 말하는 바람에 내 피했지요."
묵호등대 야경, 사진_임황락작가

관광버스 두 대가 올라왔다. 주차장에 진입하려다 자리가 없자 등대 담 옆으로 주차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외국인들이 내렸다. 그들은 순백색의 등대를 쳐다보고, 눈 아래 보이는 동해바다와 묵호항 전경을 보며 '원더풀!'을 연발했다. 조분남 할머니는 외국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또다시 회상에 빠진다.

남자는 지게에 여자는 대야로 모래와 자갈 날라


"묵호등대를 짓기 시작한 때는 1962년 꽁치철이 끝난 6월이다. 묵호등대마을에 살았던 손만택(남, 85세)씨는 당시가 지금의 부인인 조분남 씨와 한창 연애할 시절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웃과 모래와 자갈, 시멘트를 날랐다. 남자는 지게에 지고 여자는 고무대야에 이고 이듬해 6월까지 등대 건립에 함께 참여했다. 남자는 <온표>, 여자는 <반표> 짜리 전표를 받았고 당시 온표 하나에 보리쌀이나 밀가루 한 되로 바꿨다고 기억한다. 꽤 짭짤한 품이었어요 당시로는, 그렇게 이 동네 주민 대다수가 매달려 고생 고생해 등대를 만들어 이듬해인 1963년 6월에 준공한다. 그런데 2006년 3월이 되자, 등대가 낡았다고 허문다는 거예요. 커다란 장비가 와 맨 위 뾰족한 ‘등롱‘을 제거하고  몇 번 두드리니 폭삭 주저 않다라고요. 옛날 생각이 나 눈물이 확 쏟아지더라고요. " 그때는 세월이 좋아, 한 일곱 달 뚝딱뚝딱하더니 저 모습으로 등대는 새로 세워지게 됐죠. 하여튼 우리 마을은 옛날 오징어나 노가리 명태로 먹고살았지만, 요새는 저 등대로 먹고살아요, 이유는 동해문화원이 2010년부터 마을에 논골담길을 만들면서 여행자들이 많이 찾게 된 거지요. 그래서 내일은 주일인데 교회도 안 가고 상점문을 열어야 해요. 우리 동네를 찾는 관광객이 '뭔 놈의 동네가 물도 안 파나?'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그래요."

묵호등대를 지키는 두 부부가 운영하는 등대 주차장의 ‘종점슈퍼’는 마을 '논골담길'을 찾아오는 전국의 여행자를 위한 쉼터이며 사랑방이다. 봉사자들에게는 늘 음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마을주민에게는 늘 새로운 도전의 민원 해결사 두 노부부는 묵호등대마을의 역사로 오늘도 묵호등대와 논골담길을 지키고 있다.

묵호등대 낙성식, 1963.6 사진_국가기록원
참고문헌_ 이야기가 있는 묵호,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_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매거진의 이전글 327명 사망, ‘대화퇴’어장 최대 해난 참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