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_ 권순일 구술 편
구술자_ 권순일
동해에서 나고 자란 선 주민으로 현재까지 수산물 도소매업인 ‘태평양 수산’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른 나이부터 시의원을 거쳐 시의회 부의장을 역임하면서 지역발전에 이바지하여 왔다. 우연한 계기로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지역주민과의 유대 및 소외된 계층들의 복지증진에 기여하였다. 현재 사회복지협의회 회장 및 동해시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대표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시의원에서 사회복지로 봉사자의 삶
동해, 묵호에서 나고 자라 초·중·고를 다니며 학창 시절 급우들과의 추억 및 먹거리 이야기를 들어보고, 구술자님이 기억하는 엄하신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님의 모습등 가족에 대한 추억을 담아 보았으며, 구술자님이 기억하는 80~90년대 활황기 묵호항 주변 및 인근 발한동, 묵호동의 상권 변화를 자세히 듣고자 하였다. 또한 이른 나이부터 시의원을 거쳐 도의원을 역임하면서 지역발전 및 지역주민과의 유대 및 소외된 계층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사회복지협의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으로 마무리했다.
부친이 강릉경찰서 묵호지서 파견 근무 때 묵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고향은 강릉이시고 구술자의 아버지는 발한 삼거리 묵호극장 부근에서 사진관을 하셨고 지금의 신화스튜디오를 운영하시는 사장님에게 팔고, 가구 공장, 인쇄소 운영을 하셨다. 집안이 어려우실 때 손재주가 있으신 구술자의 어머님은 구술자가 초등학교 5학년부터 묵호극장 바로 앞에서 포목점을 시작하셨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부터 가세가 힘들어져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힘든 시절을 보냈다. 발한동의 젖줄이었던 발한천에서 어릴 때 미꾸라지도 잡았고 장마 때는 지금 동해 목욕탕 앞에 물이 범람해서 시장 안으로 물이 많이 쳐들어왔다. 발한천은 새마을 시장, 먹자골목, 발한 공중화장실 부근을 1차, 동해 목욕탕까지 2차, 지금처럼 모두 복개되었다. 새마을 시장이 없어진 곳에는 도로가 생겼다. 지금의 중앙시장 이 복개 전에는 그냥 냇가였다.
동해 목욕탕 뒤쪽에는 ‘노가리 시장’이라고 해서 전국의 오징어, 노가리, 명태 건조 70%가 묵호에서 이뤄졌었다. 묵호는 고등학교 졸업하던 무렵 76년도부터 80~90년도까지 상업이 활성화되었고 굉장히 잘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시험 첫 회 실패해서 나중에 편입하기 위해 우선 삼척전문대 토목과를 입학하여 졸업하고 원주 비행장 지원해서 공군 기술병으로 3년을 복무했다. 군대 제대 후 편·입학해서 대학을 다녔다. 대학 졸업하고 1주일 후,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향인 묵호에서 어머니와 함께 포목점을 하셨다. 비디오가게, 시트커버회사 강원 대리점, ‘장군’ 호프집, ABC 볼링센터,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고 94년도에 지금의 수산업을 시작하셨다.
90년도에 결혼하여 딸 둘, 아들 하나의 삼 남매를 두었다. 자녀들 교육이나 훈육은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친구 같은 아빠가 못된 게 조금은 아쉬웠는데, 애들이 커가면서 엄한 게 무너져 가고, 친구가 되는 것 같다고 하셨다.
구술사_ 맛보기
구술질문_ 발한삼거리 쇠퇴 이유?
면담자 : 묵호 발한 삼거리가 90년 초반까지는 활성화 됐었는데 갑자기 침체 됐잖아요. 선생님 말씀하셨던 말씀을 간단하게 해 주시긴 하셨는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구술자 : 천곡의 신시가지가 생기면서 제일 처음에 이제 뭐 천곡 나오시면 시청만 80년에 개청 하면서 시청만 덩그러니 있었죠. 다른 게 없었어요. 그리곤 뭐 우체국 뭐 세관 교육청 뭐 등기소 뭐 요거 말고는...
면담자 : 식당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요.
구술자 : 식당들도 없었어요. 없었는데 뭐 유일하게 지금 시청 앞에 로터리에 뭐 기억나는 곰탕집 곰탕 설렁탕집 그리고 칼국수집 그때는 뭐 시청 직원이나 관에서 나와서 간단히 먹을 그런 집만 뭐 몇 집 있을 정도로 있었고, 없었어요. 근데 그게 점점 이제 발달되고, 또 아파트가 이제 들어서면서 현대 동화 뭐 이렇게 쭉쭉 들어서면서 주거 환경이 확 달라졌잖아요. 그러면서 인구 밀집이 되다 보니 뭐 사람 따라 상권 자체가 움직이게 되죠. 그러니 초창기에 메이커가 뭐가 움직인 지는 지금 기억을 못 하는데 메이커형 메이커가 우리 메이커가 하나 움직이니깐 다음부터 다른 메이커들도 본사에서 그렇게 점령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아무래도 메이커를 입는 되는 가겟세가 좋았는데 그게 묵호에서 다 빠지다 보니, 어느 날 뭐 몇 년 만에 준 폐허 상태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태까지도 갔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매장을 하나 관리하고 있는 게 보니깐 갑자기 뭐 나간다고 그때 그래서 당황했던 적이 좀 있었죠. 그게 뭐 탄력을 받으니깐 은행들도 아까 말씀드렸던 발한동에 있던 은행들도 ATM 기계 하나 놓고 빠지던가, 심지어 지금 그것까지도 없앤 데가 많은데, 그때는 지점을 천곡으로 옮기면서 창구를 하나 만들어서 ATM 기계만 놔두고 옮기고 점점 그러면서 금융권도 다 빠지고 뭐 그러니 외형을 올릴 수 있는 매장들이 다 빠지니깐 많이들
면담자 : 발길이 끊어지니깐
구술자 : 예예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또 점점 또 주거를 계속적으로 주거를 더 좋고 또 많이 뭐 건설을 하니깐 주거도 점점 사람들이 그러니 묵호초등학교가 요번에 제가 듣기로는 전교생이 60명인가 70명 들었어요. 저희 땐 3000명이었거든요. 그러면 3000명에서 60명 70명 갈 때는 사실은 옛날 따지면 저기가 분교밖에 안 될 정도로 지금 열악해졌는데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될지 참 얘기를 들었고 볼 때 야 이게 뭐 격세지감도 이렇게 느낄 수가 있는가 그 크고 학교 가도 뭐 뛰어놀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빡빡했던 학교가 지금 이렇게 됐다는 거 거는 이게 정책이 잘못된 건지 또 시대의 흐름이 너무 빨랐던 건지는 참 감당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을 굉장히 또 동문회장을 지낸 저로서는 참 가슴이 아픕니다.
면담자 : 좀 안타깝긴 한데 지금 그래도 요즘에는 발한동이 관광도시로 좀 바뀌면서 조금 변화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구술자 : 요번에 그동안 뭐 여러 가지 관광에 대한 투자를 뭐 역대 시에서 많이들 준비를 했지만은 아마 가시적인 성과는 크게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 요번에 했던 삼화의 무릉별천지
면담자 : 네
구술자 : 그거랑 지금 특히 어달 생긴
면담자 : 도깨비골
구술자 : 도째비골 그거는 굉장한 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아요. 깜짝 놀랐어요. 저도 그 정도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참 잘 만든 것 같아요. 잘 만들고 그 동네가 지금 너무 달라졌어요.
면담자 : 좀 핫해졌죠.
구술자 : 핫해졌어요. 그리고 저는 또 매장이 목호동에 있다 보니깐 차의 흐름을 많이 이제 보는데 차 흐름이 옛날보다는 확연히 달라졌어요. 이거는 이런 것 때문에 이 시너지 효과가 굉장한 거구나 아마 요번 이런 아주 시에 시장님들한테서 시에 고생하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면담자 : 발한동 같은 경우는 지금 이제 다시 발전이 좀 돼가고 있는 느낌이 좀 있는데, 묵호항 주변에 예전에 묵호항 주변이 다 바다라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구술자 : 그렇겠죠. 저게 항이 묵호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아마 그 오솔길 하나 정도만 있었을 것 같아요. 밑으로 가는 길 옛날에 이제 까막바위 앞에 건물을 짓기 전까지만 생각해 보면은 그 뒤로 차가 못 다녔었어요.
면담자 : 앞쪽 까막바위
구술자 : 까막바위 지났어도 우리 어릴 때는 길이 좁았던 것 같아요. 좁았는데 까막바위 앞에 타운이 뭐죠
면담자 : 무슨 회타운 같은 게 예
구술자 : 그거 세우고 그때 해수 사우나 생기고 그걸 지으면서 어떻게 보면 부분의 지도가 좀 바뀐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고마운 분이죠. 돌아가셨지만 김종환 사장님이 그걸 만드셨는데 굉장히 그것 때문에 거기 길이 좀 더 넓어지고 좀 더 넓어져서 지금은 뭐 어달리까지도 굉장히 핫한 지역으로 분류되고 지금 뭐 집값도 바닷가 쪽 조만권 좋은 데는 상당히 지금 비싸다고 들었습니다.
면담자 : 그러면 그때는 묵호 쪽에 보면은 개구석이라는 얘기를 제가 들었어요. 혹시 개구석이 어떤 유래로 불리게 됐는지 혹시 아세요.
구술자 : 우리도 어릴 때는 개구석 개구석해서 멍멍이 개인 줄 알았는데
면담자 : 저도요
구술자 : 크랩 걔로 봐요. 크랩
면담자 : 네
구술자 : 기 기죠 개 어이 크랩으로 이제 개구석이라 하는데 그게 이제 아마 바닷물까지 들어오니깐 그까지 개가 많이 올라와서 아마 그렇게 개구석으로 된 걸로 제가 들었습니다만 정확하게는 제가 뭐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네요.
면담자 : 그럼 그쪽
구술자 : 그 항구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아마 1942년 돈가 1년 돈가 내가 묵호항(1937년 개항)이 들어설 때 아마 밖에 항을 만들고 방파제를 만들고 할 때 이제 매립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매립을 하면서 인제 이쪽까지 도로까지 다 인제 매립이 됐었겠죠. 그러다 보니 그전에는 당연히 그까지 매립하기 전에 물이 들어왔을 거라고 저도 그렇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기록가_ 최은경
동해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결혼하고도 꾸준히 건설업 사무업무를 보며 때로는 엄마로, 때로는 아내로, 때로는 딸로 바쁜 삶을 살아왔다. 현재는 근무 중 사고로 인해 잠시 쉬면서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재활치료 하면서도 사회복지사 자격증, 서평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새로운 디딤돌이 되는 계기를 만들어 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글담 독서동아리장으로 활동하며, ESG 팝업북 만들기 과정을 수료하여 독서동아리 활동, 바닷가 작은 마을 ‘망상해뜰책뜰’ 서포터스, 동해문화원 생활사 기록가로 활동 중이다.
기록가 활동후기
내가 나고 자란 동해의 묵호동이란 지역은 극히 작은 일부분이었다. 그저 어릴 때는 오징어가 많이 나고 생선비린내가 진동하던 기억뿐이었는데, 이번에 2023 디지털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에 참여하면서 생활사 기록가란 무엇인지 새롭게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또한 이번 기회로 나는 정말 그동안 눈만 뜨고 있었지, 눈을 감고 살아온 것 같다. 생활사 기록가를 하며 묵호항의 시대적 변화의 흐름도 알 수 있었고, 수산업 황금기가 도래하여 동네 강아지도 만 원권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의 강원도 최고 지가를 형성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1990년부터 쇠락하며 생활권이 왜 바뀌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면담자로서 지역 공부나 자료 수집이 너무 부진했고, 묵호항을 터전으로 삶을 살아오신 구술자님들의 구술을 단 몇 시간에 담아낸다는 것은 정말 허황된 꿈이 아니었나 싶다. 좀 더 체계적으로 접근해서 자료를 정리하지 못했던 점이 지금 생각하니 너무 아쉬움이 남았고, 면담자로서 촬영 전 구술자님과의 라포 형성의 시간이 많이 부족했던 점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나는 기억할 것이다. 이 두 구술자님의 구술을 정리하면서 그분들의 살아온 이야기들이 어느 누군가에겐 추억이 될 것이고, 어느 누군가에겐 응원의 글이 될 것이며, 많은 이들에게 묵호항의 옛 모습을 좀 더 발전된 묵호항을 도약하는 주춧돌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