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_ 반병섭 구술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 동물애호가들이 듣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 될 수도 있겠으나 구술의 특성상 기록으로 남기게 됨을 먼저 밝혀둔다. 이 말은 영화(榮華)와 번성(繁盛)의 상징처럼 구전됐다.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회자(膾炙)된 지역은 전국 곳곳에 있었다. 굴비로 유명한 영광, 김 양식의 중심인 완도, 명태, 오징어 잡이 전초기지였던 묵호, 속초 등이 대표적이다. 동해의 감성관광지 논골담길은 만 원짜리를 입에 물고 있는 개의 조형물과 벽화가 그려져 인기다. 주로 수산물의 생산 및 유통 거점이었던 어촌지역이다. 수확 때까지 시일이 걸리는 농산물에 비해 수산물은 즉시 현금화가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묵호를 기반으로 생의 절반이상을 살아온 반병섭 구술자와 허지원 기록가의 구술이야기로 묵호를 만나본다. 글 순서는 프로그램 소개와 구술자 인터뷰, 기록가 소개 및 소감 순으로 맛보기 형태로 기록했다. 영상 등 세부 구술 내용은 한국문화원연합회 문화포털 ‘지역N문화’에서 볼 수 있다.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산업유산 묵호항을 배경으로 구술자 20명과 시민기록가 10명이 참여해 일궈낸 성과다. 국내 정상급 구술사,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 실장) 컨설턴트 두 분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마치고 기록한 구술사 대장정이다. 구술에 참여한 기록가가 작성한 소감을 각색하고 요약 기록해 둔다. 열아홉 번째 구술자는 반병섭 씨로 기록은 허지원 생활사 기록가가 담당했다.
구술자_ 반병섭
1937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때는 아버지가 일본 공대를 나와 ‘삼화제철’에 근무하시게 되면서 삼화에서 살았고, 주거지 인근의 일본인에게서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배웠다. 국민학교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건강이 좋지 않아 정선병원에서 수술하시면서 병원 일을 도우며 학업에 매진하였다. 군 제대 후, 정선 농협중앙회에서 근무하며 학교 선생님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명주군 묵호읍에서 지인이 운영하는 ‘정금당’을 아내가 인수하면서 묵호 농협중앙회, 상호신용금고에서 근무하였다. 본업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으며 동해시 기독교 장로연합회 회장, 동해시 시의회 부의장으로서 시의원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현재는 S-OIL 묵호 주유소를 운영하며 강원도 판매량 1위를 3번이나 하셨다.
묵호항 상업 변천과 흐름
구술자와의 면담은 주관 기관 동해문화원에서 진행됐다. 구술자는 현재 묵호에서 묵호주유소를 운영하시며 강원도 판매량 1위를 3번 할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계신다. 1937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의 반병섭 구술자는 일제강점기 시절 삼화 지역발전을 위해 일본 공대를 졸업하고 광업소에서 근무를 하시게 된 아버지를 따라 명주군 삼화로 이주했다. 당시 삼화에 삼화제철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구술자는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배우게 된다. 구술자가 당시 국민학생일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건강이 좋지 않아 정선으로 이주해 정선병원에서 병원 원장님의 배려로 방 한 칸을 쓰고 병원 일을 도우며 주경야독하며 학업에 매진하게 된다. 이를 기특히 여긴 정선병원장은 구술자를 양아들로 삼게 된다. 병원장이 교회 다니는 장로였기 때문에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게 된다. 생활의 보탬이 되고자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 군단 CP 통신병으로 입대하여 만기 전역을 하게 된다. 정선병원장의 권유로 정선군 농협중앙회 입사시험 치르고, 입사하게 된다. 정선군 농협중앙회 근무시절은 예금과 새마을운동 교육을 담당했다고 한다. 정선군 농협중앙회에서 근무하며 선생님으로 재직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개가 만 원권 지폐를 물고 다녀?
아내가 명주군 묵호읍에서 장인의 수양딸이 운영하는 금방인 정금당을 인수하게 되면서 구술자는 농협중앙회 묵호지점으로 이직을 한다. 상호신용금고에 이직하게 된 계기는 민철기라는 분의 권유로 하게 되었다. 상호신용금고에 재직하면서 묵호항과 묵호시장 상인들의 예금과 대출을 담당하는 일에 종사했다. 아내가 운영하는 정금당은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으며 묵호항과 묵호시장의 상인회에서 금계를 했기 때문에 금을 맞추러 많이 왔다고 한다. 당시 묵호항과 묵호시장은 호황기였으며 우스갯소리로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다고 한다.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을 하면서 쇠퇴하는 묵호항과 묵호시장을 개발하려고 많이 노력했으나 상인들의 반대로 무산되어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신다. 구술 촬영 마지막, “묵호항이 활성화되어 묵호 어민들과 시장이 발전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셨다.
기록가_ 허지원
고향은 대구이며 3년 전 결혼 후 동해시에 정착하여 건강이 좋지 않아 전업주부로 가정 살림에 충실했다. 그러던 중 2번에 걸친 자연 유산으로 우울증에 걸려 집순이 생활을 했다. 우울증 탈피의 수단으로 취미로 블로그를 하다, 2022년 4월 네이버 여행 인플루언서로 선정이 되어 ‘@미소 가득 지원’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발한 SNS 활동을 하고 있다. 이방인이라 동해시와 묵호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번에 기록가로 활동하면서 향토 토박이 구술자님들에게 과거의 묵호의 모습과 현재 묵호 모습을 상세히 들으며 지역에 대해 더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기록가로 활동하며 현재는 자연 임신 3개월 안정기를 지나 태교로 구술 이야기를 듣고 있다.
구술 소감
친한 언니에게 처음 동해문화원에서 생활사 기록가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활사 기록가와 구술이란 단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일인지 잘 몰랐다. 강원도 동해시에서 서울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으로 교육을 다니며, 구술사와 생활사 기록가가 하는 일에 대한 교육을 받고, 어느 책에서도 얻지 못하는 삶의 지식과 지혜, 그 지역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며 생업을 이어오신 토박이분들에게 전해 듣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이란 걸 알게 되자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면 안 되겠구나!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지역의 역사를 기록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생활을 많이 하지 않아서 처음 기획서를 작성하는 일부터 막막했다.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에서 교육받고, 아우름비즈서 피드백이나 조언도 구하며 기획서도 난생처음 작성해 봤다. 카메라보다 핸드폰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라 카메라 앞에서 디지털로 구술 촬영을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구술자님과 긴장도 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하다 보니 카메라 촬영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촬영이 끝나도 할 일은 많다. 기억이 소실되기 전에 면담일지부터 작성해야 하고 녹취록 작성, 상세목록 등 19가지 서식을 작성해야 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날도 부지기수였다. 완벽한 서류작성은 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검수본을 보면 부족한 점이 많이 보여서 허탈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묵호의 역사와 더불어 인생을 다 바쳐서 생업을 이어오신 구술자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생활사 기록가로 참여하게 돼서 뿌듯한 마음이 든다.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렵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디지털 생활사 기록가와 구술자님들을 응원한다. 앞으로 목표는 동해문화원에서 강의를 하셨던 김태수 박사님이나 이승철 박사님처럼 한 지역에 한 달 살기를 하며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누구도 기록하지 않지만, 책에서도 찾을 수 없고 인터넷에서도 검색할 수 없는 그 지역의 고유한 향토문화와 역사를 기록하며 자료를 남기는 책을 한 권 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