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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13. 2024

[구술] 온몸으로 묵호를 경험한 황종태 씨!

20.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_ 황종태 구술 편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산업유산 묵호항을 배경으로 구술자 20명과 시민기록가 10명이 참여해 일궈낸 성과다. 국내 정상급 구술사,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 실장) 컨설턴트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마치고 기록한 구술사 대장정이다. 구술에 참여한 기록가가 작성한 소감을 각색하고 요약 기록해 둔다. 열입곱번째 구술자는 황종태 씨로 기록은 최은경 생활사 기록가가 담당했다.

 구술자_ 황종태

구술자, 황종태

1936년에 태어나 우리가 몰랐던 묵호의 옛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시는 분이며, 명태잡이 조업 중 이북에 끌려가 28일 만에 귀환한 이력으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시대 배경을 묵묵히 가슴에 담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 내 아버지이시다. 묵호시장 인근에 민박업을 운영하셨고, 현재는 큰 아드님에게 물려주고 여가생활을 하고 계신다. 찾아뵙겠다고 연락드리고 가면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핑크빛 카라셔츠를 멋들어지게 입고 맞이하시는 연세에 비해 정정하신 구술자님은 눈물의 묵호항을 온몸으로 직접 경험하시며 울고 웃던 묵호항의 산증인이시다.   


 군대 후임 인연 제2의 고향이 된 묵호항 삶

어부의 삶, 오징어 덕장을 하셨던 이야기로 생업 변환의 이야기를 담고자 하였다. 구술자의 삶을 영상으로 담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구술자님 이야기를 최대한으로 듣고 기록하고자 했다. 경남 고성군 동해면이라는 곳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나셨고, 형제분 중 여섯 분이 아직 살아계시고, 일 년에 한두 번 부모님 제사 때 모이며 형제간 우애가 좋다. 유년기 시절에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학창 시절을 보내셨다. 6.25 전쟁 당시 열다섯, 열여섯 정도 나이였고 체구가 작아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으셨다. 전쟁이 끝나고 군에 입대하였다. 경남 고성군 동해면에서 24살까지 생활하셨다. 군 제대 후 후임의 소개로 결혼을 하였고 일을 찾아 제2의 고향 묵호로 혼자 이주하였고 나중에 부인도 옷장사를 접고 올라와 같이 살게 되었다. 수도시설이 원만하지 않았던 묵호동 일대의 수도공사에 직접 참여하셨다.


묵호항을 기점으로 배를 처음 타시게 되면서 어부의 삶을 사셨고, 생계를 위해 명태잡이 조업을 하다 이북에 끌려가 28일 만에 무사히 귀환했지만, 그 이력으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어디다 하소연을 할 수 없는 시대적 배경을 묵묵히 가슴에 담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신 아버지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그 옆을 항상 함께하시는 배우자님이 계신다. 결혼 이야기, 조업하시다 이북에 끌려가셨던 생각하기도 아찔했던 이야기와 오징어 덕장을 잠깐 하셨던 이야기, 마냥 풍족할 것만 같던 바다의 명태 오징어가 어획량이 줄어들 시기에 과감히 20년 넘게 타신 배 사업을 접고 민박집을 운영하시게 된 이야기들을 빛바랜 오랜 기억을 되짚어가며 이야기해 주셨다. 활황기와 쇠퇴기를 지나 현재는 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는 묵호항을 누구 보다 그 변화 시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며 생활하셨다.     


 구술사_ 맛보기

질문주제_ 명태잡이하다 이북에 끌려간 이야기

영상 구술 준비

면담자 : 선생님 아까 말씀하신 게 명태잡이하시다가 북에 끌려갔다 하셨는데 그 얘기를 좀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구술자 : 그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면담자 : 아 그러세요.

구술자 : 왜 그러냐 하면은 이북 사람들이 우리 교육을 시킬 때 노동자 농민을 나가면 합심해서 기회만 있으면은 재물 할라 이기야, 그런 그 저기니까. 지금 음 20년이 지났지만은 그 얘기를 하면 이북에서 볼 적에도 좋은 것이 아니고 어 이남에서도 별로 좋은 건 아니고 그래서 안 했으면 좋겠어.

면담자 : 그건 그 내용 말고 걔네가 어떻게 그 배를 데리고 갔는지 이런 거까지는 괜찮으실 것 같은데 또 어려우실까요?

구술자 : 그때는 그 한계선, 말하자면 요래 가지고 여기는 이북이고 여기는 이남바다면 한계선에 이 넘으면은 그때는 물 조류가 이북을 끌려가는 거야.

면담자 : 조류가 넘어가면 여기가 경계선인데 이쪽에 있어도

구술자 : 낚시 뿌려가지고 잡을 동안에 넘어가 버린다.

면담자 : 자발적으로 이제 물살 때문에

구술자 : 저기 있던 함대가 이북 함대가 많아 딱 보고 가들 내려다 싹 보면 알잖아. 딱 와서 넘었으니까. 한계선 넘었으니까 동무들 수고하십니다. 하고 딱 작업 중지 이랬다고. 모래 줄 던져가지고 그걸 끌고 가는 게

면담자 : 그냥 배추에 그냥 끌고 가시는 거예요.

구술자 : 꼭 함대가 군인들하고 그래 한데 뭐 이 무슨 힘이 있나 그래 우리가 끌려간 거지.

면담자 : 그러면 그냥 끌고 가서,

구술자 : 교육이지.

면담자 : 아 가셔서 교육을 받으셨어요. 게네들 나름대로 교육.

구술자 : 그 가들은 언제라도 이동할 적에는 밤에

면담자 : 밤에

구술자 : 버스도 카튼 탁 쳐버리고 바깥에 안 보이게 밤에 거리 이동을 한다고

면담자 : 배 내려서 이동할 때도 그때 마음이 어떠셨어요? 가실 때

구술자 : 그때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생각도 하고 싶지도 않아.

면담자 : 아 생각이. 그래도

구술자 : 없는 사람들한테는 이북 사람들이 잘해주는 거야. 와 그러면은 대한민국에는 빈부격차가 많아서 있는 사람은 잘 살고 잘 먹고 없는 사람은 노동자 먹는 사람은 못 먹는다는기야. 그래서 아 없는 사람들은 이북에서 잘 먹여 준다 이거야.

면담자 : 데리고 가서 보여주기 식으로?

구술자 : 처음에 가서 신원 조회에 쓸 적에 네 처음에 사돈에 팔촌까지 다 적어놨다가 나중에 처음에는 정신이 있을 때 기억나는 대로 친구고 뭐고 빠짐없이 적어라 이랬던 말이 두서없이 적어줬다가 나중에 예를 들어서 북쪽인 여기서 조사받은 거라고 중간에 원산 가다가 조사받은 거 하고 평양 가서 조사받은 거 하고 이게 대조로 해가지고 틀릴 때  동무 왜 거짓말을 하라는 이기야.

면담자 : 아 집요하네요.

구술자 : 동무는 부르주아 사상 그것부터 고쳐야 된다 이기야.
그러니 여기서 떼어놓고 붙들린 데서 떼어놓고 사돈에 팔촌 친구고 막 불려줬다가 이쪽 가서 또 불러줬다. 여기 가서 콱 막힌다. 뭐 처음에는 뭘 불러줬는지

면담자 : 그때 당황해서

구술자 : 응 그러면 나중에 동무 왜 거짓말하느냐 이기야. 그럼 그렇게 되지.

면담자 : 그러면 그게 그러면은 잡혀갔을 때 한 군데만 계신 게 아니고 이곳저곳을 그냥 끌려 다니셨겠네요?

구술자 : 그렇지. 처음에 붙들린 장소 그다음에 어디 또 공공질서가 모이는 장소 금강산에 또

면담자 : 금강산이요

구술자 : 젤 첨에 금강산에 들어가니까 금강산 호텔에 여직원들이 나와가지고 아주 진수성찬을 차려주는 거야. 저녁밥을 잘 먹었지.

면담자 : 그때는 처음

구술자 : 대한민국에도 못 먹을 때인데 금강산에 들어서 다 채워주는데 잘 차려놨대. 잘 먹었지.

면담자 : 뭐가 차려져 있던가요? 고기

구술자 : 육고기 뭐 돼지고기 뭐 없는 게 없이 싹 차려 놨어, 배고픈 시절은 잘 먹었지.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면담자 : 그렇게 차려서 먹이고 그럼 계속 그 세끼를 다 그렇게 진수성찬으로 드셨어요?

구술자 : 처음에 두서없이 적어놓은 그 주소대로 말이야. 이번에 그게 이제 가들 진심인 줄 알고 부모 지사 날짜 이 다 적어놓고 지사 날짜 그날 지사 오늘 동무네 부모 오늘 제우라고 말이야.  밤 중에 나오라 그래요. 나가 제사상 딱 채려 놨어.

면담자 : 아 그렇게까지 세심하게 챙겼다는 얘기네요.

구술자 : 어 그러고 만날 거짓말도 탄로 나고 말고.

면담자 : 그러면 만약에 처음에 얘기했다가 나중에 내용이 안 맞으면 그거에 대한 불이익이나 뭐 그런 게 있었어요.

구술자 : 안 맞으면 동무는 머리 이 골통 부르주아 사상이 부르주아라고 그래요.

면담자 : 부르 조아요

구술자 : 사상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안 된다 이기야. 훌훌 틀어버리고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라 이기야

면담자 : 그러면 그 거기 몇 개월 정도 계셨어요?

구술자 : 2개월 28일

면담자 : 2개월 28일이요. 어떤 계기로 풀려나신 건가요?

구술자 : 어

구술자 : 안 하겠다. 실례구나

면담자 : 그러세요, 그래도 보통 그때 당시에는 가면 못 온다고 저는 들었었거든요. 근데 쉽게 오셔서 다행이시네요. 그러면 그 계실 동안 집에 계신 사모님 하고 되게 걱정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

구술자 : 많았지

면담자 : 보시니까.

구술자 : 그때 이북가 있을 적에 우리 그 방에 한 방에 그때 선원들이 한 배 6명씩이야.

면담자 : 선원만 6명?

구술자 : 그런데 한 방에 자는 거야? 응 6명이

면담자 : 6명이?

구술자 : 침대 각자 안방에 침대가 몇 개가 있어요. 그 자는 거야? 그럼 매일 청소를 여자들이 거의 해줘.

면담자 : 아 본인이 하시는 게 아니고

구술자 :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여자들이 국가유공자 부인들이야.

면담자 : 그 북한의?

구술자 : 응 그리고 인자. 그래 이제 아무도 없을 때 그 여자 청소하면은 말을 붙여 본다고

면담자 : 그분들 말하시던가요?

구술자 : 흠흠 민폐라 하며 잘 안 하는 거라.

면담자 : 그렇죠, 그러면 북에서 넘어오시고 집에 오니까 그 사모님이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처음

구술자 : 고생했어. 그러지 뭐라고 그래.


 기록가_ 최은경

기록가, 최은경

동해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결혼하고도 꾸준히 건설업 사무 업무를 보며 때로는 엄마로, 때로는 아내로, 때로는 딸로 바쁜 삶을 살아왔다. 현재는 근무 중 사고로 인해 잠시 쉬면서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재활치료 하면서도 사회복지사 자격증, 서평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새로운 디딤돌이 되는 계기를 만들어 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글담 독서동아리장으로 활동하며, ESG 팝업북 만들기 과정을 수료하여 독서동아리 활동, 바닷가 작은 마을 ‘망상해뜰책뜰’ 서포터스, 동해문화원 생활사 기록가로 활동 중이다.


 기록가_ 활동후기  

내가 나고 자란 동해의 묵호동이란 지역은 극히 작은 일부분이었다. 그저 어릴 때는 오징어가 많이 나고 생선비린내가 진동하던 기억뿐이었는데, 이번에 2023 디지털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에 참여하면서 생활사 기록가란 무엇인지 새롭게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또한 이번 기회로 나는 정말 그동안 눈만 뜨고 있었지, 눈을 감고 살아온 것 같다. 생활사 기록가를 하며 묵호항의 시대적 변화의 흐름도 알 수 있었고, 수산업 황금기가 도래하여 동네 강아지도 만 원권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의 강원도 최고 지가를 형성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1990년부터 쇠락하며 생활권이 왜 바뀌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면담자로서 지역 공부나 자료 수집이 너무 부진했고, 묵호항을 터전으로 삶을 살아오신 구술자의 구술을 단 몇 시간에 담아낸다는 것은 정말 허황된 꿈이 아니었나 싶다. 좀 더 체계적으로 접근해서 자료를 정리하지 못했던 점이 지금 생각하니 너무 아쉬움이 남았고, 면담자로 촬영 전 구술자님과의 라포 형성의 시간이 많이 부족했던 점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나는 기억할 것이다. 이 두 구술자님의 구술을 정리하면서 그분들의 살아온 이야기들이 어느 누군가에겐 추억이 될 것이고, 어느 누군가에겐 응원의 글이 될 것이며, 많은 이들에게 묵호항의 옛 모습을 좀 더 발전된 묵호항을 도약하는 주춧돌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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