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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r 30. 2024

'대화퇴 사건'을 기억합니다!

16.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_ 정복식 구술 편

 구술자_ 정복식

정복식_ 구술자

1951년 경북 영일군 의창면 칠포동(현재_ 포항시 칠포리)에서 5남 1녀 막내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흥해 중학교 졸업 후, 집안 형편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의 방직공장에서 4년여간 일을 하다 작업환경이 좋지 않아(섬유 속 먼지로 인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일을 그만두고, 형님들이 계신 동해로 오게 됐다. 공장보다 수입이 훨씬 좋은 것을 보면서 형님들을 따라 어부의 길을 결심했다. 이미 자리 잡은 형님들 덕에 다른 사람보다 빨리 기술을 익혀 매우 이른 나이에 선장이 될 수 있었고, 현재는 취미생활로 재테크 개념으로 마련한 포항 땅에 농사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봉사하는 어부

중학교 졸업 후, 방직공장에서 일하다 동해에서 터를 잡고 어부 생활하는 형님들을 따라, 어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처음엔 형님들이 위험하다고 바다에 데리고 나가지 않았지만, 구술자의 어업에 대한 열정이 형님들에게 통하여 열심히 어업 기술을 익혀 25세의 젊은 나이에 선장이 되었고, 어부 생활 19년 만에 배를 살 수 있게 되면서 선주가 되었다. 구술자는 어업에 종사하며, 동네일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묵호동 주민자치위원장, 재향군인회, 천태종 삼락사 신도회장 역임을 하였다. 주민자치위원장을 하며, 어려운 이웃에게 김장 나눔 등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무릉제 및 등대축제에도 적극 참여하여 다른 신도들로부터 모범이시다. 수협의 대의원으로 풍어제를 지내고, 묵호항의 발전을 위해 활동을 하고 계신다.

이상기후, 어업은 휴업상태

현재, 구술자는 어업이 활항이던 시절, 고향에 조금씩 마련한 농지에 농사를 짓기 위해 한 달에 서너 번 포항을 오가며, 본업인 어업보다 취미로 시작한 농사일을 더 활발히 하고 계시다. 어업은 수온의 상승으로 고기가 잘 잡히지 않고,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로 인해 수산물 수요가 감소하여 10개월째 휴업 중이다. 어업의 쇠퇴에 대해 많은 고민과 걱정을 하지만,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지만, 한편으론 묵호동의 발전을 위해 예전처럼 어족자원들이 회복되는 생태환경을 바라고 있다. 비록 고향에 친가들과 아들이 있지만, 앞으로도 부인과 함께 동해에서 계속 살기를 원하고 계시다.     

영상기록 준비중인 기록가와 구술자

 구술사 맛보기

대화퇴 사건을 기억하세요?

면담자: 선생님 우리가 이제 이어서 이제 질문을 할 건데요. 1976년에 대화퇴사건 있었잖아요? 그 사건에 대해서 혹시 알고 계시나요?
구술자: 그때 대화퇴 지금 오징어잡이 배, 그 배도 한 이십(20) 톤 요정도 되나? 배는 작고  태풍이 와 파도에 거의 이백(200)한 오륙십(5~60) 명이 돌아가셨으니까. 그만큼 열악했지 배는 이십(20) 톤 같은 요즘 같은 이게 뭐, 요즘이야 오륙십(5~60) 톤이지 그전에는 그런 큰 배들이 없어서 또 목선이고 어려운 시기에 큰 파도를 만났으니까. 거기 속초, 주문진, 동해, 묵호항 세 군데서 인명피해가 제일 많이 났는데, 그때는 참 형편은 없었죠. 그래서 거의 다 뭐 부모 아버지 다 돌아가시고 생활하는 거 자식들이나  어머니들이 고생이 심했지요.
면담자: 그러면 남자분들이 많이 돌아가셨을 거 아니에요?

구술자: 그럼, 남자들이지. 다 어부들이
면담자: 그때 당시에는 여자가 어부로 나가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구술자: 요즘도 어부로 나가는 건 남자지…
면담자: 그때 당시는 여자가 어부로 나가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가정이 다 이 가장이 없어지는 가정이 많았을 것 같은데 그러면 가정들은 또 다 어떻게 해...
구술자: 그러니까 그거 지나고 난 뒤 지금 어머니들이 고생이 많아서 저는 그때 명태, 명태  밑에 노가리라고 그거 그때 많이 나왔으니까 그걸 할복하고, 널아(널어) 주고 이래서 생활해 나왔지.

면담자: 자녀분들이 학교를 다니다가 생업에 뛰어들 수도 있었겠네요?  아버님이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구술자: 살림도 학업도 중단하고 그런 경우가 많았죠.
면담자: 정부에서 이제 도움을 준 건 있었나요?
구술자: 정부에서 저기 묵호동 어달 쪽에 집을 그때는 제가 알기로 한 열몇 채 지어줘서…. 이제 돌아가신 가족들한테 무상대여 해 주고, 그리고, 향로동에도 몇 동
면담자: 그러면 몇 군데로 나누어서…?
구술자: 네. 나눠서, 몇 집이 같이 살도록….
면담자: 집을 지어주고 직장을 구해준다거나 그런 건 없었나요?
구술자: 그때 직장도 없죠. 그냥 집만 제공해 주고 이제 생활은 알아서 생활하는 거지.
면담자: 네 그러면 그때 당시에는 어업협동조합 이런 건 없었죠? 거기서, 거기서 보면
구술자: 그때만 해도 뭐 없죠. 연로 활성화가… 다 열악한 생활이니까. 우리는 위령제 정도로 지내는 걸 이제 수협에서 하는 걸로 알고 있고, 그다음부터 큰 도움은 없어요. 뭐

면담자 : 그럼 위령제는 수협에서 이렇게 주관을 해서 어떤 식으로 진행하나요? 위령제는.

구술자 : 그러니까는 위령, 저거 궂택이지. 거기서, 위령한다고 궂을 해가지고 합동 인제, 위령제 지내고

면담자 : 굿 같은 거를 하려면 무당이 있어야겠네요?

구술자 : 무당이 위령, 위령 돌아가신 분들 이제 위령… 좋은 데 가라고….

면담자 : 그러면 배에서 하나요? 위령제를.

구술자 : 아니요. 조합원서 어 판장에서 차려놓고 막사 차려놓고 거기서

면담자 : 그럼, 어 판장에서 궂 할 때 모이는 인원이 많았나요?

구술자 : 많았죠. 요즘이야 뭐, 궂 할 때 구경 안 오지.  바쁘니 그래도 그때는 궂을 한다면 주변사람들 뭐, 거의 다 몇 백 명씩 모여서….

면담자 : 동네 행사가 됐겠네요?

구술자 : 예, 그거 뭐, 행사지요. 뭐 어촌계는 전부 다 이거 풍어 궂을 한 육십(60)년대 칠십(70)년대까지는 거의 해마다 풍어 하고, 성황당 궂도 이제 풍어제를 많이 올리고 했죠. 이제 지금은 그게  없어졌지만.

면담자 : 이게 주관하는 데가 다 달랐겠네요? 위령제는 아니 뭐지 조합

구술자 : 협동조합에서

면담자 : 그러면은

구술자 : 풍어, 성황당은 이제 어촌계 수요가 어촌계에서 그걸 이제 주관해서 어촌계에서 하면 이제 굿이나 하면 우리 선주들이 찬조금을 보태고.

[대화퇴 사건_ 홍근 전, 동해지방해양수산청장] 20대 초반에 접한 대화퇴 사건은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입니다. 지난 1976년 10월 28일∼11월 4일 동해상 황금어장 ‘대화퇴’에서 발생한 해난사고는 지금도 사상 최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대화퇴 어장에는 초속 14∼17m의 강풍이 휘몰아치고, 높이 10m 이상의 거대한 삼각파도가 덮치면서 조업 중이었던 어선 448척 가운데 33척이 침몰 또는 전파되고 12척이 반파, 선원 317명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는 참극이 발생했죠. 오징어 채 낚기 낚시 어구를 기계 동력의 힘으로 끌어올리는 자동조상기가 없고, 선상 작업 대부분을 맨손에 의지하던 열악한 때여서 채 낚기 어선 1척이 평균 30명 이상의 선원을 태우고 조업했기 때문에 인명피해가 더욱 컸던 사고였죠. 너무 많은 선원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어 한동안 동해안에서는 심각한 선원 구인난이 빚어지기도 했다.

 기록가_ 이현주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에서 태어났다. 동해에서 직장 생활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동해에 살게 되었다. 유아교육을 전공하여 어린이집에서 줄곧 직장생활을 하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는 학원에서 시간강사를 하였다. 올해 자기 계발을 위해 평소 자신 없었던 글쓰기 수업을 수료하고, 우연히 동해시 가족센터 밴드를 통해 생활기록가 양성과정 모집을 참여하게 되었다.   

기록가, 이현주

 기록후기

교육을 통해 구술면담을 배우며 구술자님과 몇 번 만나지 못하고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바다서 생활하며 묵호를 사랑하는 마음과 지금까지 계속 일하며 노력하시는 모습들이 우리 후손들에게 귀감이 된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묵호가 현재의 우리를 있게 했고, 현재의 묵호를 우리가 어떻게 지키고, 발전시켜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수온의 변화만 온 게 아니라, 지구 전체가 병들어 감을 실감하며, 환경운동은 우리들의 필수과제가 되었다. 우주의 어느 별보다 아름다운 지구를 살리기 위해 현재 우리는 어떻게 생활해야 될지 숙제가 남았다. 묵호항의 활발한 경제활동을 위해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일회용품 줄이기를 시작으로 환경을 위해 노력해야겠다. 기록가로서 많이 부족하지만, 마무리까지 올 수 있게 도와주신 문화원과 함께해 온 동료분들, 일한다고 제대로 챙기지 못한 가족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일하면서는 어렵고, 힘들어 쫓기듯 달려왔는데, 막상 마치려니 더 잘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모든 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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