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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r 23. 2024

모태[母胎] 묵호!

17.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_ 박종흔 구술 편

 구술자_ 박종흔

묵호지역에 있는 동호초등학교, 묵호중학교, 묵호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 5급 을류(현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73년 묵호읍사무소에 첫 발령을 받고 2009년 퇴임까지 36년 3개월이란 기간 동안 모범적인 공직자상을 정립했다. 업무뿐만 아니라, 주경야독 만학으로 학업에도 열정을 쏟아 2004년 55세의 나이로 관동대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묵호는 나의 모태(母胎), 행정 전문가 이야기

박종흔 구술자는 1949년 서울 원효로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 어머님의 고향과 가까운 묵호 향로동에 이주하여 정착했다. 부모님은 숭조화목(崇祖和睦)이 먼저라는 가르침을 주셨고 한학을 공부하셨던 아버님으로부터 어릴 때 천자문을 익혔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부모님의 점포가 유실(流失)되면서 식구들의 생계가 막막해졌다. 법관의 꿈을 포기할 정도로 가난이 힘들었던 중학교 시절에는 친구 집에서 숙식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학원 강사와 영자 신문을 배달하여 학비를 조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곧바로 대학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 재수하던 중에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군 제대 후 첫 발령지는 묵호읍사무소였다. 이곳에 근무하면서 배우자(장미라 화백)와 결혼했다.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면서 틈틈이 공부하여 1977년 7급 공채에 합격했다. 명주군청에 발탁되어 새마을과에 근무하던 중 고향 명주군 묵호읍이 삼척군 북평읍과 합하여 동해시로 승격 개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동해시로 근무지를 옮겼다. 동해시청 기획계장, 세무과장, 제28회 강원도민체육대회 상황실장, 망상 세계자동차야영대회 추진단장 등등 여러 직위를 두루 거쳤다. 2002년 강원도로 전출되어 국무총리실 재난실장, 동계올림픽 유치홍보부장, 강원도립대 교수직 등을 역임하면서 공직을 마무리했다.

구술 인터뷰 중

구술자는 2001년『문학세계』로 등단한 시인이며, 색소폰 연주자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퇴임 시에 발간한『이제야 끄집어낸 그림자의 영혼』시집이 있고, 색소폰 연주로 묵호지역을 배경으로 노래한 이미자의「눈물의 묵호항구」를 동영상으로 남겼다. 존경받는 행정직 전문가, 학업성취의 완성, 행복한 가족 관계, 작가이며 연주가 등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공무원이라는 직업과 묵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구술을 마무리했다.   

 구술사 맛보기

• 노래 「눈물의 묵호항구」 내용과 창작배경 이야기      

면담자: 본 면담은〈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이란 주제로 진행하는 구술 면담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박종흔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의 생애와 묵호 이야기를 백(100)분 동안 진행하고자 합니다. 면담일시는 이공이삼(2023)년 시(10) 월 이십육(26) 일 오전 열(10) 시이며 장소는 동해문화원입니다. 면담자는 동해문화원 생활사 기록가 이재경입니다. 지금부터 구술 면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환절기 감기 걸리고, 그러시진 않으셨어요?

구술자: 예, 아직까지는 뭐 이렇게 감기 걸리는 체질은 아닌 것 같아요.

면담자: 궁금했던 게 선생님은 어떤 색을 좋아하세요.

구술자: 저는 초록색을 좋아합니다.

면담자: 초록색요?  

구술자: 살아있는 색 같아서요.

면담자: 네, 선생님을 만나 뵐 때마다 그게 좀 궁금했어요. 좀 쓸데없는 궁금증이죠. (웃음) 선생님 「눈물의 묵호항구」 오늘은 이 눈물의 묵호항구란 노래부터 한번 시작해 볼게요. 선생님 이 곡은 네 눈물의 묵호항구 항구란 이렇게 노래 제목이고 작곡은 고봉산 선생님, 작사는 반야월 선생님, 노래는 이미자 님이 부르셨어요. 선생님 이 노래를 알고 계셨나요?

구술자: 몰랐습니다. 묵호에 살면서 이런 묵호 항구를 주제로 한 대중가요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습니다.

면담자: 제가 악보 드렸는데 악보가 음이 너무 낮아서 다시 편곡하셨죠?

구술자: 그 악보를 색소폰으로 연주하기에는 너무 저음이어서 그걸 이제 저희를 지도해 주신 분한테 부탁을 해서 편곡을 해서 연주하기 편한 곡으로 만들어서 연주했습니다.

면담자: 네, 연주하시면서 어떤 감회가 새롭게 떠오르셨나요?

구술자: 예, 이제 뭐 묵호항에 있었던 많은 그런 해난 사고를 통한 어떤 가족들의 남은 가족들의 슬픔, 애환 이런 게 이제 잊고 살았었는데 새삼스럽게 생각이 떠올라서 당시에 좀 어려웠던 상황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게 됐습니다.

면담자: 이 곡은 육십(60)년대 육십오(65)년대 불렸던 것 같은데 그렇게 오랫동안 불린 것 같지는 않아요. 선생님.

구술자: 글쎄, 그게 오랫동안 불리고 많은 대중들에게 이렇게 어필이 됐더라면은 아마 좀 인기곡으로 우리도 알고 또 묵호 사람들이 많이 불렀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게 아마 히트를 치지 못해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면담자: 선생님이 색소폰으로 연주를 하셨으니까 이걸 계기로 또 많이 알려지지 않을까요?

구술자: 인제 이런 내용의 곡이 알려지기에는 어떤 시대적으로도 조금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이제 해난 사고가 과거 육십(60)년대만큼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고 또 이렇게 어업에 종사하는 분들도 워낙 인제 숫자가 줄어서 인제 이런 걸 직접 이렇게 체험하고 느끼는 분들이 많지 않을 거라서 다시 저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에는 좀 시기적으로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면담자: 네, 노래는 일(1) 절하고 (이) 2절 가사가 있어요. 선생님의 목소리로 한번 일(1) 절 가사는 어떻고 이(2) 절 가사는 어떤지 한번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구술자: 그 지금 새로 읽어야 됩니까?

면담자: 아, 네 선생님.

구술자: 이걸 뭐 감정을 잘 살려 읽어야 되는데 걱정스럽습니다만 ‘눈물의 묵호항구 떠나갑니다/ 정든 남편 무덤 앞에 마지막 통곡하고/ 옥수수 가루 죽에 고픈 배를 움켜잡는/ 어린 자식 앞세우고 고향 찾아 떠납니다/ 아∼떠나갑니다/ 아∼눈물의 묵호항구 야속합니다/ 고기잡이 떠난 남편 그 배는 소식 없고/ 망망한 동해바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한 많은 가슴 안고 살 곳 찾아 떠나갑니다/ 아∼떠나갑니다’

면담자: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묵호사람의 절반은 무덤이 없다
무덤에 묻히는 건 행복이다

구술자: 육십(60)년대 중반에 이제 노래를 부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때만 해도 많은 해난 사고가 있었습니다. 일(1)년에 몇 차례씩 그럴 때마다 많은 어부들이 목숨을 잃고 또 가족들이 이제 그로 인해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뭐 그리고 이제 그런 일들을 주변에서 저도 많이 이제 보고 살았기 때문에 이 당시만 해도 이제 묵호항 하면은 뭐 생선을 다룬 그런 어떤 분야의 직업을 갖고 뭐 생계를 꾸려가는 것도 뭐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배를 타고 풍랑으로 남편 아들 또 이런 그런 가족들의 경우는 그런 슬픔이나 애환이 이제 다들 이렇게 겉으로 말은 표현은 안 하지만 어느 한 집 건너  한 집씩 아마 그런 아픔을 겪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걸 배경으로 해서 이 노래가 작사되지 않았나 싶고 그 당시 오징어가 많이 잡힐 때는 전국 팔도에서 많은 분들이 이제 일자리를 찾아서 몰려왔었거든요. 그러다가 이제 제일 일자리 잡기 쉬운 것이 오징어잡이 배 타는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그건 뭐 특별한 경험이나 기술이 없어도 하루 저녁 같이 따라 나가면 배울 수 있고 하니까 물론 어획량은 뭐 기존에 숙달된 어부들보다는 뭐 적을지 몰라도 나름대로 이렇게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고기잡이를 하셨기 때문에 배를 제일 손쉽게 탔는데 그런 분들이 이제 풍랑에서 많이 이제 희생되는 그러다 보니까, 이제 남편 잃고 자식 잃고 하다 보니까, 이제 정이 이제 묵호에 들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여기 노래 가사처럼 굶주림에 어린 자식들 앞세우고 남편은 여기에 묻고, 묻는 것만 해도 복이 됐어요 그때는. 풍랑을 만나서 시체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뭐 십중팔구였기 때문에 다행히 시체라도 찾으면 그나마 이제 산소를 묘라도 만들고 했는데, 그렇지 못한 피해 희생자도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 정을 붙이지 못하고 울면서 자식을 안고 돌아가는 그런 어떤 시대상을 표현한 그런 노래라고 생각을 합니다.

면담자: 네, 선생님 말씀 중에 무덤이 있는 것만으로도 복이 있다는 말씀 굉장히 좀 슬프게 들려요. 선생님 그래서 이 노래는 시대적 배경과 생계로 인한 아픔과 슬픔이 드러나는 노래라고 보면 되죠. 선생님 당시 목호가 지금 유명한 부산이나 아니면 묵호 이렇게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이렇게 번화한 거리였을까요?  

구술자: 묵호가 다른 건 몰라도 오징어 하면은 뭐 전국에서 묵호항을 떠올릴 정도로 오징어에 그 주 어획의 기지였죠. 그래서 많이 알려졌고 그러다 보니까, 이제 전국의 많은 배들이 오징어 성어기에 몰려와서 오징어잡이를 하고 이제 오징어잡이가 끝나면은 자기 이제 항구로 돌아가고 해서 여기에 오징어가 많이 잡힐 때는 묵호항에 배를 정박시키지 못할 정도로 많은 배들이 몰려오고 했었죠. 그래서 더구나도 이제 뭐 묵호항이 어항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국제항으로서의 개항장이기 때문에 석탄 싣고 가는 배, 기타 화물 싣고 가는 배도 많이 있었고, 그 당시에 목호의 주 산업이 목포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그래서 물론 뭐 부산이라도 큰 항구보다 못하지만 지방에 이제 그 국제항으로서는 상당히 역사가 있고 규모가 있는 항구였죠.     


 기록가_ 이재경

기록가_ 이재경

충남 서천 출생이다. 강원도 동해는 배우자 고향이며 직장이 있던 곳으로 결혼한 이후 정착민이 되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학생들의 국어수업과 독서지도를 했다. 2022년 동해문화원‘동해학아카데미 기록연구원 과정’을 수료했다. 이 일을 병행하면서, 현재 사람과 장소가 품은 이야기에 매료되어 기록가의 길을 걷고 있다.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산업유산 묵호항을 배경으로 구술자 20명과 시민기록가 10명이 참여해 일궈낸 성과다. 국내 정상급 구술사,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 실장) 컨설턴트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마치고 기록한 구술사 대장정이다. 구술에 참여한 기록가가 작성한 소감을 각색하고 요약 기록해 둔다. 열네 번째 구술자는 박종흔 씨로 기록은 이재경 생활사 기록가가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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