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기록일지_눈물의 묵호항, 최석길 구술자 편
구술자_ 최석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는 유명한 미국 영화가 이 세상에 소개되고 일제강점기로 암울했던 1943년 동해 묵호 괴란동 양지바른 마을에서 9남매 막내로 야명주 같은 종을 울리며 구술자는 태어났다. 첫돌 후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북평중학교 졸업 후 집안형편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띠 동갑인 누님 권유로 강릉 대동라사에서 양복재단 일을 배워 묵호에서 평생 맞춤 양복 일을 했다. 현재 발한동 소재 상가아파트 내에서 ‘최석길 라사’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다.
‘재단 명인’으로 소문난 양복장인 이야기!
최석길 구술자는 첫돌 지나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사범학교를 진학하여 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학업 대신 기술을 선택했다. 구술자는 지방에서 주인의 어깨너머로 배우는 주먹구구식 기술이 아니라, 도시의 고급 양복 기술을 익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서울 피카디리 양복점에서 재단 기술을 배웠고 대한복장학원 단기대학 소정 과정 수료, 국제신사복교류 강습회 다수 참여 등으로 전문 기술을 익혔다.
1960년대 후반 고향인 묵호로 내려와 ‘칠구칠 라사’와 ‘천일 양복점’에 다니셨고, 춘일 양복점에 근무하면서 신사복, 작업복, 학생복 등 옷이란 옷은 다 만들었다. 기초부터 탄탄히 익혔던 양복 기술이라 묵호는 물론 삼척 강릉까지 재단 솜씨 좋기로 소문난 양복점이었으나 베트남 참전으로 인한 고엽제 피해로 한쪽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았다. 생업이던 양복 일을 그만둘 수가 없어 한쪽 손으로 눈꺼풀을 들고 일하다 보니 눈썹까지 다 짓물러버렸다.
구술자가 한창 일하던 1960∼70년대의 묵호는 항구를 통한 무연탄의 반출입(搬出入)과 바다 어획량의 풍성함으로 경기가 호경기였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하여 묵호 읍내는 늘 북적거렸으며 상권 활황으로 돈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당시는 기성복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라 맞춤 양복점 또한 마흔다섯(45) 곳이나 있었다. 양복점마다 장사가 잘됐고 구술자 또한 직공 다섯 명을 두고 일을 했는데 그때의 성업으로 4남매 전부 대학 공부를 시켰다.
최석길 구술자는 일제강점기 말에 태어나 한국사의 험난한 질곡을 몸으로 겪으며 노년의 삶에 이르렀다. 이후의 생을 말하면서 기성복으로 인하여 맞춤 양복의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옷을 맞추어 입을 수밖에 없는 몸을 가진 사람을 위해서라면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까지 양복점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구술자는 ‘최석길라사’ 양복점은 ‘내 삶의 터전이고 봉사와 나눔을 베풀 수 있는 즐거운 장소다’라며 구술의 끝을 맺었다.
구술사_ 맛보기
• 기록가_ 이재경
• 구술자_ 최석길(묵호 최석길라사 대표)
• 배 경_ 양복전문 용어와 양복 재단사 양성 과정, 묵호 양복점들
면담자: 양복을 배울 때‘객공’이란 말과 ‘도급제’라는 말이 무슨 말을 의미하죠?
구술자: 예 객공 도급제 똑같은 얘기입니다. 네 똑같은 건데 하나 하는데 얼마?
면담자: 한(1) 장하는 데 얼마 할 때죠?
구술자: 한 장하는데 얼마냐 이게 객공이고, 월급은 이제 뭐 월급으로 해 가지고 얼마를 하던지 그냥 월급을 주면 받고.
면담자: 월급으로도 받고 아니면 옷 한(1) 장, 한(1) 장 만드는 데도 있었나요?
구술자: 올바른 기술자, 완전한 기술자가 되기 전에는 월급이에요. 제대로 기술자가 된 다음에는 하나 하는데 얼마씩 알마씩 받았죠
완전 기술자-객공
면담자: 일을 배울 때는 월급으로 하고 네, 그러면 완전한 기술자로 된 객공이라는 말은 (구술자: 그건 기술자가 된 거예요. 완전한 기술자가 된 거예요.) 그러면 기술자로 완전 기술자가 됐을 때는 객공이란 말하고. 그다음에 선생님 우라깡과 우라까이 그 설명을 좀 더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구술자: ‘우라깡’이라는 말은 지금은 없습니다. 지금은 없는데 옛날에 저가 배울 때는 저고리에 있는 거 홀랑 다 뜯어요. 다 뜯어가지고 뒤집어서 합니다. 옛날에는 천의 기술도 지금만큼 못했고 그래가지고 천이 좀 입으면 물이 날려요.
면담자: 네, 색이 바랜다는 뜻인가요?
구술자: 그러고 나면 이제 이런 밑에 하고 이런 데하고 색깔이 달라지고 그래지잖아요. 그러면 뒤집어합니다. 뒤집어서 그때는 해도 천이 귀하고 그랬으니까 이제 뒤집어서 하는 건 우라까이라고 하는데 뒤집 하면 이 주머니들이 뒤집었으니까 이쪽으로 달리죠. 뒤집어하다 보면 이제 주머니가 이쪽으로. 옛날엔 뒤집어서 많이 했습니다. 많이 했는데 요새는 뒤집어하는 것 없고 떨어지는 것도 없고요. 사실 떨어질 때 이렇게 옷 떨어지면 옷 입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면담자: 근데 작업을 굉장히 손이 많이 가질 것 같은데.
구술자: 어렵죠 어렵고 그게 가장 어려운 게 우라깡입니다. 그런데 그걸 저고리 배우는 사람이 그걸 시켜요 시키면 아주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그게 무척 어려운…
면담자: 그러면 기술 이렇게 배우는 과정에도.
구술자: 그게 헌 옷이니까 시키는 거예요.
면담자: 그때 바지도 그랬나요?
구술자: 바지는 우라깡이 없습니다. 바지는 우라깡 할 사이도 없이 떨어집니다.(웃음) 저고리만?
면담자: 아, 네.
구술자: 저 우리가 이거는 양복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 거의 모를 겁니다. 거의 다 몰라요. 양복 한 사람들도 이거 저고리 한 개 뜯어가지고 쪼가리 펼치면은 삼백팔십(380) 쪼가리입니다.
면담자: 이 양복저고리가?
구술자: 저고리 한 개 뜯으면 쪼각이 삼백팔십(380) 쪼가리.
면담자: 삼백팔십(380) 조각이나 나와요. 선생님
구술자: 안 믿어지죠? 삼백 팔십(380) 쪼가리 요 주머니 한 개 뜯으면 저거 주머니 하고 설명을 좀 해드릴게요. 이런 주머니 바깥에 달린 건 아니고, 안에 주머니 속 두(2) 장 들어 있잖아요. 고 안에 또 작은 주머니 한(1) 개 만든다고요. 석(3) 장 들어가죠 밑에 또 보이지 말라고 다른 천대요 넉(4) 장 들어가지요 그다음에 이 위에 주머니 속에 보면, 또 우라(안감) 또 들어갔어요. 다섯(5) 장 되죠. 고담에 요. 위에 이제 양쪽이 입술감이라고 있어요. 입술감 속에서 돋울 때 그게 어떻게 보면 넉(4) 장이에요. 그다음에요. 주머니를 달기 위해서 원단에다가 또 하나 붙여요. 주머니 한 개 열(10) 장이에요.
면담자: 주머니만 열(10) 장이어서.
옷 한 벌, 380개 조각!
구술자: 예, 주머니 한(1) 개가 열(10) 장이래요 심지 같은 거는 심지가 두(2) 장 넉(4) 장 여섯(6) 장 여덟(8) 열(10) 장 열두(12) 장 그래서 하여튼 이 한 벌 뜯으면 조각이 삼백 팔십(380) (면담자: 그건 기억하기도 힘드실 것 같아요) 그건 어려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안 잊어버려요.
면담자: 이걸 선생님은 요거(우라까이)를 몇 벌이나 우라깡 해보셨어요?
구술자: 우라까이. 난 많이는 안 했어요. 많이는 안 했는데 네 뜯기를 많이 뜯어봤어요. 처음 양복 배우러 들어가 가지고 그 매형이 밑에서 배웠다고 했죠? 뜯는 일을 시키잖아요. 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뜯는 일 시킨다고요 그걸 뜯어봤기 때문에 조각을 아는 거예요.
면담자: 먼지 하고? 네, 선생님 그 얘기도 좀 해주세요. 재단 연구실에서 제자 양성을 하셨다고 그랬잖아요.
구술자: 재단 연구실을 제가 눈이 아파서 눈 때문에 제가 한 굉장히 오랫동안 양복점을 안 하고 또 그래 쉬고 있었을 때였어요. 재단 연구실을 만들어 놓고 이제 재단을 가르쳤는데 보수가 거의 없었어요. 보수를 안 받았어요. 안 받고 후배들한테 가르쳐 준다고 배우고 나서 좀 생각해 주는 사람이 되는 뭐 생각해 주는 대로 받았고 안 주면 안 받았고 얼마 정해진 건 없고 이렇게 많이 안 가르쳤습니다. 많이 안 가르쳤어요. 많이 안 가르치고 나한테 배워가지고 한 사람이 한 열(10) 사람 정도 된 것 같은데, 열(10) 사람 중에서 젊은 사람들이 죽어요. 한 세(3) 사람은 지금 살아있는 것 같은데, 나머지 사람은 죽었어 내 제자도 죽었고…
면담자: 일곱(7)분은 그럼 세상을 뜨셨다는 얘기예요 그래요. 선생님한테 배우신 분들은 그러면 교육을 마치고 묵호에서…
구술자: 양복점 거기서 양복점을 한 사람이 세(3) 사람 있어요. 네세(3) 사람. 발한 파출소 그다음에 지구대 앞에 한(1) 사람으로 개업을 했댔고 한(1) 사람은 안묵호 내려가는 쪽에 지금 옛날에‘화진산업’이라고 있었는데, 화진산업 건너편 쪽에 거기 개업을 한(1) 사람이, 한(1) 사람 저쪽 천주교 쪽에 올라갔다가 개업한 사람이 한(1) 사람이 있었고, 네(4) 사람은 거기서 개업을 했고 개업을 안 한 사람도 있었고, 개업들은 북평에서 개업한 사람 송정에서 개업한 사람이 두(2) 사람이 있고 근데 양복이 어떻게 돼 가지고 끝장을 못 보더라고요.
기록가_ 이재경
충남 서천 출생이다. 강원도 동해는 배우자의 고향이며 직장이 있던 곳으로 결혼한 이후 정착민이 되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학생들의 국어수업과 독서지도를 했다. 2022년 동해문화원‘동해학아카데미 기록연구원 과정’을 수료했다. 이 일을 병행하면서, 현재 사람과 장소가 품은 이야기에 매료되어 기록가의 길을 걷고 있다.
기록가_ 소감
최석길 구술자는 1943년생으로 일제강점기 말에 태어나셔 한국사의 험난한 질곡을 몸으로 겪으며 살아오신 분이다. 몇 차례 만남과 1∼2차 구술 면담을 통해 본 구술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양복점에서 평생 동안 일을 하셨지만 생업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분에게는 삶의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과 바른 도덕심 그리고 선한 양심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늘 한결같이 겸손했으며 남을 위한 배려와 사랑 또한 넘치는 분이셨다. 문화원에서 부여한 ‘눈물의 묵호항’이란 주제에 따라 구술자의 직업과 생계, 묵호의 변천사를 기술하고자 했지만 허술한 지식과 경험으로는 무리한 시도였음을 인정한다.(너무 겸손하세요, 참 잘하셨어요) 나는 서툰 면담자였고 그분은 완숙의 경지에 들어선 노익장이셨다. 구술면담을 의미 있게 진행하고자 한다면 면담자의 노하우와 경험이 다양하며,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 지식 또한 필히 축적되어 있어야 함을 새삼 깨닫는다. 지난한 세월을 온몸으로 살아오신 구술자님의 팔십 인생에서 나는 무엇을 묻고자 했으며,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기록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선행되었어야 함을 자각한다.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산업유산 묵호항을 배경으로 구술자 20명과 시민기록가 10명이 참여해 일궈낸 성과다. 국내 정상급 구술사,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 실장) 컨설턴트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마치고 기록한 구술사 대장정이다. 구술에 참여한 기록가가 작성한 소감을 각색하고 요약 기록해 둔다. 열세 번째 구술자는 최석길 씨로 기록은 이재경 생활사 기록가가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