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눈물의 묵호항, 장두중 구술 편
구술자_ 장두중
구술자 장두중씨는 경상북도 영천에서 1940년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술자 아버지의 직업은 수의사로 짐작된다. 가축 질병을 치료하고 대가를 곡식으로 받는 쉽지 않은 당시 직업으로 집에는 늘 곡식이 넘쳤다고 했다. 6.25 사변 때, 어머니는 구술자가 20살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시 구술자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열차를 자주 타게 됐다. 묵호에 정착하게 된 일화는 참 재미있다. 묵호라는 도시를 전혀 몰랐고 묵호가 목적지도 아니었다. 묵호에 정착한 이유는 '기차를 잘못타는 바람에 지금의 묵호에 정착'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전혀 모르는 묵호에 자리 잡은 구술자 장 씨는 지게꾼, 건조업, 프러포즈 노래방, 식당, 등 다양한 업을 생업으로 살아오셨다. 이후 ‘등대 경로당’ 설립을 주도했고, 2010년부터 동해문화원이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논골담길 어르신 해설사 활동을 시작해 해설사 1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지금도 '논골담길 해설사'로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제2 인생의 시작, 묵호
구술자 장 씨는 경북 포항에서 옷 장사로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확장을 준비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자 서울에 있는 친구로 가던 중 영주행 기차를 잘못 타서 묵호해 도착했다. 잘못 온 묵호를 돌아갈 수도 있을 있었겠지만 구술자는 묵호항과 묵호등대마을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반했으며, 묵호에서 바지게(덕장에 명태 오징어를 지고 나르던 기구)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번다는 소식에 지게 일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바지게 일이 쉽지 않고 고기 건조업이 돈 된다 하여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다시 고기 건조업을 시작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고 배우자까지 사업에 뛰어들어 고된 날들을 보냈다. 부인은 힘든 건조업을 돕느라 몸은 축나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다가 1980년, 노래방 사업을 시작해 대박을 터트렸다.
지난 84년 세월 속에서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묵호에 정착, 변화되는 동해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웃 간의 정을 쌓고 지내온 묵호는 이제 정 씨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지역사회 발전과 성장을 위해 각종 봉사는 물론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묵호등대마을 지키는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어르신이다.
슬하에 자녀는 4명이지만 현재 묵호에 살고 있는 자녀는 없다고 한다. 그만큼 묵호는 젊은 사람들이 묵호에 머물고 싶어도 도시 공동화, 인구 공동화에 따라 일자리가 있는 기업이 없고 할 일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 씨는 묵호 발전을 위해서는 일자리를 만들고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공간 등이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묵호항 밑 쪽 땅값이 엄청나게 비싸서 집을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등대 위쪽 사는 집 땅값이 더 비싸다. 이는 묵호등대마을에 논골담길이 감성관광지로 자리 잡으면서 발생하는 일시적인 땅값 상승요인으로 보인다고 했다. 지역에 터 잡고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묵호를 떠나지 않도록 행정에서는 정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바람이라면 "지금처럼 이웃들이 모두 건강하고 재미나게 여생을 보냈으면 한다고 가벼운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묵호를 오고 싶어 온 곳은 아니지만 소설 같은 묘한 인연으로 여생의 반년을 보내고 있다."라고 했다.
구술사_ 맛보기
Q_ 경북 포항서 옷장사 후 묵호로 오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면담자 : 처음에 원래 친구분 때문에 종근당 서울을 가시려고 했었잖아요. 그러면 혼자 오신 게 아니라, 어머니랑 같이 오신 거예요?
•구술자 : 그 당시에는 내 혼자 갔어요. 내 혼자 아직까지 뭐 확인한자면 확실한 걸 모르니까 간다고 하는 게 그때 내정신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 정신이 아니라 뭐 영주역에서는 사람도 내리니까. 따라 내려 버렸어요. 그 서울 가는 거 생각도 안 하고 나는 내려가지고 그런 거서 하숙집 잤고 그래 영주라 해가지고 자고 그 이튿날 또 열차가 오는 거 타는데 그게 서울만의 열차가 아니고 강릉만 그렇게 요 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면담자 : 그러면 그때라도 다시 서울을 가실 수도 있으셨잖아요.
•구술자 : 있었지요 있지만은 그때 내가 열차 타고 오니까 한번 열차는 떠나버려 가지고 버스 같으면 세우지만은 세우지도 몬하게 그리고 이제 묵호역까지 왔는데 목호역 와 보니까, 또 하숙집 자고 그 이튿날이 주인이 깨우는데 여 묵호판장 항구이라고 모르고 판장도 모르고 내 혼자 왔는데 고기가 얼마나 많이 나는지 당시에는 명태 오징어가 많이 났어요. 그 당시에는 내가 여 칠십삼(73)년도 왔어요.
•면담자 : 칠십삼(73)년
•구술자 : 내온 게 정확한 칠십삼(73)년도를 칠십삼(73)년도에 올 때는 고기가 얼마나 많이 나는지 그 저 당시 고기도 그거를 갖다가 명태하고 오징어 이런 거하고 이런 게 많이 나가지고 뭐 모두 차가 없어지게 젖어 다니니까 그러나 이 차가 없어 길도 요새는 산지골 논골이고 찻길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찻길이 없었어요. 저 위로 절대 없었고 걸어 다니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도 역시 집을 살라하니까 이 밑에는 뭐 집이 없고 산만 둥이 집이 헗어서 그래 거기서 사가지고 그 고기 말리고 건조하면 돈 번다카가 그래 손질했는데 지금은 반대로 되어 가지고 누구 판정인 데서 살라면은 거는 완전히 집 판 돈 내놔도 안 사위라고 면 길도 오고 요새 우리 집인데 거기는 차길이 좋고 이래 가지고 그건 비쌉니다. 요새는 거기는 또 등대 관광지가 돼 가지고 평당 이백(2,000,000) 평해도 안 팔아요. 거 비쌉니다. 내가 그것으로 인자 일단은 또 사실 여기 노래방 할 때 집 팔고 내려 올라 해도 거기서 뭐 정리도 생기고 가격이 금값이라 가지고 앞으로 자꾸 올라가지 싶어 가지고 못 안 팔고 그대로 있었어요
•면담자 : 그럼 칠십삼(73)년도 당시에 옷 장사에서 네 망하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돈이 별로 없으셨을 텐데 어떻게 여기 금액이 당시에 위에 지금 살고 계신 집이 금액이 어느 정도였을까요?
•구술자 : 그때는 포항이 아니고 포항 옆 동네 기계라 하는데 요새 말하는 포항시 기계면입니다. 거기에 살았는데 그때는 시에 캐도 지가 크 뭐 그래 겨 그때는 포항도 당시도 시디 대회는 시위 됐지만은 그게 별로였어요. 별로고 나는 거 서로 옷 장사를 할 때는 그래도 참 옷장사를 해 가지고 그 돈을 좀 벌었어요. 벌었는데 내가 나는 옷 장사하고 우리 내 위에 형님은 잡화 장사를 했어요. 잡화 장사를 했는데 형님은 돈 벌으면 돈 버는 돈 가지고 거서 밭 사고 논사고 그런 거 자꾸 사고 뭐 과일 밭도 사고 이랬다.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산업유산 묵호항을 배경으로 구술자 20명과 시민기록가 10명이 참여해 일궈낸 성과다. 국내 정상급 구술사,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 실장) 컨설턴트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마치고 기록한 구술사 대장정이다. 구술에 참여한 기록가가 작성한 소감을 각색하고 요약 기록해 둔다. 열두 번째 구술자는 장두중씨로 기록은 박은미 생활사 기록가가 담당했다.
기록가_ 박은미
동해에서 태어나 묵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묵호의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지금은 삶의 터전에서 살아온 분들을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동해 지식 서평단 1기 회장으로 ‘바라던 바다 발한’ 출간과 동해시를 알리기 위해 여행 블로그를 하면서 지역 숨은 맛집과 여행하는 공간을 소개하는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고 도서관 활동으로 지역발전에 도움을 주려고 ‘망상해뜰책뜰’ 서포터스로 팝업북 만들기 재능 기부활동을 하고 있다.
나가는 말
묵호등대마을 논골담길과 도째비골 스카이밸리, 해랑전망대와 함께 잔잔하게 변해가는 ‘묵호’는 동해 대표 관광지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순례자처럼 묵호를 찾는 여행자 발걸음은 마을을 지키는 원주민에게 과거 묵호의 명성을 다시 안겨주는 내일의 희망이며 묵호의 미래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