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눈물의 묵호항, 김명수 구술 편
눈물의 묵호항, 김명수 구술 편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산업유산 묵호항을 배경으로 구술자 20명과 시민기록가 10명이 참여해 일궈낸 성과다. 국내 정상급 구술사,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 실장) 컨설턴트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마치고 기록한 구술사 대장정이다. 구술에 참여한 기록가가 작성한 소감을 각색하고 요약 기록해 둔다. 열한 번째 구술자는 1952년 묵호에서 출생한 김명수 씨로 '아버지 대를 이어 꿈을 이룬 행복한 해복호 선주‘ 를 주제로 구술에 참여했다. 기록은 박은미 생활사 기록가가 담당했다.
1952년 동해시 묵호 출생으로 새벽부터 오전에는 연승어업 문어잡이, 오징어잡이, 대게잡이로 바다에서 보내고, 오후에는 육지로 나와 문화 활동을 하면서 축제 및 행사에 참여하며 재능 기부활동으로 하루를 보낸다. ‘털보의 아내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도 출연했다. 현재 72년간의 묵호의 변천사를 눈으로 보며 어린 시절 아버지 모습을 보고 선주가 되고 싶은 꿈을 이루게 된 ‘해복호’ 선주다.
대를 이어 꿈을 이룬 행복한 해복호 선주
구술자는 할아버지 때부터 묵호에 터 잡고 사셨으며, 선주인 아버지의 모습이 좋아 대를 이어 바다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셨다. 묵호항의 변화한 모습과 함께 어린 시절 즐거운 놀이터가 이제는 가족들의 생계와 함께 제2의 인생의 되고 있는 공간이 되었다. 오징어잡이와 대게잡이를 하면서 건강악화로 수술까지 하면서도 바다의 일은 놓지 않은 강한 선주였다. 평소 어업뿐 아니라 하모니카 동호회 활동 등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본인 여가를 즐기고 있는 멋진 어부다. 꿈이 있다면 현재 묵호항에는 최고령 82세 선주가 있다고 한다. 그 선주처럼 10년 뒤 80대까지 건강하게 배를 타는 것이 소박한 꿈이라고 한다. 이제 묵호는 선주 하려는 젊은 사람들이 없다. 어부의 일이 힘들고 인건비 상승으로 타산이 맞지 않아서다. 어부들이 점점 더 줄어드는 추세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한다. 묵호항의 70년대 활황기 모습을 소환한다면 당시 묵호항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기항지'로 불릴 만큼 어업, 상업, 생활경제 모두가 풍성했던 곳이다. 구술자는 청춘을 바쳤던 과거 묵호 모습과 공간이 다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모습으로 구술을 마감했다.
구술사 하이라이트
1. 딸 이야기
면담자 : 서울에 계시고 음 그러면 우리 따님을 처음 결혼시켰을 때 왜냐하면 첫아기를 안았던 그 느낌도 있으시겠지만, 출가를 딱 할 때요. 그때 아빠의 느낌은 어떠셨는지 아빠들이 다 감정이 다르실 텐데
(상황: 따님 이야기를 할 때 갑자기 눈물을 보이심)
면담자 : 힘드시면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구술자 : 우리 딸내미 얘기하면은 좀 마음이 좀 많이 좀 아파요.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 딸내미가 대학 시절에 허리를 다쳐서 수술했어요. 수술을 그 수술을 그때 내가 바다서 배를 탈 땐데 아빠 허리 아프다고 이러면서 이렇게 좀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 마누라 보고 “그럼 병원에 한번 가봐라” 했더니 지금 OOO 병원입니다. OOO 병원. 그 선생님 뭐 디스크 조금 그래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디스크라는 그 병명을 그때 당시에는 잘 몰랐어요. 지금은 뭐 의학이 하도 발달하니까 디스크를 하면은 맘대로 수술을 안 하지만 그때는 잘 몰라서 가자고 의사 선생님이 뭐 한두 시간이면 금방 끝나는 조금만 한다고 그래서 수술을 그래서 하라 했어요. 하라 그래서 나는 바다를 나갔는데 바다 나가서 한두 시간 있다가 “왔나 하니까 안 나왔다 하더라고요.” 또 세 시간 또 네 시간 선생님이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는데 한번 시간이 지났는데 또 안 나왔다 하니까 걱정이 되잖아요. 그때 그런데 바다서가 작업을 하면서 그 작업이 되나요? 그래서
면담자 : 안 되죠?
구술자 : 6시간 정도 돼서 전화하니까 “이제 나왔다는 거”그래서 선생님이 두 시간이면 된다는데 여섯 시간 돼서 뭐 어떻게 됐나 이가 아니 어떻게 됐든 간에 수술했잖아. 그래 가지고 어떻게 됐든 수술을 했으니까 이제 됐다 하고 있었는데 1년 후에 아가 주저앉아버렸어요. 완전히 아가 딱 주저앉더라고요. 그냥 걷지를 못하고 그래서 데리고 들어갔다니까 그 의사 선생님이 하는 얘기가 의사의 명예를 걸고 한 번 더 수술해 달라는 식으로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 그때 나이가 이제 스물세(23) 살이었어요.
2. 묵호로 돌아와 선주가 된 이야기
면담자 : 그럼 돌아오셔서 처음 하시게 된 일은 무엇일까요?
구술자 : 돌아서 이제 내가 이제 해야 할 일을 해야겠구나 하고 시작을 한 게 배를 타게 됐어요. 그때는 딴 사람 배 선원
면담자 : 선원으로 들어가셨어요? 아~
구술자 : 바다를 좀 배워야겠구나 하고 그때부터 바다 생활이 시작되는
면담자 : 그러면 그때가 대략
구술자 : 서른일곱(37) 여덟(38) 정도 됐을 거예요.
면담자 : 그럼 해외 나갔을 때 그 기간 동안에 또 자녀도 무럭무럭 자랐을 거 아니에요
구술자 : 자랐죠.
면담자 : 선원으로 근무하셨을 때 근무 시간이나 어 일당 정도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구술자 : 선원으로 와 보니까 아침 그때도 아침 4시에 나가고 해가 져서 들어오고 막 이러더라고요. 좀 힘들더라고. 그래서 내 머리 내 친구들 탔는데 내가 바다는 뭐 한도 살 차이가 전부 친구가 되니까 그 우리 후배 배인데 그게 이제 그 이숙성이라는 이제 그 사람인데 배를 배우게 됐어요. 이제 전문적으로는 이제 그 사람 밑에 가 이제 배는 꽤 오래 탔지만, 그냥 따라 따라내기만 했지. 내가 이 배를 이제 시작해서 끝까지 이제 내가 내 속에 있던 걸 한번 이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이제 배우기 시작한 거죠. 이 사람 밑에서 선장을 배웠어요. 내가.
면담자 : 배우는 걸 하셨군요.
구술자 : 배우면서 그 배를 4년 정도 타 가지고 그 배를 인수했어요. 내가
면담자 : 아 그 배를 4년 정도 타셨다고요.
구술자 : 4년 정도를 타고 그 배를 내가 인수를 했어요.
면담자 : 아 그러면 일당은 따로 없고 그냥 배우는 그 과정으로
구술자 : 아니요. 내가 이거 버는 건 내가 이거 봉급이 있는 게 아니고 한 달에 생산량이 얼마면 있는 그거 선주가 가지고 가고 경비 제하고 나머지 이제 노는 게 있어요. 선원들하고 그러면은 백만(1,000,000) 원 벌 때도 있고 이백만(2,000,000) 원 벌 때도 있고 이거는 뭐 정해진 게 없었어요.
면담자 : 그러면 당시에 어쨌든 자녀도 있고 하셨을 텐데 가족도 있으셔서 생계유지는 어떻게 하셨나요?
구술자 : 생계유지가 힘들었어요. 근데 그때는 크게 작업이 잘 고기도 많이 안 나고 이러더라고요. 그래도 어떻게 됐든 간에 그 돈을 좀 모아놓은 게 있어서 이제 배를 처음에 시작할 때도 엄마도 반대했고 우리 마누라도 반대했어요. 그래서 내가 안 된다 했어. 내가 “이 기회가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막 세워서 배를 인수하게 됐죠.
면담자 : 그때 배를 인수했다. 그러면 그 배의 가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구술자 : 그때 당시 보자 지금지금은 뱃값이 많이 뛰었지만, 그때도 그 배를 육천만(60,000,000) 원에 현찰로 샀어요.
면담자 : 그러면 그때 선원도 같이 있었나요?
구술자 : 선원은 나하고 같이 타던 선원을 내가 인계를 했어요. 세 사람이 탔거든요.
동해에서 태어나 묵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묵호의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지금은 삶의 터전에서 살아온 분들을 기록하는 일을 하고있으며 동해 지식 서평단 1기 회장으로 ‘바라던 바다 발한’ 출간과 동해시를 알리기 위해 여행 블로그를 하면서 지역 숨은 맛집과 여행하는 공간을 소개하는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고 도서관 활동으로 지역발전에 도움을 주려고 ‘망상해뜰책뜰’ 서포터스로 팝업북 만들기 재능 기부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