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눈물의 묵호항, 최효열 구술 요약 편
눈물의 묵호항, 최호열 구술 요약 편
구술자 최효열 씨는 1953년 묵호 태생으로 1남 4녀를 둔 문학 소년이었다. 지독한 가난을 물려받은 4대 독자로 일찍이 대학진학에 대한 열망은 접고 대가족 부양을 위해 돈 되는 일에 뛰어들었다. 잠수배 승선, 삼부토건 묵호항 북방파제 현장근무, 액세서리 수공업, 노점상 등 가리지 않고 쫓았고, 현재까지 건축 일 특히 현장소장 일은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문학 21의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4집째 시집 발간을 앞둘 정도로 시인으로서 왕성한 시 창작 의욕을 보이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신춘문예 소설분야에 투고하기 위한 소설 ‘왕눈이’는 마지막 퇴고를 앞두고 부기 선생에게 적발되어 원고지 80매가 찢기는 충격으로 잠시 절필하였으나 해외에 산업인력으로 나갔다가 해외 근로자들의 수기를 모집하는 공모전에 응모하여 장려상과 거액의 상금을 받게 된 일을 계기로 다시 펜을 들게 되었고 지금까지 묵호항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서정 시집 3집을 발간했으며 4집도 퇴고를 막 끝내고 발간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4집은 구술자의 고단했던 묵호의 삶은, 시 언어를 만나 꽃보다 아름다운 글로 반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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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산업화 물결이 한창이던 60~70년 대의 당시의 묵호항 일대는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삶의 애환도 넘쳐나서 그러한 맥락을 아름다운 서정시로 승화시킨 현지인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묵호의 어제와 오늘을 가늠해 보게 된다.
참고_ 구술사는 해당 구술자의 각종 기억을 구술(口述)로 기록가가 정리한 원형이므로 글의 이해도가 다소 부족할 수 있다.
1. 유년시절 이야기
•면담자 :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선생님 태어나고 자란 곳이 여기 묵호인가요?
•구술자 : 예, 동해시 어달동입니다. 지금은 묵호동으로 포함되어 있죠
•면담자 : 네, 그러면 초, 중, 고 육칠십(6~70)년대를 살아오셨는데 고향 주변의 풍경? 뭐 생활환경이라든가 이런 것들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구술자 :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기억이 가물가물거리고 초등학교까지의 거리가 삼(3) km 정도가 돼요. (삼(3) km? 먼 거리네요.) 네, 네 그걸 인제 걸어 다녔죠. 인제 뭐 교통, 대중교통도 없고(음) 그럴 때니까 그때는 그 도로 쪽으로도 가고 산 쪽으로도 넘어가고 뒷산으로 넘어서 가고 그 거리가 거의 비슷해요. 근데 그게 초등학교 사(4) 학년 때까지인가 오전 오후반이 있었어요. (아! 이(2) 부제?) 그렇죠. 네. 그 학생 수가 묵호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생 수가 삼천(3,000) 명이 넘었어요. 그러니까 교실이 모자라니까. (으음) 그렇게 했는데 그렇게 다닐 때 참 장난도 많이 쳤죠. 으음. 그런 추억들이 떠오르네요.(으음).
•구술자 : 그러면서 인제 들어가면서 그때는 그 요즘은 참 그 도로도 잘 돼 있고 방파제 이런 것도 잘 되어있는데 예전에는 태풍 같은 게 좀 오고 이러면 파도가 도로를 넘어서 가정집까지 막 밀려 들어오고 막 그랬어요. (으음) 기억이 내가 고등학교 때도 그걸 고등학교 이(2) 학년 땐가도 기억이 나거든요. (으음) 방 안에 있다 놀라 친구들하고 놀다 놀라서 나온 적도 있고(음) 환경이 그런데 그때는 그런 피해 재난 지역이라고 이렇게 해서 지금 아마 그 그 호텔 바다? 그 부근이 그렇게 됐어, 어달리에 보면, 호텔 바다라고 새로 지은 건물이 있는데, 그 부근이 그런 재난지역으로…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그 총 십이(12)년이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거의 거리가 비슷했어요.
•구술자 : 그런데 그렇게 걸어 다녔던 게 지금의 건강을 유지하는 게 아니나라는 생각도 들어요.
•면담자 : 사는 것은 어땠어요?
•구술자 : 우리가 살 때는 인제 보릿고개라는 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근면한 아버지 덕분에 배는 곯지 않았지 뭐 넉넉하지는 않아도 배는 곯지 않고 살았어요. 기억이 그렇네요. 근데 집에서 이제 작은 목선. 노 저어 다니는 목선 사업도 하셨고 농사도 아버지가 농사도 지으셨고. (으으음) 그래서 뭐 굶거나 이런 건 없었어요.
2. 부모님 이야기
•면담자 : 부모님에 대해서 기억나시는 거 있으면
•구술자 : 아 네~ 근데 아버님이 성실하고 근면하시는 건 참 좋은데(네) 약주를 엄청 좋아하셨어요.(음) 근데 그 주사도 또 엄청 심했어요. 말도 못 할 정도로… (웃음) 하여튼 나름 제가 이제 그 엄마의 디엔에를 좀 많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잘했으면은 뭐 핑계 같지만 대학도 가고 이랬을 텐데, (음) 공부할 여건이 안 됐어요. 매일 오면 주사를 부리고 하여튼 그런 속에서 왔는데 그나마 그래도 그 저도 지금 술을 굉장히 좋아하고 이러는데, 그런 그 나쁜 습관은 없고 주사 같은 건 없고 하여튼 그래요.
•구술자 : 근데 꼭 그런 게 뭐 그 어떤 디엔에이를 가졌기 때문에 꼭 그렇게 간다라는 건 이렇게 뭐 의사들은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 저는 또 그거 하고는 좀 뭐 특이한지는 몰라도 좀 그것과는 다르지 않은가라는 어떤 그 자기의 어떤 생각과 의식이 투철하면 뭐 그런 거는 이겨 낼 거 낼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근데 우리 또 성장할 때 보니까, 아버지라는 분들이 어머니한테 폭력도 좀 많이 쓰시고…
•면담자 : 바람도 많이 피우시고 이렇게 해서 생활력도 없으시고 해서 여성분들이 굉장히 고생한 그런 거 주변에 너무 많았거든요.
•구술자 : 그런데 그 바람피우는 거는 제가 모르고요. (웃음) 근데 굉장히 난폭은 했어요. (웃음) 그 어머니를 어머니를 간첩이라고 파출서에 가 신고를 막 하고(웃음) (난폭하고 다른데) 하여튼 그래. (왜 간첩이라고 그랬을까요?)그러니까 인제 술 드시면은 그, 그게, 그렇게, 그렇게 되는가 봐요. 한 반 병만 드셔도 달라져요 사람이. (소주 반 병?)에, 그때는 이십오(25) 도짜리잖아요. 하여튼 그럴 정도로 그 술에 그, 그때 당시에 그런 분들도 많았어요. (예 많았어요). 술을 술을 먹으면 멀쩡히 가는 여자들 치마 뒤지고 뭐 팬티 봤다 이런 사람들도 있었고, 길거리 서서 교통 정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참 많았어요. 그게 보니까, 어떤 그 무지에서도 오는 것도 있다고 (그렇죠, 음) 뭐 정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으음) 상태였으니까 (으음).
3. 학창 시절
•면담자 : 아유 슬퍼하셔서 그냥 화제를 바꿔야 되겠네요. 학창 시절에요. (네) 가장 흥미가 있었고, 잘했던 과목이 있었다면 어떤 과목일까요?
•구술자 : 예체능 쪽으로 잘했 (예체능?) 지, 초등학교 때는 축구 선수도 했고(으음) 그런 쪽으로 많이 즐겼댔어요. 그 해외에 나가서도 해외생활을 팔십이(82)년도 인가 나갔는데 거기서 이제 극동, 그 나간 회사들이 시 열한(11) 개의 회산가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뭐 삼한기업이라든가에서 나갔는데 대단했는데 거기서 우리가 일(1)등도 하고, 그랬으니까. 대표로 해서.
•면담자 : 선생님 회사 이름이 뭐였어요?
•구술자 : 극동, (극동?) 극동건설(극동건설?)
•면담자 : 아 그러면 이름이 있었던 회사인데 어어~ 그러셨구나, 일(1) 등 했다면, 뭘 일(1) 등 했다는 얘기예요?
•구술자 : 아 축구시합을 해서.
•면담자 : 아 축구 시합에 아 기업들이 나가 있는데서 거기서 축구 시합을 친선으로? (네네네) 아 부상 같은 것도 받거나 뭐 이러셨어요? (그렇죠.) 일(1) 등 하면?
•구술자 : 그때 인제 상이 요, 요만한 탁상시계가 나왔어요, 노란 게.
•면담자 : 아, 예전에 시계 귀했는데.
•구술자 : 그리고, 그리고 회식하라고 그때, 그때 십(10)만 원인가 얼마 이렇게 주더라고요.
•면담자 : 으으음, 그때 당시 십(10)만 원이면 지금…
•구술자 : 꽤 컸죠.
•면담자 : 지금으로 말하자면, 한 백(100)만 원?
•구술자 : 돈 백(100) 이상은 되죠. 아마…
•면담자 : 돈의 가치가 그렇게 많이 떨어졌죠? 관심이 없었다, 또 흥미를 잃었다 했던 그런 과목?
•구술자 : 아 그거는, 음악 (음악은 재미없었어요?) 음악은… 재미가 없는 게 아니라, 그게 참 그런 게 있더라고. 초등학교 일(1) 학년 때 그 야외에서 그 느티나무가 있어요. 아마 이름이 네군도단풍나무 한(1) 그루 초등학교 앞에 그 고 모래가 약간 거기서 수업을 했는데 장난을 치느라 그걸 못 들은 거예요. 그 시험 쳤는데 빵(0) 점을 맞았어요. 뭐 모르니까 당연히 빵(0) 점이죠.
강원도 시절 감영 원주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다. 평소 도리와 인의예지를 중시하는 사람다운 사람을 존중하는 온화한 성품으로, 37년간 중 고등학생을 교육하는 교직에 몸담아왔다. 은퇴 후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 돌보며, 자연을 벗 삼아 농업에 취미를 붙인 행복지수 높은 농부다. 걷기, 사회교육 등 자기 계발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열 팀이 한 팀이 된 양 열사람이 한 사람 된 듯, 한 곳을 향해 분출되는 10명의 기록가 동료와 20명의 구술자의 목소리는 <묵호항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충분했다. 구술자를 향한 첫걸음부터 구술 마감까지 모든 과정은 잊을 수 없는 유쾌하고 가치 있는 공간이며 시간이었다.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산업유산 묵호항을 배경으로 구술자 20명과 시민기록가 10명이 참여해 일궈낸 성과다. 국내 정상급 구술사,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 실장) 컨설턴트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마치고 기록한 구술사 대장정이다. 구술에 참여한 기록가가 작성한 소감을 각색하고 요약 기록해 둔다. 열 번째 구술자는 1953년 묵호에서 출생한 최효열 씨로 '꽃이 되고 싶어 하는 사나이‘ 를 주제로 구술에 참여했다. 기록은 김정숙 생활사 기록가가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