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문경자 구술사,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
과거 묵호사람의 절반은 뱃사람, 절반은 덕장 종사자로 살아왔다. 과거 배 종사자는 남자들이 겨우 익힌 기술로 기관장이 되고 당시는 6인 7인이 겨우 타는 통통배 수준의 작은 목선이 대부분이었다. 배를 타는 어부들은 목숨을 내놓고 작업을 해야 했다. 때문에 그들의 삶은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산다’고 할 정도로 고된 삶이었으며, 칠성판과 운명을 같이하는 ‘죽음을 지고 산 사람들’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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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뱃사람들에게 바다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들에게 지구는 평평한 곳이었고, 바다의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어서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개척자는 존재했으며, 뱃사람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먼바다로 나아갔다. 정확한 지도나 관측 도구 없이 그들은 오랜 경험으로 항해술을 익혀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섰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기항지, 술과 바람의 도시 ‘묵호‘에서도 바다의 역사는 이어갔다.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산업유산 묵호항을 배경으로 구술자 20명과 시민기록가 10명이 참여해 일궈낸 성과다. 국내 정상급 구술사,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 실장) 컨설턴트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마치고 기록한 구술사 대장정이다. 구술에 참여한 기록가가 작성한 소감을 각색하고 요약 기록해 둔다. 아홉 번째 구술자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결혼과 함께 묵호에 정착한 문경자 씨로 '죽음을 지고 산 사람들‘ 을 주제로 기록은 김정숙 생활사 기록가가 담당했다.
제주도 어촌마을에서 1남 1녀의 맏이로 태어나 부모 부재의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고 일찍부터 인근에 있는 큰집을 의지해오다가, 큰집 언니 둘이 결혼하여 살림을 차린 묵호로 따라와 정착하고 결혼해서 일가를 이루게 된다. 오징어와 명태 건조로 47년간을 생계를 이어갔지만, 어업에 어려워하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을 부양해야 하는 녹록지 않은 살림 탓에 틈틈이 개 사육 및 판매와 노점상, 촌두부 행상 등을 병행하며 생계를 보탰다. 일을 그만두게 된 이후 현재까지 노인 일자리를 다니며 살아가고 있다.
유년시절부터 부모의 잦은 부재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였고, 이름도 없어 고향사람들에게는 개똥이로 불리었으며 출생신고도 10년이 지나서야 하였다. 큰집에서의 더부살이 생활 그리고 묵호로 따라간 큰집 언니 둘의 살림과 자녀들을 돌보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어업 일에 익숙지 못한 남편과 시댁식구들의 부양을 위해 47년 간을 생업으로 어판장에서 오징어 할복일과 명태 건조 일에 종사하였고 그리고 짬이 나는 대로 틈틈이 개사육 및 판매와 노점상, 촌두부행상 등을 병행하며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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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철은 할복하는 사람이 적어 오징어 한 두름에 천 원이면 따개비도 천 원한 적도 있어 당시의 오징어 할복인들의 생활형편은 각자 노력 여하에 어느 정도 정도에 차이가 나기도 하였다. 능란한 사람은 하루에 한 바리 곧 100 두름을 할복하기도 했고, 본인도 숙달이 되어 그렇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징어 할복 후, 내장과 똥은 마을 한편에 자리한 공동묘지에 갔다 묻었으나 묻지도 않고 그냥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 마을에 냄새가 심해 후에 시에서 공동묘지를 매입하여 없애니 마을에 냄새가 사라져서 살기가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은 옷을 사 가져와 입어보니 맞지 않아 바꾸러 갔다가 비린내가 심해 반품할 수 없다고 거절당한 경험을 말한다. 자갈과 흙길로 질퍽한 언덕길에 물사정 형편이 유독 안 좋아 목욕도 해 질 녘 바닷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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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 대의 묵호는, 오징어와 명태가 많이 잡혀 당시 어판장에서 할복하는 사람이 백 명을 족히 웃돌았으며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건너오는 일꾼들도 많았으나 본인의 배가 없고 덕장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소규모 영세 건조업자나 상인인 구술자 같은 처지는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여서 평생 저축이란 것도 모르고 살았고, 자녀교육에는 전혀 신경 쓸 겨를도 없어 자녀들과 재미난 추억 제대로 하나 없고 내놓을만한 가족사진 한 장 없었다. 뱃멀미로 힘들어하는 남편이 겨우 익힌 배 기술로 기관장이 되었지만 여러 번의 사고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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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6~7인이 겨우 타는 통통배 수준의 작은 목선이 대부분이라 배 타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작업해야 했다. 때문에 물가에 사는 사람은 칠성판을 지고 다닌다고 할 정도의 삶이었다. 또한 바다에 나갈 때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잘 다녀오란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동네 아이들이 제대로 된 인사 없이 자라는 것이 그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혼자남아 집안 깊게 파고드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아버지의 강이란 노래를 아프게 흥얼대며 지내고 있다.
참고_ 구술사 하이라이트
• 면담자: 선생님 출생지가 제주도라고 들었는데 제주도 어디세요?
• 구술자: 조천면 조천리…
• 면담자: 조천면 조천리? 거기서 어릴 때 열(10) 살 이전까지 생활을 하셨다고 하시는데 어 성장 과정을 좀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 구술자: 클 때도 이리 큰 집하고 아래 윗집에 있어 노니까나(있으니까) 그래(그렇게) 죽으나 사나 인제(이제) 큰집으로 다 모여 가지고(갖고) 언니들이 많으니까나(많으니까) 그 식구가 많으니 먹을 것도 많고 이리(이렇게) 또 식구가 많으니 재미있잖아요?
• 면담자: 네.
• 구술자: 그래 가지고(그래서) 큰집으로만 몰리고(모여들고) 집을 비 와놓고(비워놓고) “야 너 집에 가봐라, 너 집에 뭐이(뭐) 도둑이 들어 뭘 훔쳐가도 모르겠다이(모르겠다.)” 그 소리 들으니 더 못 가는 거예요.
• 면담자: 어. 무서워서?
• 구술자: 도둑놈도 없지 마느니 해도(없지만) 그 소리 들으니 더 못 가는 거야 이젠. 너 저기 우리 집에 너 딴 사람이 그거 왔다 하는 그 소리가…
• 면담자: 음.
• 구술자: 그래가지고(그래서) 추우나 사나 큰 집에서 그래 뭐 잘 산다 못 산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잘 사는 집이 어떻고 못 사는 집이 어떤 그것도 모르고 인제(이제) 우리 언니들 보면은 뭐 장날이면 뭐 훔쳐다 파느라고 난리고 뭘 사들이느라고 난리고 맛있는 거 해 먹느니라고 난리고 그러면 거 재미가 나 가지고서는 같이 이제 큰집에서만 사는데 시집을 와도 이제 저 집이 큰집인데 아래 웃집에 살면서 그렇게 시집와도 아래 웃집에 뺑뺑 돌아 댕기며 거 떠나질 몬해요(못해요). [그거 참]희한해.
• 면담자: 근데 어머님 아버님은 안 계셨어요?
• 구술자: 뭐 우리 아부지 뭐 집 나가면은 뭐 일(1)년에 한두 번 들어올 때도 있고 뭐 한(1) 달에 뭐 한(1) 번 올 때도 있고 뭐 우리 엄마는 죽으나 사나 뭐, 뭐 잡수는지 안 잡수는지 뭐, 뭐 벌어 멕이니라고 밭에 농사 짓니라고 일하고, 그래 우리는 뭐 그래 그런 일은 뭐 할 수 없으니까나 큰 집이만 머 식구 많은데 거 같이 마우(모두) 우왕좌왕 막 그거 해가 지고 그거 하고, 그래 조금 크니까 나 이제 나무 같은 것도 조금씩 이제 해다가 이제 조금씩 보탬이 되고, 또 저, 저 부산 있는 남동상(남동생) 그때 어리 니 까나 그래 엄마가 이 애 데리고 집에서 잘 놀아라 그래논께(그래놓으니) 아효… 그 신체가 저 우리 엄마가 이래 굵어요. 자식들이 엄마를 많이 닮거든.
• 구술자: 뭘 나는 그때 굵은 줄 몰랐는데 (웃음) 남동상이 얼마나 굵은지 이리 업고 댕길라하니도(다니려고 하니) 힘이 들고 그러니까 나(그러니까) 방 안에다 이제 가돠(가둬) 놓고 나온다고 밖으로 문 잠가놓고 그릇에 밥을 해 가지고서는 이제 숟가락 하고 그때 엿날(옛날)의 대접에다 밥을 해나 놓고 들야 주고는(들여 주고는) 밖으로 문 잠가 놓고서는 철대가리 없이 난 나대로 그리 돌아 댕기다 문을 열어보니밥도 다 먹고 똥도 싸가지고 나오니 어떻게 해? 싸 가지고 개락(많이)을 해놓고, 그걸 치우면서 이놈의 것 숟가락을 고만 휘떡(훌쩍) 집어던지는 게 아를 엉덩이를 몇 번 때려주다가 휘떡(훌쩍) 집어던지는 게 이 숟가락 총(숟가락 끝)이 허리에 이만치 쑥 들어갔어. (어?) 꼽혀(꽂혀) 가지고. 그리 얼마나 놀랬는지, 숟가락 총을 빼도 이리 디다보니(들여다보니) 구멍만 뽀꼼하지 피도 안 나와. (응) 그리 우리 어려서 이래(이리) 보면은 어르신들이 민간요법을 마이(많이) 해요.
• 구술자: 뭘 그런데 무슨 그거 마른 말똥도 비벼 가지고 이제 싸매는 거 보고 언제 그래 가지고서는 그게 그 속으로 들어가면은 안 되는데 들어가거나 말거나 그걸 생각지도 몬하고(못하고) 그리 여기 놔놓고서는 끈가리(끈) 가지고 이리 매 놓고는 그 죄 없는 일이 돼서 속으로 살이 올라오면서 그걸 아물어버렸어. (으응) 이제 엄마 아버지인데도 그런 소리 못하고 겁이 나서, 그래 고만 아물어버렸는데 그래도 탈이 없이 그저 머 천 둥이가 돼서 클라니(크려니) 잘 커가지고 그래 큰집도 외동이지, 우리 집에 손이 귀해가지고 우리도 외동이지. 그래도 큰집에 딸만, 딸만 다섯여섯을 낳아 노니까나 큰아버지는 엿날(옛날) 어르신들이 딸들 취급을 자식 취급을 안 했어.
• 구술자: 지금은 뭐 아이고 누구 집 딸들 잘 큰다 하지마는 엿날(옛날)에는 딸들이 이리 잘 크면 아 누구 집 자부들 잘 큰다 이러고… 아 이놈의 거 그래 집에 와 가지고서는 이래 어른들 봐도 이래(이리) 고 죄 없는 일이 돼서 그만 뭐 속으로 살이 올라오면서 고만(그만) 그래 아물어버리니 어른들은 몰랐지 머.
면담자: 음. 그러면은 어머님, 아버님이 특별히 어떤 직업을 갖고 계신 게 아니었나요?
• 구술자: 뭐 시골에서 농사 지어먹고사는데, 뭐 남자들 그렇게 크게 거 죽으나 사나 가정에 그거 아는 사람은 같이 이렇게 그거만 그거 하지마는 해도 안 그거 하는 분들은 안 해요. 뭐, 뭐 이리 돌아 댕기다 집에 와 보고 노름이나 하고…
• 면담자: 아버님이?
• 구술자: 그런 동네 분들이 많았어.
• 면담자: 아! 그러면 땅은, 농토는 어머님 아버님 소유의 농토였어요? 그럼 먹고사는 거는 괜찮았겠네요?
• 구술자: 먹고사는 거는 그저 머, 머 시골에서 내가 노력하면 한 만치 생기니까나 그래 먹고살았는데…
면담자: 음…
• 구술자: 뭐 여유는 없지 뭐.
• 면담자: (으음) 그러면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은 어머님 아버님을 딱 떠올렸을 때 뭐가 가장 그래도 기억이 나세요?
• 구술자: 우리 아버지가 그래 바람을 피워 가지고 원도로 댕기니까나 그래도 지금은 뭐 여자가 대통령 나오는 세월이 되니까나 여자들이 뭐, 뭐 반장도 하고, 부장도 하고, 다 그러는데 그때는 남자들만 하는 줄 알았어.
• 구술자: (응) 반장이 왔다가도 우리 아버지가 의심을 하고. (응) 그래 한 번에는 시골에 살아봐야 뭐 반찬이 무슨 이 호박을 심어 가지고 애동이 조롱조롱조롱 달려도 그걸 따 가지고서는 반찬 해 먹고 그거 저거 할 여유가 없었어. (음) 장 담가놓고 김치 담아 놓으면 그게 밑반찬이고, 뭐 찌개 하거나 국을 끓이고 이제 그러면 이제 그게 반찬이지. 그래 아버지가 이제 이러믄 친정 숭(흉)이 다 드러내졌다(드러나겠다). 아버지가 이제 오랜만에 오시니 까나(예), 뭐 밑반찬 해봐야 뭐 반찬도 없고 이러니까 나 참깨를 빻아 가지고서는 이제 그 죽을 끓여 가지고 드리니 그 엿날(옛날) 허연 대접이 이만한 거를 거 이래 죽을 끓여 들이미니 잡수고 우리는 이 여간해서 이래 놀고, 우리 엄마는 밖에서 뭔 일을 했는데 뭔 생각을 해 그랬는지 모르겠어. 거 죽을 드시다 말고서는 죽 대접을 갖다가 베름싹(벽면)에다 주어 던져 뻐리니까나 대접이 허간 두꺼워노니 안 깨지고, 죽은 저 천장에서 주르르 내려오고 대접은 안에서 이제 구부러(뒹굴러) 댕기고(다니고) 이제 그래. 그런 게 한번 기억이 나고 지금, (으음) 지금이라도 내 저 세상 가면 우리 아버지 보고 그걸 따지고 물어볼 생각이라. (응) 왜 그러고, 그러고 살았는가고?
• 면담자: 음. 그러니까 아버님이 오랜만에 오셔갔고 참깨죽을 끓여주셨는데 어머님이…
• 구술자: 잘 해 드리니라고 이제 해드렸는데 (그렇지), 뭘 뭔 생각을 잡수다 말고 뭔 생각을 했는지 몰라.
• 면담자: 던진 건 어머니셨잖아요?
•구술자: 아니지. (아버지가?) 잡수다 말고 (아버지가?) 아부지가 던져버렸지.
• 면담자: 아 뭐가 일이 잘 안 풀리셨나 보다. 그러니까 그 이유는 모르신 거예요. (모르지) 지금까지?
구술자: 그러니까 나 지금이래도 저세상 가면 아버지 보면 내 왜 그랬는가고 내 한번 따져보고(××× 00:10:14).
풍속과 해녀이야기
• 면담자: 아이 참, 그래 인제 저런 경상도에서는요, 선생님 딸 낳을 때 왜 특별한 풍습이 있다는 거 얘기 들어보셨어요? 경상도에서는 딸을 낳을 때 그 솔가지하고 숯을 대문에 건데요. 솔가지나 숯을 그러면 어머님이 사시던 동네에서는 딸을 낳으면은 뭐 다른 풍습이 있었어요?
• 구술자: (××× 00:10:59) 한 가지여.
• 면담자: 어? 솔가지나 숯을? (에에) 대문에 달았어요?
• 구술자: 아들놈은 줄에다가 이제 빨간 고추를…
• 면담자: 빨간 고추?
• 구술자: 고추를 이래 꼽아놓고.
• 면담자: 으응. 그 솔가지나 숯은 왜 달았을까요? 솔가지 소나무(를)…
• 구술자: 그건 모르겠어.
• 면담자: 모르겠는데 제주도랑 경상도랑 같으네요. 음∼그러면 인제 제가 같이 직장에 근무했던 그 여선생이 제주도 토박이예요. 근데 얘기를 하는데 잘 얘기되다가 친정집에 전화 건다고 전화를 딱 했는데 그 친정엄마랑 대화하는 가운데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러니까 제주도 토박이 말이 여기 말하고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 구술자: 나는 제주도가 내 고향이지만은 제주도 하고, 전라도 하고를 에휴 (××× 00:11:48)…
• 면담자: 하하.
• 구술자: 정말 난 다 같은 사람이지만은 다 같은 사람이고 내 고향이래도 제주도 하고, 전라도를 내 인간 취급을 안 해.
• 면담자: 어, 왜요? 전라도가 뭐 제주도에 피해 입혔나요?
• 구술자: 똑같애 (똑같애요?). 똑같애.
• 면담자: 아아…
• 구술자: 사투리가 너무 심해 가지고. (으음). 말도 몬(못) 알아먹겠고 저 전라도 쪽으로 또 가면은(못 알아먹어).
• 면담자: 음?
• 구술자: 이래(이렇게) 들으면은 여러 사람 이야기를 해도 한 사람 이야기 같애(같아). 마다 깨깨깨겡하고 그래 어느 사람 누가 말하는지 구별을 몬 해. 아. 제주도도 그래. 여기서 같으면 할머니 할아버지 그러지. 하르방 할 할망…
• 면담자: 으음, 맞아요.
• 구술자: 하르방, 할망 뭐 여서 저기 뭐 노래도 있지만은 뭐, 뭐 갑서옵세. 가세요. 오세요.
면담자: 혼자 옵서예 감수광 노래 으음…
• 구술자: 혼자 옵서 빨리 오세요, 이 소리지 뭐.
• 면담자: 혼자 옵서예가? 아… 혼자 오라는 얘기가 아니고 빨리 오라는 얘기예요?
• 구술자: 빨리 오세요 이 소리여. 혼자 오라는 소리가 아니고 혼자 옵서 혼자 옵서예 이 소리야, 혼자 옵스예. 빨리 오세요.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다. 평소 도리를 중시하는 사람다운 사람을 존중하는 온화한 성품으로, 37년간 중고등학생을 교육하는 교직에 몸담아왔고, 은퇴 후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 돌보며, 자연을 벗 삼아 농업에 취미를 붙이고 틈틈이 자기 계발에 전념하고 있다.
칠성판: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본떠 일곱 개의 구멍이 뚫려있으며, 염습殮襲한 시신을 눕히기 위해 관棺 속 바닥에 까는 얇은 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