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전상집 구술사,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산업유산 묵호항을 배경으로 구술자 20명과 시민기록가 10명이 참여해 일궈낸 성과다. 국내 정상급 구술사,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장) 컨설턴트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마치고 기록한 구술사 대장정이다. 구술에 참여한 기록가가 작성한 소감을 각색하고 요약 기록해 둔다. 구술자는 강릉 구정 출신으로 군 제대 후 동해에 정착, 묵호항 하역을 생업으로 이어온 전상집 씨로 기록은 김은정 생활사 기록가가 담당했다.
1945년에 태어난 강릉 구정 출신으로 어린 시절 6.25를 겪으셨고, 유년시절을 강릉에서 보냈다. 중학교 졸업 후 생업을 시작해 군 제대 후 묵호에 정착, 묵호항 하역업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묵호항에서 생업을 이어나갔다. 퇴직 후 현재 망상 장학회 회장을 역임하시고 사문 영농 회장, 큰 발한 경로당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전상집 구술자는 강릉 구정 출신으로 어린 시절 육이오를 겪었다. 당시 피난을 갈 수 없어 부엌 아궁이에 숨어야만 했던 이야기와 인민군이 가르쳐 준 노래를 따라 불렀어야 했던 육이오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 중학교를 졸업하고 생업을 시작해, 입대 전까지 일을 했다. 군 제대 후 사촌 형님을 따라 묵호로 이주 묵호항에서 하역업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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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 묵호항이 호황을 누릴 때 구술자는 묵호항에서 리어카로 시멘트를 옮기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벌이가 괜찮아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온 동내에 소문이 나서 대드는 사람이 많았지만 일이 워낙 힘들어 쉽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어항에는 꽁치, 오징어, 명태 등 어획량도 많아 북적였다고 한다. 묵호에는 논골, 도째비골, 산지골 3개의 골이 있었는데 그 골에는 명태 덕장과 오징어 건조장이 많았다고 한다. 묵호항에 오징어 명태가 들어오면 지게꾼들이 덕장과 건조장까지 지게로 옮기는 일을 했다고 한다. 구술자는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는, 격일로 일을 했는데 24시간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지게를 지러 묵호항으로 갔다고 했다. 지게를 지어 논골과 도째비골을 오가며 오징어를 날랐는데 그렇게 번 돈으로 밀가루를 사서 집으로 갔다. 먹을 게 없던 시설 밀가루로 아이들에게 밀가루 빵을 해주었다며 그게 행복 아니겠냐는 구술자의 이야기에 가족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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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항(現동해항)이 생기면서 북평을 오가며 하역업을 하시다 2005년 퇴직을 하셨는데 퇴직을 하시고도 12년간 동해항에서 배가 들어오면 줄을 묶고 푸는 일을 하셨다고 한다. 구술자는 구술하는 내내 그 시절을 회상하며 감사하고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 기대나 바람보다는 현재에 감사하고 만족하신다고 하셨다.
참고_ 주요 구술 하이라이트
• 면담자 :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 구술자 : 네, 저는 사(4), 오(5)년 십(10) 월 이십구(29) 일생이고요. 어… 저는 원래 강릉에서 살았다가 여 인제 군대 제대를 하고 강릉에서 직장을 좀 다니다가 육십구(69)년도에 묵호로 나왔습니다. 육십구(69)년도에 나와서. 그, 항운노동조합이라는데 다니는데, 그때는 뭐 항운노조가 직장이라는 건. 직장은 직장이지만 직장이라고는 생각 뭐 그게 없어요. 요새 말하면 뭐야? 의료보험도 되지 않고, 아무 노동 규칙이 안 돼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뭐 다쳐도 자기 돈으로 치료해야 되고 뭐든지 다 자기가 해야 돼요. 그래서 아들도 키우는데 학자금도 없고, 그냥 이젠 내 돈으로 다 가지고 초등학교부터 가르치며 여태 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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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뭐 지금 이 경로당 회장직을 맡고 있는 데가 이제 삼(3)년 하고 몇 개월쯤 됐습니다. 앞으로도 경로당에 대해서는 할머니들에게 저가 하고 싶으면 할머니들이 최고로 편하게 해주는 것이 회장입니다. 회장이라는 거는 다른 게 없습니다. 할머니들 잡수시는 대로 대접해주고 싶으면 다 해드리고 이렇게 해 줘야지만 그게 회장이지, 잘못하면 안 됩니다. 유년시절이라는 육이오(6·25) 나오고 났을 적얘기해 볼까요? 그 유(6) 월 이십오(25) 일 날 육이오(6·25)가 났잖아요. 강릉이 금방에 들어온 거예요.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노래를 가르치니 뭐 노래를 가르치느냐 김일성 장군 노래를 가르치는 거예요. ‘장백산 줄기줄기 이어온 우리’ 다 몰라요. 이제는 고거만 알지 ‘장백산 줄기줄기 이어온 우리 김일성 장군’ 그것만 밖에 몰라요. 어렸을 적에 그렇게 하고, 그리고 어렸을 적에 크는 기 지금처럼 그런 게 있습니까? 나무 깎아 가지고. 메뚜기를 만들어 자치기라 그래요. 자치기. 그다음 또 저게 흙을 옹 흙이라고 있어요. 고걸 또 다마(구술)를 동그랗게 만들어 그걸 꼬아 가지고. 다마 치기 하고, 다른 게 없어요. 자치기하고 제기차기하고 그렇게 유년시절에는 그렇게 지내왔어요.
• 면담자 : 하역일 하실 때 묵호에 사람이 많았나요?
• 구술자 : 엄청 많았죠. 칠(7) 개 조가 있었는데, 한 개 조가 한 사십(40) 명씩 되니까. 사십(40) 명 이면 7개 조니 이백팔십(280) 명 정도 된다는 거지. 그리고 뭐 그러니 이 묵호항에도 얼마 되질 않잖아요. 얼마 되지 않으니 오천(5000) 톤짜리 배 하나만 대놓으면은 다른 배는 댈 데가 없었어요. 빨리빨리 하역해서 보내고 이러면 뭐 한국을 또 보니 그것도 와서 사 가져가는 사람이야 보고 시멘트명을 사 가져가는 사람이야 보고 이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다. 이렇게 다 봐야 되잖아. 그러니 그것도 시멘트만 전용 부두란 말이에요. 시멘트 전용부두인데 내 중(나중) 그게 한 칠십(70)년도는 세면가루만 실은 배가 와요. 그게 이제 이따금씩 와서 싣고 가고 그랬는데 그때는 그렇게 돼 있었어. 뭐 우리가 뭐냐 나도 지금 뭐 부두에 일하는 것만 알지 뭐 자세한 건 잘 모르지.
• 면담자 : 선생님 논골길이랑 묵호항 분위기 말씀하시다가 끊어졌는데, 그러면 지게꾼 하실 적 논골길은 분위기가 어땠어요?
• 구술자 : 논골분위기라는 당시에는 거기 그런 개념이라는 건 하나도 없고, 어찌 됐든 간에 내가 한(1) 점 지우고(지고) 가면 빨리 남보다 한(1) 개 더지고 가야지만 더 벌 수는 있다는 거. 그럼 남은 열 (10) 짐 지는데 나는 석(3) 짐 넉(4) 짐 지면 벌이가 안 되잖아. 그것과 한 가지로 많이 지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버니 그걸 많이 인제 하려고 하는데, 서로 빨리빨리 나르는 게 이제 문제지.
• 면담자 : 묵호항에 어업 하시는 분들도 많고 물건을 사러 오시는 분들도 많았네요. 지게꾼 하시는 분들도 많았나요?
• 구술자 : 많지. 그러니 하역이라는 거는 뱃사람이 해놓지 묵호항에는 아니 저 항구에는, 그럼 오징어 잡아오는 사람은 오징어 잡아 자기가 잡아 가지고 자기가 땅바닥에 풀어놔야 돼. 그리고 딱 그래 놓으면은 이제 이렇게 내가 잡았으면 뭐 스무(20) 드름이고 몇 드름, 딱딱딱 이렇게 해 놓으면 이제 수협에서 나와 가지고. 이건 누구 거다 이게 누구 거다 누구 끼다 이래 가지고 했는데, 그 칠십(70)년대 초반에는 그런 것도 없어요.
• 면담자 : 경매도 없었나요?
• 구술자 : 뭐 잘못하면 오징어 잃는 게 수다해(수없이 많다). 오징어 잡아와서 밤새다 잡아가지고., 오징어 한 마리도 못 가져간 사람들이 있다고. 잘못하다 보면 그러면 어느 놈을 줬는지 뭐 알지 못하는데 어떡하나. 그런 일도 있었다고 했는데, 그게 이제 잡아오는 사람들도 잘해야지 자기 돈을 자기가 돈을 받아야 되니 그런 다음부터는 자꾸 질서로 잡혀가는 거지. 그러면 오징어철 되면 오징어 엄청 들어왔거든요. 그리고 공치철이 되면은 꽁치도 많이 들어오고, 노가리배가 이제 명태가 들어올 적에는 명태배가 들어올 적에는 또 사람도 많고. 그러니 지게 지는 사람들이 사람들은 명태, 오징어 두 가지야 그 꽁치는 전하라는 건 없어요. 그렇게 누가 한 집서 먹을 사람이 없고, 그건 꽁치는 그냥 보고만 있는 거고. 그다음에는 오징어, 노가리. 노가리는 가을 인제 지금 좀 더 있어야 돼. 한 십일(11) 월 중순 그전 십이(12) 월 초에 이북서 명태가 내려온단 말이야. 내려오면 새끼만 요만한 거 잡아가지고. 그기 배가 뭐 한 여나은 한 이(2), 삼(3) 이십(20)척씩 되는 게 가면은 뭐 한 상자가 뭐 사십(40) 키로(k) 되는 게 한 배가 뭐 이백(200) 개니 천(1000) 뭐 오백(500) 개니 천(1000) 개를 잡사오니 엄청나지. 그러면 그게 그때 당시만 해도 이쪽에 서낭대(서낭당)이라는 데가 있어요. 서낭말랭이라고 지금 논골, 도째비골 저기 저게 산지골이 세 개잖아요. 도째비골, 산지골, 논골 그렇게 이제 돼 있는데, 비탈이 있지 묵호 비탈이 다 오징어 건조장이야. 오징어 건조장이고, 저기 노가리 명태 새끼 노가리라고 하는데 그게 어장이라고. 그리고 지금 서낭대 그게는 옛날부터 큰 대태 이런 것만 거서 말렸어요. 지금도 하더라고. 거기에는 아주 아주 굵은 것만 하고, 그다음은 나머지는 지금 뭐 도째비골 그거는 그때는 그런 오징어, 명태야. 새끼 노가리 많이 마카 말리고 그래 팔고, 그때는 한겨울에는 지금보다 더 지금은 날이 엄청 뜨세 졌잖아요.
• 면담자 : 네
• 구술자 : 그때는 명태 같으면 명태가 배서 내려오면 얼어. 상자가 막 언다고. 저다 갖다 주면 아줌마들이 장갑 몇 개씩 찌고 작업하고 그러더라만은, 나는 지계 몇 번 저도 저 봤지만, 이 작업은 안 해봤고. 당시에는 인제 갔다 일을 갖다 되면은 그래도 그때 젊은 젊어 그래노니(그렇다 보니), 아침에 나가서 벌면은 한 이천(2000) 원 삼(3000) 원 벌어 가지고 올 적에 밀가루 한 포 사 짊어지고 아들 갖다 빵 해주고, 그 재미로 살았지….
기록가 김은정 씨는 동해에서 유년을 보냈고, 중국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중국어 강사와 방과 후 강사 활동 등 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였고, 글쓰기, 독서 모임 활동을 통해 생활사 기록가라는 일을 알게 되어 활동하게 됐다. 묵호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서 구술자의 이야기기 흥미진진했다. 묵호를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이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 않았나 싶다. 또한 구술을 하며 '감사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하셨던 구술자님을 통해 감사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