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홍근 구술사,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
기록일지, 눈물의 묵호항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산업유산 묵호항을 배경으로 구술자 20명과 시민기록가 10명이 참여해 일궈낸 성과다. 국내 정상급 구술사, 아카이브 마스터 정혜경(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 김선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정보실장) 컨설턴트의 인문학 교육 클래스를 마치고 기록한 구술사 대장정이다. 구술에 참여한 기록가가 작성한 소감을 각색하고 요약 기록해 둔다. 구술자는 송정 출신 전 동해지방해양수산청장을 역임한 홍근 씨로 기록은 김은정 생활사 기록가가 담당했다.
구술자는 1952년 강원특별자치도 동해 송정 출신으로 33년간 해양수산부 근무와 동해해양수산청장으로 퇴임한 해양개발학 박사이자 항만 전문가다. 해양수산부 퇴임 이후에도 인천항만공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항만 관련업에 종사하고 계시며, 동해 묵호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항만산업 전반과 항만 역사에 깊은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동해 송정 출신으로 묵호를 오가며 유년을 보냈고,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 토목과를 나와 전공을 살려 토목공무원으로 묵호 축항 사무소에 입사하였다. 지금은 그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송정해수욕장의 모습과 그 시절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이야기, 또 생업을 위해 철길을 따라 묵호를 오가던 이야기를 하며 당시 송정과 묵호의 모습을 이야기하였다. 묵호 축항사무소에 근무할 당시 묵호 축항사무소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항 내 분위기에 대해 구술하였고, 묵호에서 생활하며 70년대 묵호 시내의 분위기가 어땠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묵호항은 본래 일제강점기 군사 목적으로 만들어진 항이라고 한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전체 하역량이 천만 톤이었을 때, 부산 인천항 다음으로 많은 하역을 담당하던 큰 항이었었고, 무역항 역할을 하였다. 묵호항과 근대산업의 연관성은 석탄부두와 시멘트부두에 있다. 국내 유일 석탄 반출 부두가 있었으며, 시멘트 부두가 생기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 나가는 물동량이 굉장히 컸다고 하였다. 당시 묵호항은 40만 평방미터 면적에 상항, 석탄부두, 일반부두, 소방부두, 보안항구가 있었으며 나머지 부분을 어민들이 어항으로 이용을 했기 때문에 항상 복잡했다고 한다. 그렇게 번성했던 묵호항은 인근 북평항(現 동해항)이 들어서며 기능이 분산되자 무역항 역할이 축소되어 지금 모습으로 변하였다. 구술자는 해양수산부 재직 경험을 바탕으로 동해안 쓰나미와 근대 항만의 역사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한다. 전문가 시선으로 묵호항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관광항으로써 발전 가능성에 대해 구술하였다.
홍근 전 청장, 구술내용 하이라이트
• 기록_ 김은정 생활사 기록가
• 구술_ 홍근 구술자
• 교정•정리_ 조연섭 스토리 크리에이터
• 참고_브런치 매거진용, 일부 각색
Q_면담자 : 선생님과 함께 ‘눈물의 묵호항은 근대 산업과 함께 발전했다’라는 내용으로 면담을 할 예정인데요. 선생님의 출생과 성장 과정 그리고 묵호에서의 생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A_구술자 : 네 저는 1952년, 양력으로 2월 8일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은 당시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 655번지입니다. 우리 집이 지금의 동해 송정리에서도 집 위치가 논밭 앞이고 약간 높은 데 있었고 옛날에는 대청마루가 있었죠. 대청마루서 보면 앞 들녘이 쫙~ 보이고 마주 보는 것에 만경대라고 하는 정자가 있었습니다. 집 안방에서 보면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태어났는데, 그때가 6.25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저는 어렸을 때라 잘은 모르지만 부모님들이 고생을 많이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송정이라는 마을이 어렸을 때는 북평 쪽에서 송정 쪽으로 들어오다 보면 좌우에 큰~ 기와집이 두 개가 있고, 소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 소나무가 있는 곳이면 다 홍가들이 살던 곳 그 주변애서 제가 태어났었습니다. 6.25 때 태어나서 송정에서 살기 시작했죠.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굉장히 많이 오셨어요. 할아버님 문하생들이 많이 오셨고, 또 아버님 손님분들이 많이 오셔서 주로 뭘 하셨느냐 하면 바둑도 많이 두시고, 마작도 하시고, 그러면서 거기 심부름을 주로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도맡아 해서 저도 바둑은 수준급입니다.(웃음)
Q_면담자 : 당시 송정마을은 어땠나요?
A_구술자 : 송정은 당시 부산 해운대만큼 유명한 해수욕장이 있었어요. 그 해수욕장으로 비행기 타고 많은 분들이 여행을 왔습니다. 여름만 되면 송정은 완전히 해수욕장으로 외부 손님과 사람들이 관광객들이 넘치던 곳이었고요. 두 번째로는 해수 철(해수욕 철)이 딱 끝나고 나면 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이 됩니다. 농사를 짓는 농촌이고 묵호는 어항이기 때문에, 현찰이 많이 오가는 누가 봐도 현찰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인다고 하는, 그런 묵호는 상업지역으로 봤죠. 그래서 고기도 생선 고기도 많고, 특히 당시도 그렇지만 여기는 물건과 모든 패션은 묵호가 중심이었으니까요.
Q_면담자 : 여가 생활은?
A_구술자 : 개인적으로 바둑을 좋아했기 때문에, 바둑을 많이 뒀어요. 바둑 두고, 산에도 많이 가고, 특히 이제 무릉계를 많이 갔는데, 두타산과 무릉계에 가면 제가 제일~ 자주 갔던 곳 중에 하나가 직원들 데리고, 직원들 윗분들 모시고 같이 많이 갔는데, 이런 기회에 이런 말씀을 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무릉계에 가면 용추폭포가 있고 쌍폭이 있는데, 용추폭포의 용추라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용이 승천을 했다고 하는 곳인데 용이 승천한 흔적이 남아있어요. 그 흔적이 뭐냐 하면, 묵호, 지금 삼화사 입구에 가면, 물 밑으로 보시면은, 폭 삼십 센티(30cm) 되는 까만 줄이,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용추폭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걸 아시는 분들이 많지 않아요. 바로 용오름길이라고도 하죠
Q_면담자 : 네 알겠습니다. 이슈로 보는 묵호라고 해서, 이슈를 몇 가지 적어봤어요. 그중 하나가 대화퇴 어장, 어장 해난 사고 그리고 두 번째가 묵호, 동해 영동고속도로 개통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화물 운송이 육로로도 이동이 가능해졌다. 묵호항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어요?
A_구술자 : 네 제나이 20대 초반에 접한 대화퇴 사건은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입니다. 지난 1976년 10월 28일∼11월 4일 동해상 황금어장 ‘대화퇴’에서 발생한 해난사고는 지금도 사상 최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대화퇴 어장에는 초속 14∼17m의 강풍이 휘몰아치고, 높이 10m 이상의 거대한 삼각파도가 덮치면서 조업 중이었던 어선 448척 가운데 33척이 침몰 또는 전파되고 12척이 반파, 선원 317명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는 참극이 발생했죠. 오징어 채 낚기 낚시 어구를 기계 동력의 힘으로 끌어올리는 자동조상기가 없고, 선상 작업 대부분을 맨손에 의지하던 열악한 때여서 채 낚기 어선 1척이 평균 30명 이상의 선원을 태우고 조업했기 때문에 인명피해가 더욱 컸던 사고였죠. 너무 많은 선원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어 한동안 동해안에서는 심각한 선원 구인난이 빚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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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항은 아시다시피 석탄 시멘트 이게 주민들한테 끼친 영향이 많습니다. 제가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마는, 석탄 하역 작업을 할 때 석탄이 많이 날려 민원이 많아서 주민들이 볼 때는 아주 더티한, 말하자면 연탄을 많이 내는 곳이 항만이다. 항만을 운영하고 항만을 건설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계화로 바꾸는 것이 옳다 하여 아이비알디(IBRD) 차관사업 할 때 기계화로 다 바꿨습니다. 기계화로 바꿔도 하역 작업에는 연탄이 날아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어요. 그 연탄을 가져가는 연탄이 못 날아가게 하기 위해서 위에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 건물이 지금의 건물로 지금 남아 있죠. 그 건물로 묵호는 비산이 남지 않고 7, 80프로(%) 이상은 먼지를 잡은 것으로 보고 있죠. 그곳에서 작업하는 것은 날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이후에 많이 좋아졌고 주민들의 민원도 많이 해소됐어요. 항만과 도시는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홍콩이나, 싱가포르, 상하이처럼 큰 항만을 보면 배후지가 다 같이 휘황찬란한 도시가 형성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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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만에는 도시가 있어야 되고, 도시가 발전하려면 물류가 있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하나 배후 수송로가 있어야 되고, 했는데 묵호항과 동해항은 조금 달라요. 앞으로는 개선돼야 되겠지만, 지금까지는 벌크(bulk) 카고(cargo)라 해서 화물 산화물을 처리하는 항만이기 때문에, 수입은 적고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는 항만이지만, 배후지 개발은 도심지 하고는 좀 떨어진 그런 시설로 돼있었어요. 앞으로 묵호항 2단계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면 그렇게 발전해 가야 되겠지만, 동해항도 컨테이너화를 시켜 거기서 부가가치가 떨어져 지역에 도움이 되고, 배후 도시도 발전할 수 있는 것들이 돼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보고, 고속도로가 이제는 그때부터 만들었던 고속도로가 그때 동해나 묵호항에 많은 영향을 미쳤죠.
Q_면담자 : 동해항이 개발되면서 물류도 나눠지고 묵호항이 뭐랄까 역할이 조금 축소되지 않았나?
동해항 굴입식 항만으로 만들어
A_구술자 : 바뀌죠. 완전히 바뀌었죠. 동해안 개발은, 국가기관 산업의 일환으로 추진했는데 항만은 개발을 해야 되겠고, 항만 개발할 돈은 없고 장비도 없었어요. 그래서 거기는 포항 신항하고 같이 건설부에서 포항하고 울산, 동해, 북평 하고 세 군데 조직을 만들어서 특별 건설사무소를 만들어서 건설부에서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해양수산부에서 관리를 하지 않을 때입니다. 건설부에서 직접 했는데, 동해항 개발은 어떻게 이루어졌냐 하면, 쌍용시멘트가 날로 커지고 동양시멘트도 많이 커지고 석회석으로 쓰는 철광 제철소가 있으면 반드시 석회석이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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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에 들어가고 그 화물이 전국을 가야 되니까, 화물이 다 묵호항, 삼척항해서 갔는데 이것만 가지고 감당이 안 되니까 새로운 항만을 만들자 해서, 북평, 묵호, 옥계 이 세 개항을 개발하는 안으로 검토해서 그중 하나가 북평을 개발하는 것으로 돼서, 제가 알기로는 1973년도부터 이제 시작을 했는데, 왜 시작했느냐 하면 자료를 보니까, 항만을 만드는 방파제를 만드는, 배를 콘크리트 배를 만들어야 되는데 콘크리트 배를 들을 장비가 없습니다. 이천톤(2000t)이나 되는데, 이천톤(2000t)이나 되는 장비가 없어서 못 하니까 모래 위에다 큰 배를 콘크리트 배를 만들어요. 그 콘크리트 배를 만들어서 이 콘크리트 옆을 모래를 이렇게 사사 살살 긁어내면 어차피 여기는 부두를 하기 위해서 파내야 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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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파면 이 콘크리트 배가 물에 떠요. 요걸 사상 모래 사(沙) 자 모래 사상 진수법이라고 해서 그 콘크리트 함을 만들어 모래를 굴착하고 어차피 파야하니까, 모래를 굴착해야 되며 항만을 준설하고. 거기에 맞는 케이스는 가서 이제 거치하고, 일석이조이기 때문에, 조사를 해보니까 모래 깊이가 충분하게 돼서 항만 하기에 입지가 좋아 다른데 항만은 매립을 해서 항만을 만드는데, 부산이나 인천은 다른데 전부 다 매립을 해서 항만을 만드는 특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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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항은 옛날엔 북평이라고 했는데 동해항은 굴입식으로, 현 육지를 굴착해서 바다를 만드는 것이 전 세계 공학적으로 처음 적용됐다. 시작은 이론적인 것만 있었는데 실질적으로 처음 적용해서 이후로는 두바이도 그렇게 하는 데도 있고, 다른 데서도 적용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굴입식 항만을 시작하게 된 거죠. 그다음에 케이슨이라는 이천톤(2000t)을 들 수 있는 장비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그다음 사업부터는 이천톤(2000t) 짜리가 와서 크레인이 들어가지고 거치하는 방법을 써서 동해항을 굴입식 항만으로 만들었지요.
인터뷰_ 구술 소감, 가치, 바람
처음 동해문화원으로부터 묵호항의 역사에 대한 구술사업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저는 망설여졌습니다. 구술이라는 용어도 낯설고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이해를 못 했어요. 그러나 묵호항의 역사라면 동해지방해양수산청장을 지낸 저로서는 묵호항만시설의 발전사를 연구한 자로서 묵호항의 과거 자료를 예전에 발굴해 놓은 자료가 있기에 쉽게 생각하고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묵호항 발전사는 제가 해양수산부에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주요 항만의 역사 관련 자료를 수집 발굴하여 보관하고 있는 자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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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첫날 구술사인 김은정 님과 처음 이야기해 본 즉 구술자 본인의 출생과 집안내력 성장과정과 묵호항의 인연에서부터 묵호항에 얽힌 사연을 연도별 사건별로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게 되더군요. 인터뷰 장소에는 많은 촬영 장비와 많은 인원이 있어 당황도 하였답니다. 저의 조부 홍정현(洪政鉉)님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송시열-송병선 학맥을 이어받은 문인으로 자는 우팔, 호는 강암(불이재)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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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로는 “강암유고”를 남기신 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아버님 사업 실패로 인한 가계가 무너진 후 그 업적을 이어받지 못하고 삶을 이어 왔는데 그 집안의 얘기를 하라고 하니 저의 삶의 과거를 전부 다 뒤돌아보게 되었어요. 저는 어려운 시절임에도 굴하지 않고 공업고등전문학교(5년제) 졸업하고 건설부 국가공무원이 되었고 직원에서 지방해양수산청장까지 근무하였으며, 야간에는 공부를 계속하여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까지 받으면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이번 기회에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번 구술 기회가 아니었다면 제 스스로는 일대기를 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번 구술이 저에게는 매슬로우의 욕구이론 중 자아실현 욕구를 이룬 듯 그 깊이가 깊게 감격하고 있습니다.
묵호항은 일반적으로 조용한 해변 마을이었어요. 일제 강점기인 1929년 강원도의 요청으로 조선총독부에서 강릉군 망상면 묵호진리 앞 해안에 1930년~1932년에 방파제 214m를 축조하고 철탑 등대 1기를 설치하게 되면서 어항으로 탄생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묵호진항에서 묵호항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군사시설로 개발하기 위하여 1937년~1940년까지 방파제 550m를 연장 축조하면서 무역항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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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묵호항의 역사 자료는 “국가기록원”에서 제가 발굴하여 학술자료로 이용하고 있었는데 이번 구술하면서 그 내용을 자세하게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묵호항 시설물의 발전역사에 대하여 구술하였는데 다른 분들의 구술내용을 모아보면 묵호항 문화의 흐름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번 구술사업은 기억 속으로 사라질뻔한 묵호항의 문화적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사업이라 생각되오며, 이번 사업에 제가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게 너무나 행운이고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묵호항은 조그만 어촌에서 출발하여 우리나라 산업발전 초기에 기초가 되는 석탄, 시멘트 출하부두를 보유한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발전하였으나 1979년 동해항이 대형항만으로 개항되면서 묵호항은 무역항의 기능이 축소되었으므로 이제는 관광항, 국제크루즈 항만으로 발전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또한 묵호항 배후부지는 과거 무연탄, 시멘트 관련 시설부지를 항만 재개발사업(2단계)을 조기 추진하여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끝으로 구술사업은 앞으로도 많은 지역의 숨은 구술 내용과 역사 사례를 구술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으로 발전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록가 김은정 씨는 동해에서 유년을 보냈고, 중국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중국어 강사와 방과 후 강사 활동 등 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였고, 글쓰기, 독서 모임 활동을 통해 생활사 기록가라는 일을 알게 되어 활동하게 됐다. 묵호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서 구술자의 이야기기 흥미진진했다. 묵호를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이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 않았나 싶다. 또한 구술을 하며 '감사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하셨던 구술자님을 통해 감사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