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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10. 2023

동해의 자랑, 영화감독… ’홍파‘

15.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홍파, 한국 대표 감독으로 ‘구술사’ 완료
홍파 감독은 동해 북평 출신으로 당시 북평극장을 통해 영화를 즐기며 감독을 꿈꿔왔던 인물이다. 동해 출신 소설가 홍구보(홍준식 동해문화원 이사)의 친형이기도 하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19년도 한국영화사 원로 영화인 구술채록사업 생애사 ‘홍파’ 편을 펴냈다. 한국 영화 발전에 이바지했던 영화인 중에 영화 행정의 김동호 위원장, 시나리오에 송길한 작가, 영화배우 대표 김지미, 감독 대표로 홍파 감독을 선정해 구술사를 채록하였다. 이 구술사는 한국영화사를 연구하는 후학이나 영화인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활용할 책이다.


네 분 중에 강원도 동해 출신의 홍파 감독의 구술사를 통해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우리 지역사와 영화작가가 되기까지 성장과정을 정리했다. 홍파(본명 홍정식)는 1942년 북평읍 북평장터에서 태어났다. 직계 조상은 울진 포만호 겸 현령(1594)을 지낸 홍학의 13대손이다. 홍학의 10대손인 가은 홍재문은 삼척학교에서 도훈장을 역임했고 봉정마을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유림들과 '금란계'를 결성하여 초대 계수로 추대되었다. 부친 홍순하는 일본에서 제과학교를 다녔고 제과점, 공무원, 농협조합장, 과수원 농사를 짓고 모친은 정미소를 운영하며 5남 1녀 자식들 교육에 힘썼다. 홍파 구술은 다음과 같다.

홍파 감독
 6.25 전쟁, 모포로 옷 만들어 설빔으로 입던 시절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가 발발하고, 1.4 후퇴 때는 부모님을 따라 울진까지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다. 인민군 점령 당시에는 동해안 곳곳 초소에서 인민군들이 바라로 지나가는 미군 군함에 사격을 해댔어요. 그러면 군함에서 육지를 향해 함포사격을 가했는데, 읍내 초가에는 불이 났고 군데군데 있는 함석집 지붕에는 번쩍번쩍하는 파편이 박혀있었죠. 국군이 남쪽에서 올라오며 북진할 때, 우리는 신작로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었어요. 어떤 부대는 며칠씩 머물기도 했데. 인민군들이 생활했던 집을 향해 사적을 했어요. 그 집들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 가옥으로 대부분 이층이나 마당이 넓은 집이었어요. 사격하는 군인들의 살기 어린 눈 빚과 충혈된 눈, 귀가 먹먹한 총소리, 초연 냄새는 어린 기억으로 남아있죠. 훗날, 월 남전 초연은 마치 고향의 냄새처럼 느 껴졌지요. 또, '색색이'라는 미군 비행기들이 '북평역과 철교를 향해 폭격했는데, 불기둥과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어요. 우리는 인민군을 향해 사격하는 줄 알고 박수를 쳤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인민군 수송을 차단하기 위해 폭파한 것이었지요. 전쟁 중에 우리 집과 큰집에 국군이 머무르다 떠나갈 때, USA라 찍힌 모포를 주고 갔어요. 어머니는 재봉 솜씨가 좋아 이걸로 웃을 만들어 설빔으로 입혔어요. 또, 학교에 가면 구호물자인 분유를 나눠줬어요. 집에 가져가면 어머니가 도시락에 넣어 쪘는데, 돌멩이처럼 딱딱해져 망치로 두드려 그걸 입 안에 넣고 사탕처럼 녹여 먹었지요. 당시에도 학년을 마칠 때 성적표와 함께 '상장'을 줬는데, 종이가 귀하다 보니 일본인들이 쓰다 버리고 간 줄이 쭉쭉 그어져 있는 양면 괘지였어요. 우리 집 앞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차에서 부상한 고아를 짐 내리듯이 내려놓고 갔어요. 아이들의 찢어진 옷 속에는 이가 득실득실 기어 다녔고, 얼굴은 세수를 못할 상황이었어요.
아버지는 '새 농촌' 마을을 만들고!
전쟁 전까지 남녀 칠 세 부동석이란 문화가 어린 우리한테 있었는데, 교과서에 '영희야, 영희야 이리 와 나하고 놀자. 바둑 아, 바둑아....: 이런 서구식 글이 있어, 우리 문화가 얼마나 격변했는지 단적으로 말해주지요. 태백산맥 건너편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문화적 단절을 겪으며 지내다 장터 천막가설극장에서 대한뉴스를 봤는데 국부인 이승만 대통령을 박사라 불렀어요. 우리는 대통령을 왜 박사라 불렀는지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지요. 또, 인민군이 점령했 을 때는 '김일성장군' 노래도 배우고 '옛날 모택동이 몇만 리'하면서 공산당에 대한 공부도 했어요. 인민군이 평범한 민간인들에게 왜 피해를 안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훗날에야 알게 되었지요. 전쟁이 끝나고 중학교 2학년 때(1958년에) 나에게 큰 사고가 생겼어요. 당시 아버지는 인제에서 농촌지도소 소장을 할 때였어요. 전쟁 직후 아버지는 농사도 예전 방식으로는 안 되고, 특용작물이나 대형화된 양계, 양돈을 해야 잘 산다며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새 농촌‘이란 마을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형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동생들이 성장하자 교육비가 늘어나, 직업을 공무원으로 바꾸고 정미소를 만들어 어머니에 게 운영을 맡겼어요. 나는 방과 후에 어머니를 도와 정미소 일을 하다. 어 느 날 그만 오른손 검지 한 마디가 피 댓 줄에 다치는 사고를 당했어요. 붕대를 감고 6개월 이상 않았는데, 수재 소리 듣던 나는 공부에 흥미를 잃고 말았어요. 통증 때문에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고, 대신 레인보우 무지 개 rainbow라는 문학 서클에 가입해 매일 도서실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졌 어요. 그러다 서울에 '서라벌예고'가 개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나는 그 학교에 가고 싶어, 정미소에서 돈을 조금씩 훔쳐 가출을 시작했어요. 몇 번이나 서울에 기차를 타고 가서, 종암동에 있는 서라벌예고 부근에서 배회하다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이런 가출은 강릉에 있는 농고로 진학해서도 되풀이했지요. 이때는 형이 서울대학교 공대에 입학해 다니고 있던 터라, 나에 대한 부모님 시선은 절망적이었 죠. 형은'축, 서울대 입학'이란 플래카드까지 걸릴 정도로 자랑스러웠는데, 나는 안 하고 쓸데없는 책이나 보고, 가출이나 했으니까요. 결국, 2학년을 마치고 고향 북평고등학교로 전학했어요. 그래도 고3이 되자 대학 진학은 하고 싶어. 심사숙고 끝에 서라벌예술대학으로 목표를 정했어요. 당시에는 2년제 전문대학이었고, 존경하는 김동리, 박목월, 황순원 교수님이 계셨거든요. 그래서 절박한 심정으로 김동리 선생님께 편지를 썼어요.'어린 시절에 손가락을 다친 이후로 독서에 빠져드는 바람에 진학 공부는 못 했고, 장래희망이 문학입니다. 교수님 지도를 받고 싶은데, 언제 좀 이끌어 주십시오.라는 골자의 장문 편지를 보냈는데, 다행스럽게 '한 번 찾아오라!라는 답장이 왔어요. 그 회신을 받고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홍파 각본영화, 석양에 떠나가다(1973), 숲과 늪(1975), 사람의 아들(1980),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81)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입학하고
월남 참전 지원병 모집에도 참여하고!
시골의 어린 한 무지랭이가 존경하는 작가 편지를 받았으니까요. 그 길로 서울에 올라가 약속 장소인 '돌체' 다방으로 향했는데, 그만 기차 시간이 늦어 지각하는 실례를 범했어요. 겨우 전화를 걸어 죄송하다 했더니. '허허. 이 친구. 학교에 얘기해 놓았으니 찾아가게.' 라 말씀하셨어요. 당시(1963년) 추천제도가 있어 이걸로 수속을 밟아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보니. 나 같은 학생들이 전국에서 모여 있었어요. 공부는 못 하지만 글과 말, 술을 잘 마시는 터라 저녁이 되면 동숭동 대학로에서 서울대 작가 지망생 들과 조인트 해 밤새도록 토론을 하고 그랬지요. 자부심이 커서, 서라벌 다닌다는 콤플렉스는 전혀 없었어요. 봄이 지나갈 무렵, 김동리 교수가 '너희들 이제, 신춘문예 응모할 것 아니냐?' 문창과 학생이라면 떨어지더라도 한 번씩은 응모할 것 아니 나? 내가 심사위원 하면서 제일 먼저 버리는 작품이 철자법 틀린 것부터야. 왜냐하면, 철자법 모르는 자가 쓴 글을 왜 읽느냐. 이거지. 창작은 공 부 잘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 이 게 3대 요소다. 라 가르쳐주었어요. 당시 소설과 시를 쓰는 사람은 많아도 시나리오는 거의 무풍지대였어요. 나는 시나리오를 쓰기로 마음먹고. 졸업하기 전 당선을 목표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당시 각 신문사 신춘문예에서 시나리오는 동아일보만이 뽑았어요. 시나리오 작법이나 형식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신봉승 씨가 변역해 출판한 일본 시나리오작법이 유일했어요. 결국, 당선되지 못한 채 졸업(1964)과 동시에 군에 입대했어요. 신병교육을 끝내고, 27사단에 복무하는데 어느 날 인사처에서 나를 부르더니 행정병으로 근무하라 했어요. 알고 보니, 입대 전에 '아리랑'이란 영화잡지에 「새벽에 문이 열리다」라는 반공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걸 인사처에서 읽었기 때문이었어요. 1년쯤 지났 을 때, 월남 참전 지원병을 모집했어요. 나는 전쟁 경험을 한 번 해보는 게 시나리오 쓰는데 좋지 않겠나.라는 문학적 발상으로 지원했어요.
신춘문예도 거뜬하게 몇 차례 당선되고
3개월 훈련받고, '정훈병 병과를 받고 맹호부대 1차로 선발되어 인전에서 월남은 로 가는 배를 탔어요. 전쟁터에서 제일 처음 놀란 건 베트콩이나 총탄이 아니라 미군들의 식사와 더위였어요. 정훈병이라 미군부대에 자연스럽게 취재차 갔지요. 그런데 미군이 먹는 C-레이션(ration, 미군 전투식량)은 미국의 중산층이 먹을 정도의 식사라는데, 온갖 고기 종류가 있었어요. 또, 놀란 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없었던 캔 맥주였어요. 미군들은 이 맥주를 에어컨 앞에 차곡차곡 세워두었다가, 따개 앞에 소금을 뿌려 마셨어요. 국력과 문화의 차이를 심각하게 느꼈지요. 게다가 마리화나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고 수시로 껌을 씹었어요. 헬리콥터가 전투병을 실으러 오기 전에 줄을 쭉 서 있는 데, 소대원들이 아무렇지 않게 껌을 씹었어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소 도축장에 끌려온 소가 침 질질 흘리면서 되새김하는 장면을 연상했어요. 월남에서 지낸 10개월 동안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어요. 그 후 작가생활 하는 데 세 가지를 얻었어요. 하나는 월남에서 고향 후배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월남참전기'란 부제를 붙여 <우리들만의 노래>를 발간했어요. 출판사는 훗날 대형 출판사가 된 초기 민음사였어요. 두 번째는 월남전을 비판하는 글을 모아 월간지 신동아, 논픽션에 응 모 했는데, 차석으로 당선되었어요. 세 번째는 제주도 출신의 화가 친구와 친해졌는데. 그가 직접 겪은 것처럼 말한 내용을 「가장 평화스러운 날의 자살」이라 가제를 붙여 시나리오를 썼어요. 훗날 말복이란 제목으로 바꾸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되었어요. 그런데 발표 일주일 후 표절작품으로 당선이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어요. 친구가 소설 내용을 마치 자기 경험처럼 이야기했는데, 마치 시추에이션 드라마처럼 함정에 빠진 것이죠. 나는 이 불명예를 벗어나기 위해 가을만 되면 고향 북평으로 내려가 신춘문에를 준비했어요. 고향집 행랑채에서 낮에는 자고, 밤 12시부터 새벽까지 초록색 잉크를 넣은 파카 만년필로 원고지를 한 칸 한 간 메워갔어요. 새벽 4시쯤 되면 잠이 쏟아지는데, 잠 깨 우는 고마운 동물이 있었어요. 바로 천장의 쥐였는데, 이놈들이 드르륵드르륵 뛰어다니며 소리를 내요. 처음엔 손등으로 천장을 툭툭 쳐서 쫓았지 만, 나중에는 작살을 준비해 잡기도 했어요.
우리들만의 노래, 1976 민음사, 사진_동해문화원 DB
거듭 당선 신춘문예로 명예 회복
영상시대 설립, 영화운동 시작!
드디어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몸 전체로 사랑을'이 당선되었어요. 이듬해에 , 영화평론 '영화를 보는 눈, 1972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사람을 찾습니다', 1977년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가 당선되어 명예를 회복했어요. 그 후. 험한 영화판에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뛰어들었어요. 1973년에'몸 전체로 사랑 을로 감독으로 입뽕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영상시대'를 설립하고 영화운동에 참여하며 비판적인 자세를 잃지 않고, 새로운 시도로 한국영화 발전에 미력하나마 일조했지요. 석양에 떠나가다. '숲과 늪, '사람의 아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수십 편의 각본을 썼고, '묘녀', '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외출 등을 연출했어요. 1988년부터는 영화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해. 외침과 속삭임,, '지저스 크라이스트 주니어 1.2. '소설 국화와 칼• 등의 책을 발간했지요. 나는 서울에 살아도 늘 고향 서편에 우뚝 서 있는 두타산처럼 품위를 지키며 영화감독, 작가, 평론가로 살아았다고 자부하죠."

감독은 1975년 한국영화 66년 만에 발족된 최초의 영화예술화 운동이라 할 만한 ‘영상시대’의 핵심 멤버로 참여한다. 1975년 여름, 남산의 한양스튜디오 지하에 다섯 사람이 모였다. 영화감독 4인 하길종, 김호선, 이장호, 홍파와 변인식 영화평론가였다. 훗날 영화계를 이어가는 계보의 중심이 되고 있다. 홍감독은 동해 북평에서 성장하면서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나요?라는 구술 질문에 “북평에서 극장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50년 넘는 어린 시절 극장에서 ‘이수일과 심순애’, 액션물, 빨치산 영화 등을 많이 봤다.”라고 했다. 한편 북평서 홍파 감독이 즐겨 찾던 극장이라면 그 극장은 북평극장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_ 이야기가 있는 동해,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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