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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11. 2023

동해 용산서원, '학규현판' 이야기

16.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용산서원龍山書院, 학규현판

용산서원龍山書院은 조선 숙종 31년(1705) 이세필이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동해 쇄운리에 당시 부사의 뜻을 같이하는 유림 28명이 모여 세운 서원으로 처음에는 서당으로 운영했다. 1719년 제자와 유림들은 구천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서당과 사당을 증축해 용산서원으로 승격했다. 학당 입학도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 문벌의 고하, 나이 제한 없이 인품이 단정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입학을 허락했다. 구천 이세필은 학생들이 서당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자 흐뭇한 마음으로 피나무 판에 학규 21조(강원도유형문화재 제78호)를 손수 쓰고 판각해, 학사 벽에 걸어 수시로 읽고 학규를 지키도록 격려했다. 또, 구천은 시간 나는 데로 학생들에게 강설하여 학문의 길로 인도했다. 학규 21조는 지금 읽어 봐도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규칙이었다. 학규현판의 학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규현판
용산서원, 학규현판, 사진_ 동해문화원 DB
학규 제21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8호
1.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고 학문을 하는 뜻은 의리를 밝히고 수신을 하여는 것이다. 글자를 배워 기록하고 보는데 쓰고, 공부하여 명예와 재물을 얻으려는데만 있는 게 아니고, 배우지 않으면 마음이 막히고 아는 것이 없이 때문이다. 공부와 수신은 대강 알아서 시행하는 게 아니고 깊이 연구해 분명히 알아야 중용을 얻을 수 있다.
2. 공부하는 방법은 뜻을 세우고 공경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하며 게을러서는 안 된다.
3. 공부하려는 사람은 먼저 공부하겠다는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4. 아침 일찍 일어나 의관을 바르게 한 후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신 통일을 한 후 공부해야 한다. 글자 한자, 글귀 하나라도 정독해야 한다. 뜻이 통할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
5. 책의 순서를 정해 차례로 하고, 다 읽으면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하라.
6. 우주 만물의 이치와 도를 알아야 한다.
7. 공부할 내용을 벽 위에 붙여놓고 수시로 보고 외워라.
8. 일동일정一動一靜 을 예칙에 의해해라.
9. 큰소리로 말하지 말고 간략하게 무게 있게 말을 해라.
10.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관가의 출입을 삼가라.
11. 연장자에게 거쳐를 양보하고 10세 이상 출입할 때는 반드시 기립하라.
12. 식사는 나이 순서대로, 맛있는 것만 먹지 말고 소식하라.
13. 접대할 때는 공손하게 성심성의로 하고, 해학이나 조소를 하며 상대를 비방하지 말라.
14. 동문 간에는 의리로 대하고 교의로 정분이 두텁게 하고, 질병이 있을 때는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15. 독서할 때 의심 나면 서로 토론하고, 글을 지을 때는 정성을 들여 짓고 글씨를 쓸 때는 정서로 쓰고 문이나 벽에 써서는 안 된다.
16. 아침부터 잘 때까지 경서를 읽고, 의리를 강론하고, 글을 지을 때는 반성 조심해라. 밤이 깊으면 취침해라.
17. 서당에 있을 때처럼 귀가해서도 공부하라.
18. 서당 입학생은 용모가 단정하고 준수하여 배우려는 의욕이 있는 자여야 한다.
19. 서당에 입학한 자는 이 학규를 꼭 지켜야 한다.
20. 공부 잘하는 한 사람을 택해서 '장의'로 하고 나이 적은 두 사람을 뽑아 한 사람은 '색장', 또 한 사람은 '유사'로 정한다.
21. 하인들을 잘 보살펴 마음이 상해 이반 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서원 철폐령, 삼척향교 재산이관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용산서원에서 관리하던 재산을 삼척향교로 이관했는데, 당시 재산 중 논이 45필지 81 두락(마지기), 밭 15필지 117 두락이었다. 일 년 총수입이 64석 5두 당시로 보면 많은 재산이었다. 서원을 설립한 후 150여 년 동안 많은 일이 생겼다. 화재로 서원이 소실되자 구천의 둘째 아들인 강원도관찰사 이형좌, 외손자인 경상도관찰사 박문수가 자금을 출연하여 사우 6간, 명륜당 등을 중건했다. 또, 구천의 장남인 관찰사 이태좌가 학자 전을 희사하였다. 여러 부사와 계원들이 담장과 행랑채를 보수하고, 강당을 중수하고,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동쪽에 심었다. 그 후에도 중건과 수리를 반복하며 용산서원을 지켜왔다.

삼월 삼짇날, 삼진다례제 올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전국의 서원과 함께 철폐되고, 학위 전은 향교에 이전시켰다. 그 후, 용산서원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긴 잠을 자야만 했다. 그동안 갑오경장, 한일합방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6.25 동란 등의 대변혁이 있었다. 1953년, 더는 서원을 방치할 수 없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지역 원로 홍순황과 구천의 문인 후원들은 계를 조직해 자금을 모았다. 이듬해 이세필의 '홍학비'를 동편 산기슭에 옮겨 세우고 3월 삼짇날을 기해 '삼진다례제'를 매년 올리고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구천 이세필의 위패를 모셨다. 그러나 1984년 율곡과 우암의 위패는 폐위하였고 구천 이세필 위폐만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천 문인 28인의 후손들은 협의 끝에 '용원경현회'를 조직해, 용산서원 운영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 후 1966년 대대적으로 서원 보수에 들어가 본원 1동과 행랑채를 신축하고, 2007년에는 강학사를 신축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용산사 1동, 서재 1동, 용산서원문 등이 있다.


용산서원 원장을 역임한 최준달(남, 98)씨는 종중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구천 선생의 치적을 기렸다.

" 아! 선생은 참으로 위대한 분이시다. 당시에도 탐관오리가 판을 치고, 300여 년이 지난 현세에도 부정한 공직자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무연고지인 이곳 목민을 위하여 녹봉을 희사하고 교민함으로써 예절과 도덕이 살아있는 고장으로 승화시켰음은 참으로 그 은혜와 여산 여해와 같다 하겠다.(중략) 163년 긴 세월 속에 교회의 목적을 다함으로써 많은 학자를 육성하여 문학과 서도에서도 큰 맥을 이룩하여 사향에서 부러움을 받았다. 그 증과로 과거 읍 단위이던 북평 지역에서만 현존하는 효열각이 22개소, 각 씨족의 승조전당인 추원재가 9개소, 선비들의 풍류와 사회의 장인 정자만도 5개가 있어, 서원 소재지의 특색을 전수하여 무언 교훈을 삼게 하였다.
2013년 7월"

또 구산선생 추모회 이상배 박사는 용산서원 묘정비명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중략) 아! 지금처럼 방향을 일고 헤매는 때에 선생과 같이 고매高邁한 스승이 계신다면 치자治者는 근검하기를 애쓰고, 생민은 분수를 지킬 것이니 이 아니 청평세계淸平世界인가. 시대가 혼탁할수록 더욱 숭모의 정이 사무치는 도다. 귀양살이 후진 삶 속에 도학을 전하였고, 대기근 구휼救恤하며 학문을 교수했네, 사 척 궁벽한 땅 박순한 양인들에게 녹봉을  다 받쳐 서실 짓고 훈도했네, 스승이 가신 뒤에 사모의 정 사무쳐서 임의 진상 걸어놓고 생제사를 올렸었고 삼백 년 긴 세월 한결같은 경모의 뜻 예학의 종장에게 있어야 할 제자였네,
2014년"
용산서원, 사진_동해문화원 DB
참고문헌_이야기가 있는 북삼,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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