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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12. 2023

남한 최초 선철 공장, 삼화제철소

17.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쇠는 산업의 쌀

전쟁 막바지 시절인 1943년 건설된 ‘삼화제철소‘ 탄생은 1940년 미국의 금수조치에 대한 대응이었다.  쇠는 산업의 쌀'이라 불려질 정도로 근대 산업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1961년 9월 23일, 5.16 혁명에 성공한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가동과 중단을 반복하던 '삼화제철소'에 군복을 입고 방문했다. 쇠의 중요성을 인지한 박 의장이 제3 용광로의 기화식에 점화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신문에 실린 기화식 점화 사진에 많은 의아심을 가졌다.‘ 의장으로 할 일이 태산일 텐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 영동지역에 있는 공장까지 왔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기점으로 기업인들은 박의장이 쇠의 중요성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데 깜짝 놀랐고, 쇠가 기간산업의 중추가 되리라 예측했다.

삼화제철 용광로 기화식, 1961년 박정희 의장_KTV 캡처

당시 우리나라는 '동국제강', '연합철강', '인천제철 ', '한국철강', 등이 철강 제품들을 소량 생산하고 있었다. 이 공장들은 삼화제철처럼 철광석을 녹여 선철을 만드는 재선과정이 아니라, 고철과 선철을 녹여 반제품인 강철을 만드는 제강과정의 공장이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여 철강 관계자로부터 종합 제철소 건설 구상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귀국 후 뜻을 같이하는 박태준 사장에게 종합제철소 건설을 맡기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1968년 '포항제철'을 착공한 지 5년 후인 1973년, 용광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본 국민들은 만세를 외쳤다. 1983년은 광양제철소를 건설하고, 1998년에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우뚝 섰다. 2002년은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회사명을 포스코(POSCO)로 개명해, 철강산업 외의 다양한 사업에 도전하며 사업 다양화를 시도하고 있다.

고로란? 우뚝 솟아 높은 곳에 있는 가마

포스코를 방문하면 '포스코 역사박물관'이 있는데 그 앞에 '삼화제철소'의 제8호 '고로'가 이전되어 우뚝 서 있다. 동해시 쇄운리에 있어야 할 고로가 왜 이곳에 와 있을까? 포항으로 이전되기까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제철소 역사가 잘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시절, 1930년대부터 일본은 대륙 침략의 야욕으로 군비확장과 군수품 개발에 혈안이었다. 그중에 차량, 군함, 비행기, 대포 등 모든 군수품의 필수 재료인 철 생산을 위해 '흥남제철소', '청진제철소', '삼화제철소'를 건설하였다. 그중 삼화제철소는 전쟁 막바지인 1943에 건설되었는데, 이는 1940년 미국의 고철 금수조치에 대한 대응이었다. 급기야 일본은 철 생산의 전통적 방법인 용광로에서 녹여 선철을 만드는 제철소를 건설할 수밖에 업었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부터 제철소를 운영했던 일본인 '고레가와긴조'를 설득하여 1943년 4월에 '고래가와제철소를 건설하였다. 용광로를 '고로'라 부르는 이유는 '우뚝 솟아 높은 곳에 있는 가마'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방이 되면서 삼화제철소로 부르게 됨

벽돌을 굴뚝 모양으로 쌓아 위에서부터 철광석, 코크스, 석회석을 넣고, 옆의 20여 개 구멍으로 800도의 열기를 불어넣으면 위에 있던 코크스가 연소하면서 2000도의 열이 발생하여 철광석을 녹인다. 철광석의 철 성분이 녹아 아래로 물처럼 흘러내리는데 이것이 선철이다. 이 선철을 다시 압력을 가하는 압연공정을 고쳐 철관, 강철, 스테인리스 등을 만든다. 삼화제철소는 선철을 만드는 공정만 있었고 철강공장은 북한 쪽에 있어 기형적인 생산 구조였다. 해방이 되자 '고래가와체철소는', '삼화제철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제철소 소재지가 '쇄운리' 일대인데 왜 '삼화'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는 제철소가 쇄운리에 들어서게 된 직접적 계기가 가까운 삼화에 철광석이 매장된 철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광석을 캐기 위한 '삼화철산'이 1943년에 설립되자, 일본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삼화로 왔다. 사택과 학교, 목욕탕을 짓고, 철광석을 가시랑 차에 싣고 제철소까지 운반하기 위해 철로를 개설했다. 삼화출신 배선남(전 동해문화원 4대 원장 1997~1999) 전 원장은 '청타자서전'에 삼화철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1943년 12월에 삼화철산이 삼화리, 빈내골, 내금곡이, 이기리 등지에서 자철광석을 채광하여, 삼화제철에 공급하였다. 삼화철산은 일본인이 직접 경영하였으며 본관 사무실은 삼화리 430번지(현 쌍용 아파트 사 택지)이고 각종 배급소(쌀, 알랑미 쌀, 강랑가루, 피복, 신발, 부식, 고기류)와 차량정비고, 제재소, 창고 등은 삼화리 52, 431, 432번지 일대이다. 왜인사택(고급)은 삼화리 305번지 속칭 감나무골에 위치했다. 우리나라 사람의 사택은 삼화리 605, 606, 607번지 일대의 양지사택이라 했고, 삼화리 592, 593, 산 27번지 일대는 음지사택이라 불렀다. 다 까다 사택은 삼화리 324, 325, 337번지 일대이며 삼화리 491번지는 변전소 자리(현 쌍용연수원)이다. 채광방식으로 노천채광은 전혀 없었고, 항도채광법을 사용하였으며, '빈내골 양지 음지향', '삼화 양지 음지향', '금곡 양지 음지향' 등 4 지구로 채광하였다. 동해시에서 관광용으로 개발하려는 항도는 '삼화음지향'에 해당한다. 삼화에서 쇄운리 제철소까지 광석을 운반하던 가시랑 차 선로가 홍월평 남쪽, 지금의 삼화 철길이다. 8.15 광복 후 대한철광이 인수하여 재개발했으나 철광석의 품질이 나빠 폐광되었다."

막대한 투자를 한 삼화철산의 철광석은 기대와 달리 철 성분이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4개 지구에서 채광을 했지만 기대 이하의 품질로 최종 결정됐다. 전쟁 막바지에 자금이 쪼달리는 형국이라 더는 적자경영을 할 수 없게 되자, 일본인들은 삼화철산을 폐광하고 ‘양양철광’으로 이전을 강행했다. 양양철광은 1938년부터 소규모 개발을 진행하다가 1941년부터 태평양전쟁의 군수품을 만들기 위해 본격적으로 채광한 철광석을 속초항에서 일본으로 싣고 가던 터였다. 양양의 철광석을 묵호항으로 이송해 하역하고, 다시 기차에 실어 북평역으로 향했다. 역에는 1944년 4월에 준공한 1.8km의 '북평선'이 있어, 공장까지 철광석을 쉽게 수송하였다. 이 철로는 일본에서 선적해 온 코크스도 묵호항역에서 수송했다. 이렇듯 '고레가와제철'은 겨우 겨우 철광석을 확보해 선철을 생산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전국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그러나 전산기업인 '삼화제철소'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혼란의 해방정국에 마땅한 경영자가 나타나지 않자 장기간 문을 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근로자들은 그동안 일하면서 배운 기술로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했다. 막상 가동을 시작했지만, 날이 갈수록 전력과 철광석 부족, 기술력 부족 등으로 정상적인 가동이 되지 못했다. 특히 일본인들이 핵심적인 제철기술을 한국인에게는 전수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양양철광에서 공장까지 철광석을 이송하는 물류비가 너무 많이 들었다. 다행히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은 국가에서 예산을 편성해 1만 톤 규모의 선철 생산을 목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1년도 못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또다시 가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연료비 절감을 위해, 무연탄 유연탄을 연료로 활용

전쟁 직후 1953년, 부흥사업비를 투자해 파손된 고로 8기 중의 3기를 보수하여 이듬해부터 가동을 시작했지만 석 달 만에 중단했다. 생산정 저하와 자금난, 연료난 등이 겹쳐 1957년까지 가동이 중단되었다. 전 후 복구를 위해 철강 공급이 절실히 요구되자, 다시 삼화재철의 대대적인 보수를 시작했다. 연료비 절감을  위해 1기는 국산 무연탄만으로, 또 2기는 무연탄과 유연탄을 혼합하여 선철을 생산했다. 1961년은 고로 3기를 보수하고 박정희 의장이 직접 참석해 기화식을 했다. 그 후 삼화제철은 위태로운 가운데에도 중단 없이 가동했지만, 1972년 낮은 경제성으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종합제철소인 포항제철이 가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낮은 생산성과 노후화 더 투자해서 가동하기에는 삼화체철소는 경제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초창기 삼화제철은 250여 명의 근로자가 근무했고, 쇄운리와 나안리에 사택이 있었다. 우수한 인력은 제철 기술을 현장에서 익히며 기술을 쌓아갔고, 현장의 근로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정식 직원 외에 특별한 기술이 없는 지역민들은 제철소의 하청회사에 다니며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먹는 게 변변치 않다 보니, 많은 힘이 요구되는 공장일에 지쳐 퇴근길에 탁주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특히 전천 남쪽의 근로자는 짐 금다리 대신 기차가 다니는 월동다리를 건너다 많은 사람이 참변을 당하기도 했다. 또, 당시 공장에서 일하던 지역민은 안전장구나 안전시설 없이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소설가 홍구보는 '똥장군 이야기'라는 단편소설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당시의 모습을 묘사했다.

"일정강점기에 가동이 시작된 삼화체철소가 가동과 중단을 반복할 때 인 60년대 초였다. 전기로, 용광로, 송풍에 특별한 기술이 없는 다수 사람들은 하청회사에 적을 뒀다. 그들은 고철을 종류별로 분류하거나, 철광석의 미분광을 주먹크기로 뭉치는 따위의 단수노동을 했다. 작업장은 검은 분진이 풀풀 날려도 마스크를 쓴다거나 장갑을 끼지 못했다. 그런 안전장구를 착용하는 자체가 당시에는 사치였다. 먼지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청 일 중 가장 힘든 일은 분광석을 소결광으로 만들 때 발생하는 큰 덩어리를 오함마로 깨는 일이었다. 늘 배고프던 시절이라 사람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두세 번만 오함마를 들었다 내리치기만 해도 입에서 단내가 나고 헉헉했다. 그러나 송정의 '전동석'장사는 오함마을 아이들 장난감 다루듯 했다. 한자이레서 스무 번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소결광을 처리했다."

 1973년이 되자, 선철과 고철로 반제품인 강철을 만드는 동국제강이 삼화제철을 인수했다. 삼화제철은 이미 기계설비의 노후화로 제철소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8기 중 7기의 고로로 석회서울 소성해 생석회를 만들었다.  이 생석회는 철강 정련을 하는데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국내 유일의 재선 공장인 삼화제철이 안타깝게도 부원료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91년이 되자 동국제강은 더 이상 거대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제철소에 미련을 버리고, 인천에 모기업을 둔 대동건설에 부지를 매각했다. 대동건설은 신흥 건설회사로 제철소 부지를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개발하는 계획을 세웠다.

삼화제철소, 사진_동해문화원 DB

1993년이 되자, 포항제철의 경영진이 잊고 있었다는 듯이 삼화제철소를 찾아왔다. 이들은 역사박물관을 건립하던 중 남한 최초의 삼화제철소가 철거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8기의 고로 중 한기를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한국인의 기술로 만든 제8호기 고로를 소중한 유물인양 정성스레 철거하여 포항으로 이송해 전시관 앞에 재조립했다. 이 고로는 2005년 11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번호 제217호로 등록되었다. 높이 25m, 지름 3m, wndfid 30t으로 포스코 정문 입구에 우뚝 서 있다. 일본이 전쟁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건설했지만, 해방 후에는 우리의 자산이었다. 가동과 중단으로 애를 태웠지만, 제철소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던 우리나라는 그 기술을 바탕으로 철강 수출 세계 제1위 국가가 됐다.

참고문헌, 이야기가 있는 북삼,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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