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브런치스토리로 떠나는 동쪽여행
1936년 화랑포 언덕에 세운 영호정
나라 잃은 서러움이 극에 달하던 1932년, 홍용학을 비롯한 동해 송정의 선비들은 송림계松林契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또, 만날 때마다 각자 가슴에 품은 뜻을 토로하고, 시문을 짓고, 풍류를 즐길 정자를 짓기로 뜻을 모았다. 비록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대처로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농사짓고 글을 읽지만 선비의 덕목을 일지 않았던 터였다. 4년 후인 1936년 6월, 드디어 화랑포 언덕에 영호정을 세웠다. 정자의 이름을 비출 영映, 호수 호湖'映湖亭'이라 붙이는데 이견이 없었다. 영호정에 앉으면 주위에 기형경관은 보이지 않았으나 풍요 자체가 그득해 선비의 기계를 살리는 데 충분했다.
남쪽으로는 두타산, 청옥산이 아련히 보이고 용추폭포와 백복령에서 발원한 전천강이 유유히 흘렀다. 서쪽으로는 눈길이 닿지 않을 만큼 드넓은 들판에 오곡백과가 익어갔다. 북쪽으로는 송림 너머로 옹기종기 모여 정겹게 살아가는 이웃집들이 보였다. 또 동쪽으로도 백사청송白沙靑松이 어우러져 있고, 아이들 허리까지밖에 안 되는 얕은 바다에 '후리'로 잡을 만큼 많은 고기 때가 무한정 밀려오는 푸르른 동해바다가 있었다. 또 정자 바로 앞에는 화랑포가 운치를 더해주었다.
화랑포의 또 다른 이름은 청령포였다. 그곳은 온갖 물품과 부들연이 뿌리박고, 소금쟁이 물방개는 물론 붕어, 잉어, 미꾸라지, 똥꼬, 버들치, 민물게, 까시고기, 새우 등이 노닐고 있었다. 화랑포의 물줄기는 구호龜湖였다. 동해바다로 흐르던 전천 물줄기가 갯목에서 수시로 멈칫거리며 맴돌았다. 그 물은 밀려오는 파도와 막힌 모래로 물꼬가 좁아 마치 바다로 빠지지 못해 다시 만경대 앞쯤에서 한참 동안이나 머무는데 이 일대를 구호하 불렸다. 이곳에서 송정 앞뜰 농경지로 크고 가는 물줄기가 감싸 흘렀다. 멀리서 보면 마치 섬처럼 보여 웃섬, 앞섬, 딴섬으로 불렀다. 그 물줄기 마지막에 화랑포가 있었다. 영호정은 많은 계원이 글을 남겼다.
송정서당의 훈장이던 란제 김연선은 영호라는 이름에 기인하는 글을 남겼다.
"인간이 하늘의 밝은 명을 받들어 출생하니 본시 깨끗하게 빛났으나 다민 외물로서 손상되니 호수가 폭우로 말미암아 흐려짐과 같음이 아니겠는가?" 라며 해방의 희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황혼이 깃들 무렵 문득 밝은 달이 빛을 얻어 화랑호를 비치니 영호정 10개 기둥은 유리 기둥인 양 모양이 나타났다. 이에 마음을 빼앗기어 좌석은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더니, 그중 한 사람이 거문고를 어루만져 줄을 뜯으니 마치 태고의 경지를 이루도다, 시는 도를 찾아 불평을 이르고, 술 또한 세상사 능히 잊을 수 있으나 어찌 능히 즐거우리오."
강암 홍정현은 상량문에다 다음가 같은 명문장을 남겼다.
영호정 상량문은 일제강점기, 강암 홍정현(洪政鉉, 1875년~1938년) 유학자가 지었는데 그 역문은 다음과 같다.
영호정 상량문
"때는 9월이라 계 모임을 해변의 송림에서 했다. 술 권하면서 시 읊기에 흡족하고 화랑호는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니 이에 좋은 정자 짓는 일을 경영하였다. 그리하여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그 일을 완성한 것이다. 생각건대, 송정이라는 촌락은 척주(陟州, 삼척시의 조선 시대 이름)에서 으뜸가는 승지(勝地)로다. 남쪽 서쪽 북쪽 삼면의 산은 평야를 둘러싸고 주위는 70~80리요, 이곳 송림은 마을을 둘러싸니 3~4백 가구를 안았더라.
재능 있는 인사가 많이 나타나니 사대부의 기북이요, 예의로 서로 사양하니 풍속은 주남을 닮았더라. 많은 선비가 계첩에 기록되고, 좋은 터에 정자를 짓기로 정해졌으므로 공사자가 새삼 생각하니 길섶에 지은들 어찌 염려가 있을 텐가? 오만에 기대어 세월을 보내지 말고 죽림칠현을 본받아 좋은 날짜 택하여 깊은 정 펼치니 난정(蘭亭)의 모임과 같도다. 깨끗하게 두둑 열어 두 칸 정자 바라보니 아침에는 해가 기둥에 뜨고 낮에는 서까래를 비추니 때를 기다리는 것 같고, 육지에는 호수가 있으며 동쪽에는 바다인지라 어찌 터가 없다 하겠는가?
구름의 흰 그림자와 하늘의 푸른빛이 함께 호수에 배회하니 이보다 더 좋은 곳 어떻게 얻으리오. 높은 곳 시원한 기상 서산에 가득하니 누구와 더불어 더 좋은 것 견주리오. 아름답도다. 한줄기 호수 뒤에 두 칸 정자로다. 추녀와 서까래가 먹줄 따라 바르니 수십 일에 공사가 완공되고 금전과 곡식이 주머니와 자루에서 나오니 터럭만 한 낭비도 없었다. 거울 같은 호수에 바람은 고요하고 구슬같이 맑은 달 비추는 저녁이라. 이미 깊은 곳에서 좋은 경치 얻었으니 영호정 화려한 액자 닮아 마땅하다. 풍경이 서남으로 더욱 아름다우니 항주의 미륵이요, 산하가 고금이 같지 않으니 주이의 심정이라.
만약 음식과 기거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낙(樂)을 부치고 부침과 득실이 있을 때는 한가로이 물가에 노닌다. 어엿 차, 상량을 동(東)에 올리니 고암(할미바위) 머리에 오르는 태양이 제일 먼저 붉도다. 돌아가는 신선의 바닷길 멀지 않고 구름은 삼신산 위에 있도다. 어엿 차, 상량을 서(西)에 올리니 도화 담수는 선계에 가깝더라. 도화의 붉은 물에 그물질하지 마라. 고기 잡는 배 길 잃을까 두렵도다. 어엿 차, 상량을 남(南)에 올리니 섬마을에 남은 저녁노을이 산 밖으로 떨어진다. 만경대 놀던 사람 왕래가 부절이라. 어엿 차, 상량을 북(北)에 올리니 푸른 솔숲 우거졌도다.
병풍같이 둘러서 비바람을 가리니 마을 이름 예부터 송정(松亭)이라 지었네. 어엿 차, 상량을 위로 올리니 끝없는 저 하늘은 어찌하여 저렇게도 맑은가? 옛 선비 다 돌아가고 이을 사람 없으니 다만 빌 건데 밤에 문창성(文昌星) 빛나게 하소서. 어엿 차, 상량을 아래로 올리니 뜬 세상 영화는 야생마와 같도다. 좋은 땅에 티끌 먼지 없으니 글하는 신선들 날마다 술에 취하네. 원하건대 상량 후에 신께서 잘 보호하고 경치 또한 예보다 좋아져 관동팔경에 들게 하고 풍류도 좋아져서 낙양천재(洛陽千裁)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이루소서."
효암 홍용학은 옛날 소동파가 능허대堎虛坮를 짓고 기문을 지어 대에 걸었으나 잡초가 무성하고 전답이 되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영호정의 앞날을 내다보는 글을 지었다.
"슬프도다. 상전이 벽해가 되고, 궁전이 폐허가 되기도 하는데 세상 풍조가 닥쳐서 촌락이 장차 옮기게 되면 이 호수 언덕의 유연한 정자가 또한 풀밭이 될 줄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사물이란 지금에 흥하고 후일에 패하게 되는 것은 수보修補치 않는 데 있는 즉 후일 계승자는 수보에 게으른지 말지어다."
호암의 염려대로 1974년부터 시작된 항만 개발로 영호정 일대는 상전벽해가 되어버렸다. 송정 앞뜰의 옥토와 학교, 해수욕장의 백사장을 파헤쳐 파일을 박고 방파제와 부두를 만들고, 시멘트 공장이 사일로와 공장을 지었다. 조상 대대로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으로 여겼던 송림과 정자가 어울렸던 절경이 항내 수면이 되고 말았다. 송정의 얼굴로 상징되던 화랑포 언덕의 영호정도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송림계원들은 재빠른 발걸음으로 관망 좋은 땅을 찾다 결굴 천곡 한섬 언덕에 자리를 마련했다. 1977년 똑같은 규모로 지으며 서까래는 중첩으로 하였다.
계원들은 효암이 염려했던 '수보하라'는 당부에 게을리하지 않고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정자를 옮겼다. 계원들은 호랑포가 없는 영호정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 '관해정觀海亭'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현판과 역문은 석재 최중희 선생이 맡았다. 선생은 공자가 육덕, 육행, 육예 모두를 갖추지 못하여도 부족함과 남음이 없어 내가 얻은 것은 제자 증자曾子라 칭송한 증자를 예로 들었다.
"우리 송림계 제현은 이 정자에 오를 때 증자의 마음가짐을 품고 즐겁게 놀며 높고 맑음으로 무우영귀舞雩詠歸(공자와 증자의 대화 주으 자연을 즐기며 시가詩歌를 읊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를 생각하면 관해하는 뜻을 얻으리라."
관해정의 전신, 영호정
화랑포 영호정의 분신으로 탄생한 '관해정'이 한섬에 자리 잡은 지 벌써 30여 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은 '저 한적하고 인적이 없는 언덕에 웬 정자가 다 있지?' 라며 무심히 지나칠 뿐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송정의 모습과 흡사하다. '관해정의 전신이 영호정이었다.' 자체가 이미 역사인 것처럼 송정의 옛 영광은 이제 전설로 남아있을 뿐이다.
참고문헌_ 이야기가 있는 송정,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