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1967년 설립된 광희학원
동해시 무릉계 방향 동회리에 있는 '동해광희중학교'와 '광희고등학교'는 1967년 홍희표(남, 87) 설립자의 의지로 탄생한 사학이다. 그 뿌리는 학교법인 '광희학원'이다.
홍희표 설립자는 인가 초기에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굳건하게 견뎌 내리라 다짐했다. 그는 2012년 출간한 회고록 '시련을 딛고 꿈을 향해'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61년 9월, 나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1956년 상경할 때, 눈물까지 흘리면서 꼭 성공하여 고향땅을 밟기로 작정하지 안 했던가! 과연 그 꿈을 이루고 귀향하는 건가? 자문했다.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은 마치 내가 출세해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반기셨다.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크게 잔치까지 해주셨지만 내 마음 한쪽에는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다음날, 어려서부터 아버지처럼 따랐던 '제일감리교회'의 김성영 장로를 찾아 귀행 인사를 드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교회의 청년부 활성화를 위해 주일학교를 맡아 달라.' 부탁했다. 당시 '북평국민학교' 졸업생 120여 명 중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2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진학률이 낮았다. 많은 학생이 가난 때문에 배움을 포기학고 있었다. 나는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라 생각했다.
주일학교를 열고 학생을 모집하니, 7명이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이 주일만이 아니라 매일 배우고 싶다 졸랐다. 그래서 야간중학교를 열자 30여 명이 몰려왔다. 이때부터 학생 수가 문제가 아니라 교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동화당약방' 이층과 교회 강당을 빌려 쓰게 되었는데, 학생 수가 100여 명에 달해 도저히 그 상태로 학교를 운영할 수 없었다. 당시 '해양고등학교'(현, 동해항 서부두 위치)가 폐교되어 청도관 도장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박광주 이사장을 만나 '학교를 나에게 주십시오!'라 요청했다. 당시 법이 '교육재단이 설립되었더라도 교육 외의 목적으로 사용되면 국가에 환수된다.'라는 조항이 있었다. 박 이사 장 '국가에 환수될 바에는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자네에게 맡기겠네.'라며 재단의 권리를 위임했다.
'해양고등학교'자리로 옮겨온 후, 나는 학생들과 함께 흙벽돌을 찍어 교실을 복구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후 서서히 학교 모습이 갖춰지자, 상록수를 교정에다 심으며 '이제부터 학교는 저 상록수와 함께 언제나 푸르른 모습으로 성장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나의 삶은 변함없이 불우한 아이들과 함께할 것'이라 다짐했다. 1962년 9월 25일 자로 고등공민학교 인가를 받았다. 7명으로 시작된 야학교가 1년 만에 나라에서 인가한 정식 학교가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해 겨울, 도교육청에서 '북평여중'자리와 학교를 바꿔달라는 통지가 왔다. 내가 격렬하게 항의하자 사립보다 공립이 우선이라는 정부의 방침을 들먹이며 압력을 넣었다. 내 처지에서 보면 부당한 권력의 힘에 의해 학교를 빼앗기게 된 억울한 수난이었지만, 결과 전화위복이 되었다.
새 학교 부지는 '동국제강'소유로 15,000평이나 되었다. 부지는 넓었지만 당장 교실과 교무실이 없는 실정이었다. 나는 다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학생들과 같이 교실을 짓기 시작했다. 배움의 터전을 만드는 일은 힘들고 고되었지만 보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교실을 지으면서 '교육이라는 사업은 원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며, 이 일에 신명을 바쳐 불우한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배움의 터전을 만들고 말겠다, '라 재차 다짐했다. 교사 네 칸을 지어 한 칸을 교무실로, 세 칸은 교실로 썼다. 나는 일주일 두 번씩 서울을 다니며 학교 발전기금과 비품 조달에 전력을 다했다. 이런 역경 속에서 드디어 1967년 9월 '학교법인 광의학원' 설립인가를 받고, 11월 '북평광희중학교'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또, 명문 사립학교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북평중'에 근무하는 김수진, 최석희, 김갑수, 김형래 선생님을 영입하였다."
서울에서 학원에 다니며 재수하다 '광희중학교'에 다녔던 홍봉자(여, 73)씨가 초창기 학교 모습을 회상했다.
"큰 오빠(홍희표)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맞잡이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오빠는 나를 '서울사대부중'에 입학시험을 보라며 강요했어요. 사실 나는 키는 컸지만 공부하는 데는 소질이 없었거든요. 할 수 없이 시험을 봤지만, 당연히 떨어졌고, 오빠는 서울에서 학원에 다니며 재수해 내년에 꼭 들어가라 했어요. 이어 한다는 말이 '돈 걱정은 마라, 이 오라비가 너 하나 대학에 못 보내겠냐?'라 했어요. 배가 고파 하굣길에 외가 부엌으로 들어가 보리밥 한 그룻 몰래 먹고, 소 먹이러 다녔던 시골 여자 어린애가 서울 종로 바닥에서 공부가 제대로 되겠어요? 이듬해 또 떨어져, 할 수 없이 한해 후배들하고 광희중학교에 다녔어요. 학교 주변에 높은 미루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어요. 우리는 운치 있는 그 모습을 좋아했지만, 이웃의 농사짓는 분들은 학교로 찾아와 밭이 그늘지고, 낙엽의 떨어져 농사가 안 된다며 베어달라고 민원을 넣었어요. 그래서 다 베어버리고 울타리 식으로 측백나무를 심었어요. 운장장은 해군사령부와 쌍용양회의 지원을 받아 마사토를 깔고, 꺼진 부분은 체육시간에 장광으로 가서 자갈과 모래를 가져와 메웠지요.
중학교를 졸업하자 큰 오빠는 나에서 다시 '서울사대부고'에 시험을 보라 했어요, 또, 떨어지고 재수를 했지만 경국 강릉의 강일여고에 입학했어요. 키 크다는 이유로 배구선수로 발탁되었는데, 단체기합을 받는다 하자 어머니가 앞장서서 나를 북평여고로 전학시켰어요. 여고졸업 후 나는 광희고의 '행정실'에 근무했어요. 그런데 그때 학생들은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등교하느라 엄청 힘들었어요, 설립자는 이런 학생들을 위해 학교 동쪽에 기숙사를 지어 편의를 제공했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려 했어요. 그래서 행정실 차원에서 도와주다 보니, 훗날 자연스럽게 적십자 회원이 되고, 시의원도 하게 되었지요. 나는 붙박이처럼 37년간 광희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며 여러 교장선생님을 모셨지요. 홍윤식, 김세기, 최왕순 교장이 오늘날 학교 성장의 중심에 있었죠. 중학교는 정동수, 김용수, 서윤배 교장이 명문중학교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셨지요. 특히 심용수 교장은 사립학교의 장점을 잘 살린 교육정책을 많이 도입하고 실천했어요."
학교는 하루가 다르게 자리를 잡아가는데 , 설립자를 힘들게 하는 반갑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부지 소유자인 '동국제강'측에서 학교를 비우든지 매입하든지 둘 중 택일하라는 압박이 시작했다. 그런 큰돈이 어디 있겠는가? 홍 설립자는 사장을 만나 '언제일지 장담 못하지만, 꼭 매입하겠다. 믿어 달라!'라 통사정했다.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홍기표 교장에게 학교 운영의 전권을 맡기고, 서울로 올라갔다. 먼저 개인비서로 인연을 맺었던 손원일 제독(초대해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는 홍 설립자의 처해있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미 8군 사령관인 스텔월 장군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었다. 장군은 미 8군의 타자기 부품 조달과 수리 일을 주었다. 그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찾아 나섰다. 미 8군 잔디 깎기, 에어컨 탈부착, 미군 식품 유통, 콘센트 막사 페인팅, 사료공장, 포도주 제조, 홍보회사인 제일기획 등을 운영했다. 훗날 " 내 평생 그때처럼 신나게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동국제강'측에서 또다시 매입 독촉을 하자, '제일기획' 건물과 주조회사 등을 미련 없이 팔아 15,000평의 대금인 1억 2천만 원을 완납했다.
1971년이 되자 중학교 무시험 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초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와 과도한 입시경쟁률을 줄이기 위한 제도였다. 학생들은 줄을 서서 복권 추첨하듯이 물레를 우로 2번 좌로 1번 돌려서, 나오는 은행 알에 적힌 학교로 진학했다. 북평읍 지역 학생들은 '북평중' 번호를 뽑으로면 환호성을 지르고, '광희중'을 뽑으면 눈물을 흘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광희'란 이름이 지금처럼 알려지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자 '역시 사립학교는 뭔가 달라'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광희중학교 선생님들은 '마치 자기 자식을 공부시키듯이 학생들을 가르친다.'라며 점차 사립학교의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광희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6대 동해시의원을 지낸 성심의료기 대표 김도준(남, 58)씨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봄 소풍을 갈 때는 신입생들에게 학교가 있는 북삼동 일대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코스와 일정으로 잡았어요. 효가리에 있는 강원도 보호수 제271인 느티나무를 기점으로 '삼척심 씨 열녀문', '김겸 효자각', '양세삼효각', '용산서원'과 취병산 앞산에 있는 '강릉김 씨 재사, '강릉최 씨 재사', '영일정 씨 재사', '울진장 씨 재사', '밀양박씨재사' 등 5개 재실을 둘러보소 무릉계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2학년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고, 3학년은 인근마을인 삼척 죽서루, 육향산, 강릉의 경포대 등지를 돌았어요. 학생회 간부와 보이스카우트는 매년 현충일이 다가오면 구민산에 있는 '순의탑'으로 가서 청소를 했어요. 가을 소풍 때는 전 교생이 학교 정문 뒤에 있는 객당목으로 해서 '바람의 언덕'으로 갔어요. 그곳은 북평 들판과 삼화 들판이 보였지요. 선생님은 '너희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과 학교, 마을을 산 위에서 한 번 바라보라.' 했어요. 이어 '초록봉'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하고 승지골 솔밭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이렇게 힘든 ㅎㅇ보를 강행한 이유를 '향토문화 훈련'이라 했어요 선생님들은 사립학교인 광희중학교만이 할 수 있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지역민과 상생하고 자부심을 갖기 위한 목적으로 이런 훈련을 반복했어요. 또, 공립학교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 광희학교 교문 앞에 있었어요. 등교시간이 되면 꼭 교문 앞에서 교사가 교통정리를 했어요. 학교 측에서 먼저 지역과 학부형, 학생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모습으로 다가가자, 인식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1981년 광희학원은 마침내 '광희고등학교' 10개 학급'을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받는다. 그동안 4번이나 인가 신청을 했지만 계속 반려된 터였다. 이듬해 300여 명의 학생들이 입학식을 치르고 명문고로서의 발돋움을 시작했다. 설립자와 선생님들은 당시 영동지역의 명문고로 알려진 강릉고등학교의 성적을 앞서는 목표를 정하고 맹진했다. 우수학생 120명을 선발해 특수반을 편성하여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성과는 4회 학생부터 서서히 나타나 서울대 합격생을 냈고, 수도권 대학에 많은 학생이 합격하기 시작했다.
지역의 이름 없던 사립학교가 신문에 나고, 강원도내 교장과 교무과장이 수업 참관을 할 정도였다. 설립자는 그 비결을 교사들의 진정성 있는 호소로 진단하며 회상한다.
1년 담임, 3년간 담임 광희학원
"나는 선생님과 학생들을 인간적으로 맺어주기 위해서 1학년 담임을 3학년까지 맡도록 했다. 담임선생님은 자연스럽게 학생의 가정환경과 인성 등을 소상히 파악하여, 학생에게 맞는 교육을 펼칠 수 있었다. 정이 들어 한 가족처럼 유대감이 생겼다. 선생님들이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자가 차로 집에 태워다 준다. 자기 자식처럼 교육하고 있으니 학생들도 감동하여 선생님을 잘 따랐다.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육제도의 변경 때문에 특수반이 폐지되었지만 명문고로서의 전통을 여전히 이어가는 것은 선생님들의 열정과 학생들의 노력 때문이다. 사은회에 나가보면 졸업생들은 교장과 설립자인 나는 뒷전이고,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과목담당 선생님부터 먼저 챙긴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내가 의도했던 사제간의 돈독한 정과 진정한 인성교육을 성취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광희고는 자금도 강원도 내에서 최고의 사립 명문으로 자리 잡았지만 처음 개교할 무렵은 호미나 괭이 학교하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혹독한 악담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과 학생들이 노력한 결과, 지금은 학력 평가에서도 강원도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거둬, 그 포상으로 최신 시설의 체육관과 교실 18실을 신축해 더욱 쾌적한 교정이 됐다."
동해문화원이 2015년 소설가 홍구보 작가 참여로 기록한 '이야기가 있는 북삼' 글 인용
참고문헌_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북삼,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