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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병산 ‘동자삼’과 ‘옹기터’ 이야기!

26.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by 조연섭
취병산 '동자삼'과 '옹기터'

동해 두타산을 마주 보는 ‘취병산’은 풍성함과 기풍 있는 산세로 예부터 산삼이 많았다고 전해온다. 마을에서는 당시 산삼이 얼마나 이름났으면 ‘취병산 동자삼’이란 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옛날 설운골에 효자 부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늙으신 어머니가 그만 병이 들었다. 인근의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다니며 별별 약을 다 써 보고, 침을 맞아도 효험이 없었다. 부부는 애가 바씩 말라 새벽마다 취병산 산신령께 손을 비비며'우리 어머니 살려주세요!'라 빌었다. 그러자 어느 날 산신령이 나타나 '너희 자식 중 하나를 가마솥에 삶아, 그 물을 먹이면 효험이 있을 것이다.'라 말했다. 부부는 고민 끝에 '아들이 셋이나 되니 이 중 막내아들을 희생시킵시다. 어머니는 한 분뿐이고, 자식은 또 낳으면 되는 게 아니겠소!' 라며 막내를 희생시키기로 했다.


이튿날, 마침 북평 장날이라 막내를 데리고 가서 찐빵도 사주고, 잔치국수도 사주고 돌아올 때, 꽁치를 사 와 알불에 구워 먹였다. 그리곤 '막내여, 오늘 장에 갔다 오느라 땀을 많이 흘렸으니 목욕하자!'라며 가마솥으로 들어가라 한 후 뚜껑을 닫고, 눈물을 흘리며 밤새도록 장작을 땠다. 새벽녘에 막내를 푹 곤 물을 어머니에게 먹이고, 얕은 잠을 잤다. 얼마쯤 잤을까, 해가 중천에 떠서 마당이 환했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금방 죽을 것 같았던 어머니가 텃밭에 앉아 풀을 메고 있었다. 또, 사립문을 열고 막내가 들어오며 '어머니, 아침밥 줘요. 취병산에 가서 나무 한 짐 해왔더니 배가 고프네요!'라 말했다. 부부는 깜짝 놀라 어머니와 막내를 번갈아 보았다. 한참 머리를 흔들며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야, 새벽에 어머니에게 드린 탕약이 사람 닮은 산삼을 달인 약이란 걸 깨달았다. 부부는 취병산을 향해 무릎 꿇고 '아이고, 산신령님! 고맙습니다.'라며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이때부터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동자삼童子蔘이 취병산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저 내려왔다.


사람들은 취병산에 산신령과 동자삼이 산다는 걸 믿고, 매년 합동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마을을 돌봐 달라 빌었다. 또, 개인적으로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나, 후손을 점지해 달라고, 시험에 붙게 해 달라, 자식들 좋은 짝 만나게 해 달라며 과일과 시루떡, 돼지머리를 푹 삶아 산신령께 빌었다. 새벽이 되면 밤새 치성을 드린 흔적이 취병산 곳곳에 있었다. 쇄운리 아이들은 눈뜨기 무섭게 산에 올라 치성 자리를 훑었는데 과일과 술, 사루떡, 돼지머리는 손대지 않았다. 그것들은 어른들 몫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단지 어쩌다 돼지 입에 있는 돼지 꿈같은 지전紙錢이 아이 들 몫이었다.


이렇듯 오랫동안 취병산은 어른과 이이들에게 친숙한 산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산신령이 보이지 않았다. 취병산 북쪽에는 옥녀봉, 장승골, 장나무골, 큰골, 한태골, 도장골, 사리골, 절터골 등의 산골짜기와 남향으로 지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산신령이 사라진 이유를 마을 앞으로 생기 철로 때문이라 했다. 삼화철산의 철광석을 캐기 위해 화약을 터트리고, 철로로 오가는 가시랑 차 소리가 시끄러워 떠나버렸다고 했다.


다행히 철광석에 철 성분이 적어 삼화철산이 문을 닫자, 산신령이 다시 놀아왔으나 30년 만에 아예 떠나버렸다고 했다. 이번은 지금의 '쌍용 C&E'가 들어서서 시도 때도 없이 화약을 터트려 돌을 깨고, 송정 들판에 들어선 항구로 가는 컨베이어 벨트와 전용도로로 인해 취병산의 신기神氣를 건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또, '봄 소풍은 만경대, 가을소풍은 취병산'의 공식이 42번 국도 확 포장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넓고 긴 자갈 광장, 끊임없이 풍성하게 흐르는 물줄기, 12폭 병풍과 같은 절경, 화전놀이, 뺑창 다이빙대도 사라지고 말았다. 게다가 당시 쌍용양회 동해공장 공업용 수로 인해 전천 물줄기는 사라지고, 광장의 자갈은 시멘트가루가 내려앉고, 도로 확장으로 집들이 허물어졌다. 또, 태풍 루사(2002년) 때 최병산 앞이 초토화되었는데 당시 상황을 최병선(남, 81)씨가 회상했다.


"우리 동네는 옛날부터 비바람이 장난 아니었어요. 다른 곳과 똑같은 비바람이어도 우리 동네만 오면 배로 세졌어요. 물만 해도 두타산, 청옥산에서 내려온 물과 백복령, 신흥의 상월산, 달방, 비천 등지의 물이 저기 파수굼이에서 합쳐 흐르다 보니 유속이 배로 빨라졌어요. 바람도 마찬가지로 골을 타고 내려오다 여기 취병산 앞에서 휘감아 쳐 북평들판으로 불다 보니 세기가 장난이 아니었지요. 태풍 루사 때는 우리 집 앞의 국도는 물론 철로까지 뒤집혔어요. 산 중턱에 있는 우리 집까지 금방 물바다가 될 것 같았는데, 다행히 물이 빠지는 바람에 살아남았지요. 수 만 개의 양동이로 하늘에서 물을 쏟아붓는 것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자, 눈에 보이는 것 중에 성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삼화 동네는 말할 것 없고 쌍용 공장 곳곳이 침수되었고, 도로가 망가졌으니 직원 모두 한 달 넘게 걸어서 출퇴근하고, 시멘트 생산이나 출하도 중단되었어요. 우리 집은 그 난리통에도 다행히 살아남았는데, 이우는 담장이 튼튼했고 슬래브 지붕으로 지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망정이지 옛날 집이었으면 다 떠내려갔다고 봐야지요. 내가 새집을 지은 이유는 장모님을 모셨기 대문이지요. 뭐 소린가 하면, 처갓집에 아들 없이 딸만 넷이었어요. 장모님이 연로해지자 사위 넷이 모여 회의를 했는데, 결국 막내 사위인 내가 모시게 되었어요. 윗동서 셋 다 장남이고 나는 차남이었거든요. 또, 하필이면 그때 회오리 강풍이 마을을 휘몰아쳤는데. 우리 집 'ㄱ'자 지붕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어요. 할 수 없이 장모님이 사셨던 집으로 이사했고, 루사 전에 새로 지은 탓에 피해를 입지 않았지요."
구 쇄운리 옹기터(1960년대), 사진_동해문화원 DB

취병산 북쪽 마을을 예전은 서낭당이 있다고 해서 '서낭댕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고 '천주교유촌'이라 불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옹기 가마터가 있었고, 30여 호의 주민들 모두 옹기 굽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옥계 남양리에 살다 이곳으로 이주했다는 최병선 씨가 가마터를 짓다 망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집 선대는 천주교인으로 양양에 살았어요. 그러다 옥계 남양리로 이주해 와 오랫동안 사셨어요. 할아버님이 구장을 할 정도로 동네 일에도 열심이었고 작은 옹기 가마에 옹기도 구워 팔아 풍족하게 사셨어요. 그런데 해방되기 전에 일본 순사가 집으로 드나들며 자꾸 괴롭히자, 이버지는 집과 논밭을 팔아 식구들을 데리고 북평 쇄운리로 이사 왔어요. 그것은 쇄운리에 천주교운들이 집단으로 모여 옹기사업을 하고 있어, 아버지도 가마터를 하나 더 지어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위해서였어요. 우차에 세간을 싣고 이사를 와 보니 배 씨 3 형재(배한복, 삼복, 만복)의 옹기 가마가 있었대요. 아버지는 그 옹기 가마 옆에 집과 가마를 지었어요. 이웃 모두 천주교인이라 서로 도우며 큰 어려움 없이 흙을 이겨 쌓고, 바람 구녕(구멍)을 내고 가마 만드는 걸 마칠 수 있었대요. 드디어 가마가 완공되자, 단 실로 우차를 몰고 가서 웅기 흙을 싣고 와 옹기를 빚어 3단으로 쌓았어요. 장독, 술곳, 젓갈독, 물동이, 오줌장군, 약탕관, 시루, 굴뚝 등 1천 개가 넘을 정도로 쌓아 드디어 불을 피울 일만 남았어요. 그런데 빨리 옹기를 만들어 팔 생각만 했지, 지붕을 비 피해를 방지할 생각은 못했어요. 그날 비가 내려 설마? 했지만, 장대비가 쏟아지더니, 몇 날 며칠을 그치지 않았대요. 아버지는 애가 말랐지만, 하늘이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었어요. 비가 열흘 후에 그쳤는데, 가마가 그만 주저앉아버렸어요.
아버지는 그때 포기하셔야 했는데, 가마터 흙을 걷어내고 다시 이겨 쌓고, 젖은 토기를 부수어 빚고 불을 피웠어요. 그때 마른하늘에 천둥 치듯이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그치질 않았어요. 아버지는 가마터처럼 주저앉아 천주님을 원망해도 빚을 낸 돈을 갚을 길이 없었어요. 채권자들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버지는 꿇어앉아 집문서, 어머니의 쌍가락지, 그릇, 우차를 내놓고 '이것이 내가 가진 전부니, 나를 삶아 먹든 찢어 먹든 하고!' 하며 울었어요. 그 후 아버지는 옹기사업을 접고 우차 뒤에 인부들을 태우고 탄실의 옹기흙을 파서 싣고 오는 일을 했어요. 인부들은 탄실의 장홍렬 씨네 산에 가, 지정된 땅에서 수직으로 파 내려가며 흙을 광주리에 담으면 위에서 줄을 올려요. 어느 정도 내려가야 좋은 옹기 흙이 나왔는데, 이 흙을 올려 우차의 틀(나무틀)에 차곡차곡 실어 갖고 왔어요. 나도 커가면서 이 일을 오랫동안 했는데, 아버지는 옹기 가마 울화병으로 인해 환갑 되던 해에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옹기점이 있던 자리(2019), 사진_동해문화원 DB

약 100년 전에 '천주교우촌'으로 한 집 두 집 이주해 왔다. 최 씨, 배 씨, 김 씨, 홍 씨, 연 씨 등이 식솔들을 데리고 왔는데,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남쪽으로는 천하의 명산이라 일컬어지는 취병산과 전천에는 사시사철 물이 흘렀다. 그러나 넓은 장광은 자갈과 억새밭이 자리 잡아 개간하더라도 매년 되풀이되는 홍수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또 옥녀봉 아래 펼 펴진 야산에는 각 문중에서 재실을 지어, 개간을 할 수 없었다. 영일정 씨의 영소재, 강릉최 씨의 추원재, 밀양박씨의 봉사재, 울진장 씨의 경운재, 강릉김 씨의 추원재 등이 자리 잡고 조상의 얼을 기렸다. '천주교우촌'사람들은 이런 땅에서 생계를 유지할 길은 옹기를 구워 파는 것밖에 없었다. 이곳의 토박이 성정숙(여, 79)씨가 어린 시절 교우촌 이야기를 들여주었다.

한 형제 네 신부
"우리 마을은 옹기로 먹고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논밭이 없다 보니 농사를 못 짓고, 조상이 해오던 대로 옹기를 구웠어요. 다실에서 우차로 흙을 싣고 오고, 설운골에서 나무를 해와 가마 옆으로 쌓아놓으면 남녀노소 전부 모여 옹기를 빚어요. 제일 힘든 게 큰 쌀독이나 소금독인데, 양조장에서 주문한 술독은 장정이 아니면 빚지 못했어요. 작지만 힘든 건 한약 달이는 약탕기, 호리병인데 나는 식초 만들 때 쓰는 약탕기 뚜껑이 제일 힘들었어요. 손으로 빚은 가종 옹기를 햇볕에 건조한 후, 가마에 차례대로 쌓아요. 그리고 입구를 막고 온 식구가 모여 축성기도를 드렸어요. 옹기 굽는 동안에 비가 내리게 하지 마시고, 태깔이 좋게 잘 구워 지기를 바라는 기도지요. 왜 비 걱정을 했냐 하면 그때는 가마 위로 지붕이 없었어요. 작은 비야 괜찮지만, 큰비가 내리면 무너질까 겁이 났지요. 가마를 하는 날은 장사하는 분들이 줄을 섰어요. 영서지방으로는 업자들이 차를 갖고 와서 싣고 가고, 영동지방에는 단골 도매상들이 우차나 차로 싣고 갔어요. 장날에 파는 도부꾼은 중간 지점에 쌓아놓고 머리에 이거나 자게에 지고 갔지요. 그런데 플라스틱 통이 나오자, 수백 년을 내려오던 옹기가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또, 쇄운리는 재실이 5개나 있을 정도로 유죠적 전통이 강하고, 민간 풍습으로 미풍양속을 판가름하다 보니 우리 교인들과 생각이 많이 달랐어요. 그러나 주민들이 언제부턴가 친근감으로 다가왔는데, 제일 큰 이유가 집안에 상을 당했을 때, 우리는 뭘 따지지 않고 몸으로 때웠어요. 민간 풍습은 사람이 새벽에 죽거나, 제사가 있거나, 혼삿날을 받아놓았거나, 폐병으로 사망하던 아무리 가까운 집안사람도 상갓집에 가는 걸 꺼렸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웃에 누가 사망했다 하면 열 일 제처 놓고 염을 해주고, 매장하는 데 몸을 아끼지 않고 품을 더해줬지요. 이런 일이 오래 되풀이되자. 우리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던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대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교인촌 자랑거리는 단연 '한 형제 네 신부'이지요. 저의 큰 언니(권정순 1928~2013)는 배씨내로 시집가서 딸 없이 아들만 7형제를 낳았어요. 이 중 맏이인 건하와 넷째 운하, 여섯째 상하는 평범하게 결혼해 살아요. 그런데 둘째 은하 신부님이 1981년 처음으로 사지서품을 받은 후 셋째 달하, 다섯째 도하, 막내 하정이가 신부님이 되었어요. 하정 신부님이 사제서품을 받은 2000년에 보니, 전국적으로 한 형제 중에 4명이 신부가 된 경우가 두 번째였대요. 특히 우리 은하 신부님은 예전에 지학순 주교님을 오랫동안 보필했고, 원주교구의 제일 인기 있는 신부였어요. 제천에 있는 '배론성지'에 오랫동안 계셨고,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이란 책도 썼어요. 늘 입가에 미소사 그득하고, 박식하시어 미사 중에 강론하실 때 보면 내가 이모 하는 게 너무 자랑스러웠지요."
참고문헌_ 이야기가 있는 북삼,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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