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동해 송정에 '염전' 이?

27.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by 조연섭
소금 장수, 배 장수

서해의 '천일염'과 달리 동해안은 '토염'이나 '화염'으로 소금을 조달했다. 토염은 주로 경상도 울진 일대에서 성행했지만 만드는 과정이 힘들었다. 토염을 만들려면 먼저 뻘을 퍼와 바닷가 백사장에 평평하게 다졌다. 그 위에 마사토를 깔고 바닷물을 담아 7~8일쯤 써레질을 했다. 소금 결정체가 생기면 마사토와 같이 긁어모아 그 위로 바닷물을 퍼부으며 분리했다. 이 소금물을 열흘간 솥에 달이면 토염이 되었다. 오랜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들었으나 토호 세력이나 아전, 벼슬아치들이 서로 염전을 사려했다. 토염은 뒷맛이 천일염과 달리 달아 김장을 하면 시원한 맛이 났고, 당시 고등어에 염장을 지르면 구수한 향이 났다. '소금 장수는 배 장수'라는 말이 생길 정도의 이문이로 남았다.

영동지역 소금 '화염'으로 만들어

영동지역은 주로 '화염'으로 소금을 만들었다. 송정, 천곡, 묵호, 옥계의 백사장에 크고 작은 염전이 있었지만, 워낙 땔감 나무가 많이 들어가 몇몇 목상만이 이 일에 관여했다. 이들 중 가장 크게 참여한 분이 송정 출신의 최종곤(1889~1961)씨였다. 그는 백복령과 신흥 일대의 소나무를 벌목해 묵호에서 배로 부산까지 싣고 가 팔았다. 그의 손자인 최승혁(2014년 당시, 남, 62세)씨는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소금배급소(소금 담배 간판), 사진_동해문화원 DB

"할아버지는 시대적 정신과 현실감각이 누구보다 뛰어나 젊은 시절부터 상업에 종사했지만 증조부(최복규 1865~1937)는 평생 글을 읽고 풍류를 좋아해 기방에 자주 가는 등 식솔을 챙기지 않았어요. 그래도 문중이나 집안 대소사에 적극 참여하고 손주 사랑이 대단했어요. 특히 북평장으로 장 보러 갈 때는 꼭 손자(최동순 1925~1997)에게 색동저고리를 입혀 당나귀 앞자리에 태워 갔데요. 당시 북평장에서 그 모습이 진기해 많은 사람들이 구경했다고 그래요. 또, 할아버지는 영동지역에서만 목상木商을 하다가 성에 안 차 당시로는 큰 모험인 부산까지 목재를 배에 싣고 가 팔았어요. 하루는 부산에 갔을 때, 일본 순사에게 불심건문에 걸렸데요. 순사는 총독부에서 단발령이 내려졌다며 다짜고짜 할아버지 상투를 잘랐어요. 할아버지는 혼비백산해 산발한 머리채 송정으로 돌아왔대요. 사람들은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하며 놀랐고, 할아버지는 상막 앞에서 조상님을 뵐 낯이 없다며 몇 날 며칠을 대성통곡했다고 그래요.


당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말고, 어른들은 거의 상투를 틀고 갓 쓰고 다닐 때였지요. 할아버지는 열흘 동안 식음 전패하며 궁리하다 가문을 일으키고, 식솔을 건사하려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래서 전보다 더 열심히 목선에 나무를 싣고 부산으로 가 팔고, 돌아올 때는 소금을 사 가지고 오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소금장수로부터 암염(땅 속에서 광물처럼 캐내는 소금 덩어리)과 염전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어요. 즉, 소금을 사가는 것보다 깨끗한 동해안 바닷물과 암염을 가마솥에 넣고 끓여 소금을 만드는 게 훨씬 수지가 낫다는 거였죠."

소금배급소, 지금 약국 자리,사진_동해문화원 DB
1938년 송정공립소학고 부지에 소금공장 '염전' 들어서다.

최종곤 씨는 송정에 돌아오자 뜻이 맞는 동지를 규합해 훗날(1938년) 송정공립소학교가 들어선 부지에 염전을 만들었다. 조개껍데기와 톳을 섞어 다진 구들장 가마솥을 만들고, 큰 장작이 들어가는 아궁이 4곳과 굴뚝을 세웠다. 바닷가에 인부들이 물지게로 바닷물을 부으면 염전까지 흘러올 수 있게 홈을 판 통나무를 연결했다. 바닷물과 암염이 들어 있는 가마에 화목을 7~8일 동안 지필 때 많은 송정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당시로는 아궁이에 이글거리는 불 자체가 장관이었다. 또, 덤으로 얻는 게 있었으니 바로 '불게'였다. 불빛을 보고 모래펄과 바위에 있던 불게가 새카맣게 몰려들어 그냥 돌 줍듯이 부대에 넣어 집으로 갖고 가 구워 먹거나 조려 먹었다.


무한정 들어가는 화목은 나무뿌리나 가지뿐만 아니라 멀쩡한 목재를 톱으로 잘라 장작을 만들어 때야 했다. 염전 운영에 가장 큰 걱정이 화목을 구하는 일이라, 넓은 산을 소유한 산주나 벌목 권리를 가진 목상만이 염전을 운영할 수 있었다. 훗날, 도계 탄광이 개발되고 북평역과 묵호항에 무연찬이 지천으로 쌓이자, 화목에 한이 맺혔던 몇 분들이 용정바다 일대에 가마솥을 걸어 무연탄으로 소금을 만드는 소규모 염전을 운영할 정도였다. 최승혁 씨는 염전과 관련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다.


"염전할 때는 삼척 탄광에서 무연탄이 채굴되지 않을 때였어요. 그 시절은 땔깜용으로 마른 소까지(솔잎)도 산주 몰래 삭삭 긁어갈 때니 나무 감당이 힘들었지요. 설상가상 병자년(1936년 9월) 개락 때 백봉령과 비천, 신흥, 서학골에 벌목해 쌓아 둔 나무가 깡그리 바다로 떠내려갔어요. 경술년(1910년) 개락 때도 월동에 서던 북평장터가 유실되고, 전전 물줄기가 바뀌었지만, 병자는 개락 때는 피해가 더 심했대요. 수 만평 농경지가 유실되고 가옥 1,500호가 떠내려가고, 강변에 시체가 즐비할 정도로 엄청난 개락이었대요. 할아버지는 하필 다른 해 보다 더 많이 빚도 내고 후불 조건으로 벌목했으니, 전 재산이 물에 떠내려간 거죠.


그러니 염전을 더 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일본은 태평양전쟁 준비로 자금 조달 차원에서 소금을 전매제로 전환했어요. 전국의 염전을 직접 관리했지요. 게다가 판매까지 배급제로 전환했는데, 마침 염전을 운영한 집에 배급소 면허를 줬어요. 전화위복이 된 셈이죠. 그때는 각 마을 대표가 읍사무소에서 배급 전표에 도장을 받아 우차를 몰고 우리 집에 소금 타러 왔어요. 도계, 묵호에서도 소금 타러 왔지요. 전표는 사랑방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주고, 소금은 직접 창고로 가 우차에 실었어요. 그즈음 우리 어머니가 막 시집을 왔을 때인데, 가만히 보니 몇 부대씩 더 싣더래요. 그래서 자청해서 소금배급소의 총무가 되어 쭈욱 집안 돈 관리를 했지요."


최종곤 씨는 염전을 다시 할 수 없었지만 '소금배급소'로 인해 제2의 호황을 맞이했다. 명사십리 송정해변에 후리 어업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어른 팔 한 팔이나 되는 방어가 잡히는가 하면, 처치 곤란할 정도로 대구, 고등어, 멸치, 갈치가 많이 잡혔다. 당시는 얼음이나 냉동시설이 없어 전부 큰 드럼통에 넣고 소금을 쳐 보관할 수밖에 없었다. 소금값이 워낙 비싸고 또, 배급제이다 보니 최종곤 씨가 고기를 사서 맡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염장된 고기는 영서지방으로도 팔려나갔다.


'소금배급집' 새댁이 야무지게 소금관리와 장부 경리를 보고, 염장된 고기가 잘 팔리자 송정에서 현금이 제일 많은 집으로 통했다. 당시 1원짜리 지전이 있었는데 세기 귀찮아 구석에 쌓아놓으면 그날 어디서 소금 배급받으러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돈에서 비린내 나면 정라진이나 묵호에서, 돈이 검으면 도계 쪽에서 왔다간 걸 알 정도였다. 또, 당시는 현찰이 없어 소금과 물물교환으로 보리, 콩, 팥, 밀 등의 곡물을 지게에 지고 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이웃사람들이 자주 집으로 찾아왔다.


"어느 새벽녘, 우리 할머니가 마당을 쓸고 있는데 아랫모퉁이에 사는 새 백이 아이를 업고 담 너머로 보이더래요. 처음에는 이웃 마실로 가나 했는데, 자꾸 보였다 안 보였다 하더래요. 그래서 뭔 일인지 손짓해 불렀더니 한참이나 망설이다 울먹이며 하는 말이 '아이에게 먹일 젖이 나오지 않아 그러니, 보리쌀 좀 꿔주세요.' 하더래요. 할머니는 두말 않고 곳간에 가 보리쌀 한 자루를 주었데요. 그런데, 이 말을 내가 우리 할머니에게 들은 게 아니고, 옛날 아이 업고 왔던 그 '새댁'의 며느리에게 들은 말이에요. 그 며느리도 이젠 호호백발 된 할머니였는데 나에게 '우리 시어머니가 살아생전 입버릇처럼 '저 소금배급집은 훗날 복 받을 거다!" 하더란 말을 했어요. 이 이웃 할머니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 친척이나 우리 가족 모두 할아버지 염전 덕을 많이 봤지요."

참고문헌_이야기가 있는 송정,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keyword
작가의 이전글취병산 ‘동자삼’과 ‘옹기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