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이광엽 이사장 삶, 송정의 역사
송천장학회 설립자인 동해시 송정동에 거주했던 이광엽(남, 87,2016년 3월 별세)씨를 인터뷰로 만난 때는 2014년 가을이다. 당시 설립자는 노년을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자산인 동해시 봉오동 일대의 땅 4,300여 평과 천곡동에 있는 100평의 대지마저 2014년 장학회에 기탁했다. 남은 건 노구거 기거하는 10평짜리 원룸과 소품뿐이었다. 서울상점이 있던 자리에 지은 '송천원룸'도 오래전 장학회에 기탁한 상태였다. 1남 5녀(외손 2023년 4월 26일 제보)의 자식들은 아버님 살아생전 홀로 계신 아버지와 같이 살려고 하지만, 이 이사장은 혼자 지내는 게 차라리 편하다고 늘 말했다고 한다. 다음은 2014년 동해문화원 기록 인터뷰 내용이다.
"나는 평생을 아버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애썼어요.'가 차(까) 운 사람과 먼 사람과는 절대로 돈거래를 하지 말아라.' 이거 아버님 당부였지요. 그래서 장학회에 전 재산을 내놓은 것도 이런 맥락이지요. 가차(까) 운 사람은 피를 나눈 형제와 자식이 해당하지요. 나는 내 자식들이 올바른 길을 제 스스로 살 수 있을 때까지만 뒷바라지를 해주었지요. 그다음엔 자식들 몫이지요. 내가 돈을 많이 갖고 있으면 자식들 간에 불화와 갈등이 생길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이북 출신인 내가 이곳 송정에서 평생을 살며 번 돈을 이곳 학생들이 공부학고 올바를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래요. 이 아비의 뜻을 자식들이 이해를 해주었고, 다행히 다들 제 사는 길에서 잘살고 있어요. 나는 마음을 비우고 사니 그리 행복할 수가 없어요. 매일 아침 11시가 되면 여기 송정 상인 새마을금고에 나와 신문을 보고, 오후 2시가 되면 천곡에 신축한 천곡지점으로 나가요. 거긴 유리창이 복층유리라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세요."
이 이사장은 전국적으로 진기록을 갖고 있다. 닮 아닌 새마을금고 이사장 직함을 32년 동안이나 갖고 있었다. 원래 이사장은 4년 임기에 연임이 가능했었는데, 내무부 소관인 새마을금고 운영법이 임기가 끝날 때마다 개정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송정 상인 새마을금고는 1980년 송정 시장 상인들과 만들었다. 존재 이념을 '참여와 협동으로 풍요로운 생활공동체 창조'를 내걸고, 초기부터 지금까지 직원들에게 '땀 흘린 만큼의 대가를 가져가자'라며 투명 경영을 강조했다. 2013년은 천곡지점까지 개설해 시민금융의 본보기로 널리 알려졌다.
모교인 송정초등학교에 재직(2014년) 중인 홍영주(남, 63) 교장은 '송천장학회'와 이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도 송정 사람이라 어려서부터 서울상점을 많이 이용했지요. 5살 때 아버지를 따라가 별사탕을 처음 먹었을 때의 달콤함은 지금도 기억할 정도지요. 북평읍 당시, 대다수의 사람은 제사나 잔치가 있으면 무조건 서울상점에 갔어요. 요새 이마트처럼 없는 게 없었지요. 교직 초입시절인 70년대 중반쯤에 서울상점 자리에 '송천여관'이 들어섰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원래 여관이 목적이 아니라 백화점이었는데, 입점을 하려는 가게가 없었대요. 그래서 여관으로 변경했고, 지금은 원룸으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지요. 이 이사장은 1996년, 송천여관 등의 부동산과 현금 등 당시로는 큰 금액인 7억 6천만 여원을 출연해 '송천장학회'를 만드셨어요. 다들 엄청 놀랐지요. 그 후 18년 흐르는 동안 우리 송정 초등학교 학생을 비롯한 송정 출신 중고생에게 매년 1,000만 원의 장학금이 지급되었어요. 그동안 900여 명이 혜택을 받았고 금액으로 1억 8천만 원의 장학금이 전달된 것으로 압니다."
이광엽 씨가 살아왔던 지난 이야기는 송정의 역사였다. 그는 17살 되던 해인 1944년 이천에서 도계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과 4남 1녀의 형제들과 함께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지났지만, 소달(도계는 학교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으로 편입했다. 교장이 일본사람이었고, 그의 주산 솜씨를 인정해 졸업과 동시에 도계탄광 경리과에 추천을 해주었다.
"그때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동급생이 나이가 들었지요. 비가 오거나 하면 유리창 너머 복도에 애 업은 아낙네들이 우산을 갖고 와 교실 안의 남편들이 공부하는 걸 훔쳐보았지요. 내가 취직한 탄광 경리과는 여직원이 몇 명 있었는데. 다 일본 여자였어요. 2년쯤 근무하는 동안 해방이 되었어요. 그러자 우리 식구 모두 삼화로 이사를 했어요. 삼화철산 사택이었는데, 삼화제철이 문 닫다 보니 사택에 빈집이 많았어요. 일거리 없는 사람들이 매일 빈방에서 화투를 쳤지요. 그래서 착안한 게 화투 장사였어요. 시멘트 종이를 자르고 풀칠해 밀랍으로 덧칠하고 그림을 그려 팔았지요. 임계까지 가서 담배를 사 와 팔기도 했어요. 장사에 재미를 붙인 나는 자전거 한 대를 사서 정라진과 묵호로 가 어물을 싣고 와 팔기도 했어요. 길이 안 좋다 보니 펑크가 자주 나, 아예 파이프로 바퀴를 만들어 타기도 했지요. 아버지는 개성상인 출신이었는데, 4형제 중 이러는 나를 대견스럽게 여겼지요."
당시 북평읍 지역 유지들이 앞장서서, 비어 있는 삼화철산 사택의 목재를 북평시장 통에 20호를, 나머지는 송정시장 동해 옮겨지었다. 당시 역 앞쪽 일대는 소나무가 있고 묘지가 있는 솔밭이었다. 오히려 북삼화학이 있던 용정 일대에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건 일본인이 운영하던 큰 창고가 용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배로 온갖 물품을 싣고 와 큰 창고에 보관했다가 울진, 삼척, 강릉에서 물건을 사러 오는 상인들에게 팔았다.
이광엽 씨는 삼화에서 송정으로 이사와 농협 오거리 쪽에 있는 아이스케키 공장을 샀다. 그러나 이 공장은 여름 한 철 장사밖에 안 되어, 또 다른 사업구상 끝에 연탄공장을 짓기로 했다. 당시 모든 연탄은 틀에 연탄을 넣어 일일이 장정들이 메로 내리쳐 하나 둘 만들 때였다. 인천에서 발동기와 주물로 된 틀을 사 와 자동으로 구공탄을 찍어댔다. 장사가 엄청 잘되자 형에게 맡기고 그는 오시오 상점 옆의 공터를 사 대동화물을 운영했다. 마침 건너편에서 알코올에 물을 희석해 소주를 만들던 사람이 화물과 맞바꾸자고 제의했다. 그는 소주 공장을 조카에게 맡기고, 자신은 기와와 벽돌 공장을 운영했다.
"벽돌공장이 자리 잡자, 나는 그걸 형에게 맡기고 시장통 옆에 작은 가게를 세내어 라이터 돌과 기름 장사를 시작했어요. 당시 영동지역 유일하게 내 가게만 팔았기 때문에 엄청 잘 되었어요. 그리고 서울로 부지런히 다니며 잡화 유통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 갈 때는 묵호에서 고기를 사가서 팔고, 올대는 각종 잡화를 사 왔지요. 그러다 결정적으로 히트 친 게 세 가지였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을 독점 취급했지요. 또 하나는 강릉에서 만드는 전구를 팔았어요. 무엇보다 북삼화학의 카바이드를 팔아 엄청 이문을 남겼지요. 한창 잘 되는 판인데, 그만 6.25가 터졌어요. 나는 피난 가기 전, 돈다발이 가득 든 항아리를 부엌 아궁이 앞에 아무도 모르게 묻어놓고 갔지요. 부산에 가서 처음은 매일 여관에 처박혀 숨어있었어요. 그러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형은 해군에 입대하고, 나는 동래온천에 있던 제2보충대대에 입대했어요. 다행히 나는 그 부대에서 인사와 경리를 제대할 때까지 4년 내내 보게 되었지요. 휴전이 되고 제대해 집으로 와보니 숨겨둔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요. 앞이 캄캄했지만 무작정 서울로 가 동대문 시장의 거래처로 찾아갔어요. 그분은 돌아온 아들 보듯 나를 반갑게 대하며 외상으로 잡화 한 차를 내주었어요. 그걸 싣고 오자, 워낙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당일 다 팔렸어요. 훗날 그분은 나를 붙잡고 자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네 아버님 덕'이라며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과는 돈거래를 하지 말라는 좌우명을 말했어요. 그분은 큰 건물을 사서 동생에게 관리를 맡겼는데, 나중에 보니 소유주가 동생으로 바뀌었더래요. 그 순간 아버님 말씀이 떠올랐고, 그 후로 그걸 철칙으로 지켰다는 거예요."
이 이사장은 생전 지병인 당뇨를 앓지만, 꼭 제시간에 식사하고, 약을 먹고 적당한 운동과 휴식을 취한다. 가끔 자식들과 손자들의 안부 전화에 반가워하고, 새마을금고 식구들이 반갑게 인사를 할 때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고 말했다. ‘내 한 몸 열심히 일해 여러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장학회 사업이야말로 어떤 사업보다도 보람 있는 사업’이라는 어록을 남기고 2016년 3월, 87세의 일기로 아름다운 삶을 마감했다.
참고문헌_이야기가 있는 송정,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