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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농업의 중심, 재진농장

23.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by 조연섭
선진농업의 주역, 재진농장

선진농업 중심에서 지역 농업을 일군 '재진농장'은 동해 현재 동해역(북평역)에서 나외 정면 우측 골목으로 100여 미터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한옥 한 채와 이층 양옥집, 온갖 나무와 화훼가 잘 가꾸어진 정원이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일대는 10수 년 전만 해도 송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농장'이 있던 자리였다. 지금의 모습으로 변한 전 2005년부터였다. 전국적으로 낙후된 소도시의 주거환경개선사업 일환으로 시작된 사업인데, 송정마을 곳곳에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무시하고 반듯한 도로를 개설했다. 예전 송정의 모습은 '동해항' 축조로 1차 사라졌는데, 이 도로로 인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고향 떠났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송정 토박이도 옛날 골목길을 떠올리며 가다가는 큰코다칠 만큼 변해버렸다. 연차적으로 시행된 이 도로로 인해 옛 모습이 가장 변해버린 곳이 '재진농장'일대이다. 3천여 평이나 되던 농장이 사방으로 난 길과 '농산물종합시장', '북평단위조합'(현 북평농협 송정지소)'제빙공장'으로 잘리고 이젠, 천여 평도 안 되게 남아버렸다. ‘재진농장'은 해방 직후부터 영동지방에서 유일한 선진농업의 교육장이었다. 농장주 장재진(1924~2008)씨는 '농사도 배우면서 지어야 한다.'라는 소신이 있었다. 오랜 세월 부모와 이웃 사람에게 익혀온 농경법과 작물만으로는 가난을 이겨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소신은 송정초등학교 '사이또유지' 교장의 훈화와 교육에 영향을 받았다. 송정초등학교 2회 졸업생인 그는 '60년가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재진농장 교육장면, 사진_동해문화원 DB

"이쯤 되니(학교운동의 정지 작업, 정원과 울타리에 수십 수의 관상수, 조경수 정원수 심기, 화단의 화훼, 농사 실습장과 시험장의 파종, 육묘, 온상 설치법 등등) 후원회와 몇몇 학부형들이 들고일어나 '해도 너무한다. 우리가 아이들 공부시키려고 월사금 줘가면서 학교 보냈지, 집의 일은 전혀 못하고 남의 일 하라고 학교 보낸 중 아느냐., 그리고 이곳은 공부시키는 곳이지 농업학교가 아니지 않으냐?라고 학교에 쳐들어와 항의 농성을 하자 교장 왈 '인간다운 인간으로 길러 언제 어느 곳에 가도 쓸모 있고 환영받는 인간으로 만드는 절차과정이니 안심하고 믿어 달라.'라고 했다. 나 장재진은 이런 교장을 만났기에 오늘날의 '재진농장'과 농업인 장재진이 존재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학교 졸업 후(1943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나고야의 '히야가와' 농장에서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훗날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이 아니고 소개한 사람으로 정정했음) 박사를 만나 문하생이 되었다. 우 박사는 1960년 귀국하여 제주도 귤 재배 보급, 무 배추 오이 양파 양배추 등의 개량종자 개발을 하고 무엇보다 무병 씨감자를 보급해, 전 국민의 식량난 해소에 큰 기여를 했던 분이다. 장재진 씨는 고무신 박사로 통한 박사의 소탈한 성품과 산진농업 교육에 대한 열정을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재진농장;을 열러 농민 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60년대 초 재진농장에서 교육을 받은 최정길(남, 70, 2014)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대단했던 분으로 회상했다.

"전국적으로 4H가 활성화도기 전부터 재진 씨는 선진농업을 시작하고 교육생을 길렀어요. 우리 지역의 지리적 요건인 좁은 토지의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게 급선무라 했어요. 복합영동을 주창하고 교육을 강조했는데, 이것도 강의 위주가 아니라 실습위주로 했어요. 농고 재학생이나 졸업생,, 농촌지도자는 순차적으로 교육을 받았어요. 타 지역 교육생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대신 실습 노동력으로 서로 상쇄하는 방안으로 오래도록 지속되었어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워낙 교육을 많이 해서인지 교수나 교사처럼 어렵거나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했지요. 특히 우리 지역 사투리와 우스갯소리를 많이 넣어서 강의를 했어요. 재진농장은 많은 당시 젊은이에게 꿈을 심어주었어요. 예를 들면 힘센 소만이 '보그래'로 논밭을 가는 중 알았는데, 기계가 밭을 간다고는 상상조차 못 할 때였어요. 그런데 재진농장은 일본에서 수입한 '진일경운기'가 있었어요. 처음 보는 기계 보듯이 많은 교육생들이 둘러서서 여기저기 만지며 신기해했어요. 나도 이때 충격으로 훗날 어느 지역보다 빨리 '구미기계화영농단'을 조직해, 정부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제도에 선정되었지요. 그때 콤바인, 이양기, 탈곡기, 고압분무기, 파종기 등을 갖추어 기계화 영동에 발을 딛게 되었지요."

쥐 잡기 운동 시작, 재진농장

장재진 씨의 업적은 한두 가지사 아니었다. 기온이 따뜻한 지역에서만 재배되던 양파와 양배추를 시험 재배하기 시작했다. 땅굴을 파서 거기에 짚과 인분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열 효과를 내게 해 양파 종자를 보관했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다 결국 성공해 인근의 양파 재배를 권장했다. 또한 '북평해수욕장'으로 전국에서 손님들이 몰려오자, 송정지역 농민들에게 참외와 수박, 가지, 오이 등의 채소 재배를 교육했다. 당시 만경대에서 송정 앞들을 내려다보면 원두막이 백여 개 보일 정도로 많았다. 또 새마을 운동이 한창 벌어질 즈음 강원도청, 농림부장관, 청와대 등에 '쥐 잡기 운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진정서를 올려 결국 채택이 되고 전국적으로 시행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쥐 잡기 운동에 참여한 지역거주 박진덕(여, 65)씨는 당시를 회상한다.


"당시 학교 다니던 시절은 학교에서도 쥐 잡기 운동에 동참했어요. 왜 그렇게 잡은 쥐꼬리를 가지고 오라고 하는지 정말 짜증 날 정도였어요. 우리는 쥐 잡기도 힘들고 잡은 쥐꼬리를 어떻게 자르나요. 그래서 머리를 쓰기 시작했죠. 당시 동해안은 오징어가 개락이어서 오징어 다리를 쥐꼬리로 둔갑시키는 거였어요. 오징어 다리를 자르고 일단 붙어 있는 이물질을 전부 시멘트 벽면 등을 활용해 다 털어내고 다음에는 검은 연탄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오징어 꼬리를 발로 굴립니다. 한참을 굴리고 나면 오징어 꼬리가 검은 쥐꼬리 비슷한 모양이 됩니다. 그럼 다음날 학교에 제출하곤 했었죠."

쥐 잡기 운동 참여, 사진_동해문화원 DB

송정의 전성기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중반까지였다. 특히 도계, 통리, 장성 등의 탄광지역과 황금어장이 형성되는 묵호항, 구름처럼 몰려오는 해수욕객, 쌍용양회 동해공장 준공과 증설, 동경사 창설 등의 호재로 많은 고등소채와 특용작물이 필요했다. 장재진 씨는 농산문 집산센터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지역의 뜻있는 농업인의 최준덕, 안우흠, 서진철, 김부기, 이건방, 심원택, 최계철 씨 등 30명과 함께 농장 입구에 '농산물종합시장'을 설립했다. 공판장과 사무실을 짓고, 탄광 지역으로 가는 첫 기차 시간에 맞춰 열리는 새벽시장을 열었다. 시장은 매일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밤늦게까지 농산물을 다듬어 새벽에 지게, 리어카, 달구지, 경운기로 싣고 와 중간 상인에게 넘겼다.


'재진농장'에서 생산한 농산물은 늘 한 값을 더 받았다. 오이만 하더라도 일반농가는 3월에 파종해서 7월에 수확하지만, 재진농장은 하우스에서 11월 파종해, 3월에 수확하니 희귀품으로 늘 취급되었다. 일반농가는 '재진농장'에서 배운 대로 하려고 해도 하우스 설비비용 부담, 난방비 부단, 지식 부족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선뜻 선진 농업을 할 수 없었다. '재진농장'은 도 신선한 농산물의 저장에 대한 아이디어로 ㄱ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제빙공장'을 설립했다. 얼음을 만들어 농산물 집하장이나 대형 식당 등에 납품했다.


송정의 호황은 영원하지 않았다. 수십만 평의 앞들과 해수욕장이 항만으로 개발되고, 38 국도의 확포장,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폐광이 속출하자 농산물시장도 타격을 입었다. 급기야 폐쇄 조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처음부터 집약농경법을 추구했던 '재진농장'은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온실과 하우스를 이용한 수석, 분재, 화훼 재배였다. 이럴 즈음 '재진농장' 맏 며느리로 시집온 권정숙(여, 67) 씨는 시아버지의 열정과 농장에 반했다고 회상했다.

재진농장 간판이 보이는 농수산물시장, 사진_동해문화원 DB

"70년대 중반만 해도 분재나 수석 동호인들이 많지 않을 때였어요. 또, 그게 돈이 될 줄 몰랐어요. 아버님은 당시 '상록회 회보'에 '분재 가꾸기 기술'에 대해 연재했고, '자유세계'를 비롯한 각종 언론에 아버님에 대한 기사가 자주 났어요. 또 5미터가 넘는 선인장, 수백 년이 넘는 주목 분재, 폭포 모습의 괴석 등의 볼거리가 '재진농장'에 엄청 많다고 보도됐어요. 많은 방문객은 우리 농장을 구경하다 무궁과 분재나 망고 등의 기발한 분재를 보고 감탄했어요. 이웃사람들은 '분재 하나 값이 정말 수천만 원 나가나?'라며 궁금해 묻곤 했어요. 제빙공장 하던 자리에 토, 일요일은 예식장으로 활용하고, 평일은 남편이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셨어요. 특이한 것 중 하나는 결혼식 주례를 우리 아버님이 맡아 놓고 했지요. 워낙 교육을 많이 하신 분이라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근면 성실을 당부하며 주례사를 재미나게 이끌었지요. 교육생이나 젊은이들은 아버님을 선진 지식인으로 인정하고 따랐지만, 송정의 나이 드신 어른들은 술 담배를 입에 안 대고 외골수로 산 재미없는 분이라 말하곤 했지요. 아버님은 또 시간만 나면 나를 앞에 앉혀놓고 지난날의 행적을 기록했어요. 아버님이 구술하면 내가 받아썼지요. 이때, 삶의 행적에 대한 기록으로 전반적인 명상을 하게 되는 습관이 생겨 훗날, 제가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그리고 언론에 실린 아버님의 가사나 사진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보관했지요.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아버님은 그 어렵던 시절에 농민들에게 농업 기술을 보급해 경제적 부를 주고, 평생 한길을 꿋꿋하게 걸으신 멋진 분이라 기억해요."

참고문헌_이야기가 있는 송정,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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