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CINEMA 잡변

인간으로서 인간 존재를 초월할 수 있는가?

-<트랜센던스>, 초월하지 못한 이카루스의 추락-

by 코지애미

*미수정 (저장일 2018.05.16.)

상상과 과학기술의 특이점을 향하여

신화에서 문학, 그리고 영화까지

수메르의 신화로 내려오는 이야기 중 인간의 창조와 관련된 것이 있다. 상급 신과 하급 신 두 부류가 있었다. 상급 신들은 노동을 하기 싫어했고, 하급 신들에게 자신들의 노동의 의무를 지웠다. 하급 신들은 항변할 지위가 아니었으므로 시키는 대로 했지만, 결국 자신들도 일이 하기 싫어지자 책임을 전가 할 다른 대상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킨다. 이에 상급 신들은 노동을 감당할 원시 노동자로서 인간을 창조하게 된다. 인간 창조에는 폭동 주모자인 작은 신 한 명의 피와 살이 찰흙과 함께 쓰인다.

인간은 신들의 의복과 곡물 등을 위해 일하는 최종 노동자가 되었다. 하지만 피와 살을 물려준 신 못지않게 영악했다. 그들만의 또 다른 노동자를, ‘로봇’을 만들어낸 것이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만들기를 그러했듯, 인간도 자신의 ‘피조물’을 만드는 데에 지극한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부었다. AI에 대한 가능성이 대두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사는 자동화된 기계에 대한 막연한 상상을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구체화 시켜왔다. 인조 인간류의 기계장치를 그려낸 희극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카렐 차페크의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로봇’이라는 단어와 개념이 만들어졌다. 수메르 신화에서와 같이 로봇을 만든 단 하나의 목적은 노동에 종사시키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과학기술의 발달은 전력이라는 원동력을 바탕으로 인간이 해야 하는 많은 노동을 대체하게 되었다. 인류를 노동으로부터 구원해주리라는 강한 믿음 아래 수많은 기계장치들이 개발되고 이용되고 있지만, 그 기계장치들을 통해 새로운 노동을 하고 있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긴 하다.

그야말로 ‘기계적인 동작’만 가능했던 기계장치가 새로운 ‘특이점’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그 기반에는 과학기술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 즉 인간 존재에 대한 정보라고 할 만한 것이 축적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지할만한 사항 중 하나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현존하는가? 인간이라는 개체를 일반명사로서 특정 지을 만한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각각의 인간 개체가 ‘인간’이라는 명명 아래 공유하고 있는 것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와 같은 질문과 그에 대한 다양한 사색들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지각’할 수 있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류가 아님과 동시에 인간에 준하는 존재 AI를 꿈꾸기에 충분했다.



상상과 악몽 사이의 줄타기

특이점이라는 것은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기점을 말한다. 한 동안 바둑계는 물론, 모든 전문분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알파고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백전 무패의 기록을 단 한 번, 유일하게 깬 것은 이세돌 뿐이었다. 인간 지성이 발휘할 수 있는 영역 중 가장 많은 사고를 필요로하는 게임이었던 바둑의 권좌를 알파고가 차지하자, 창작의 영역은 서둘러 자기방어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기에 맞게 소설을 썼다는 인공지능까지 등장하자, 인간 고유의 영역인 예술적 창작까지 위기를 모면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사람마저 생겼다. 인간 존재의 고유성을 침해당했다는 듯이, 알 수 없는 실의감에 빠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다양한 각본의 패턴이 입력되어 단어가 선별되었고, 그것을 조작하는 ‘사람’이 존재해야했음이 드러나자 안도의 한숨을 겨우 내쉴 수 있었다. 허무맹랑하기만 했던 로봇이 지구를 점령하는 블랙 유토피아가 도래될까 두려움에 떠는 일도 어쩌면 괜한 일이 아닐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 사건들이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기술력을 가지고 신이 그러했듯, 신이 인간을 창조했듯 피조물을 만들되, 그것들에게 종속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로봇 혹은 AI에게 굴복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인간만이 가진 능력, 인간의 정체성, 혹은 인간 고유의 영역조차도 넘겨주고 싶지 않아한다. 신은 여전히 인간에게 ‘신’이듯 말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본성을 가졌나?

인간은 기계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곤 하는데 그것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인공지능이 인간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다. 둘째,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셋째, 인간을 그들에게 종속시킬 수도 있다.



인간은 자각하는 존재이다

먼저, 첫 번째로 인간이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꿈꾸면서도 두려워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인간이 AI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인간 고유의 특성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하게 만든 점에서 로봇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로봇이라는 타자를 상정해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일찍이 인류발생과 함께 존재의 근원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을 품어온 것이 인간이다. 그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할 때 가장 그럴싸한 대답을 전하는 것은 종교 혹은 신화였다. 그것들에서는 태초의 전지전능한 존재가 세계 혹은 우주를 창조하고, 수많은 피조물로써 자연을 빚었다. 신적 존재가 만든 세계를 다스리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가르친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의 노동을 대체시킬 존재로써 인간이 창조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중세를 지나 인간에 대한 자각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우리 존재에 대한 목적론에 회의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졌다. 우리 존재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 태어난 것 이기에는 너무나도 고귀한 존재이며, 자기 존재를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봇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의 목적성’유무와 스스로에 대한 ‘자각능력’에 있다.

또한 많은 SF문학, 영화 등에서 주지하다시피, 제아무리 뛰어난 성능을 가진 AI라 할지라도 그것이 감정을 느끼는 것을 ‘고장’으로 본다. <바이센테니얼맨>과 <A.I>라든가 <히노키오>, <공각기동대 : Ghost in the Shell>, <HER> 등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이는 인간만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 한낱 기계장치가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고, 느껴서는 안 된다는 발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자 로봇에 대해 느꼈던 생존의 공포가 차츰 인기를 잃더니, 로봇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서정적인 두려움, 혹은 로맨티시즘을 불러일으켰다. 감정을 경험하는 인공지능은 ‘자기혼란’을 겪고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감정지각의 시작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사랑을 받으며, 더 많은 사랑을 갈구한다. 급기야는 존재론적 깨달음을 얻어 궁극적인 존재자가 되기도 한다. 즉, 정리하자면 인간이 로봇 혹은 인공지능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첫 번째 이유는 인간 고유의 불가침 영역을 그것들이 침범할 것에 대한 우려이다. 지키고자 하는 것이라 함에는 무목적적 존재가치, 자각능력, 감정지각과 같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죽는다

두 번째로 기계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그들이 인간의 본성이자 한계를 능가할 것이라는 가능성에 있다. 인간은 죽는다. 그 어떤 논증으로도 반박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특성이라 함에 ‘죽음’은 필연적이다. 오히려 이 ‘죽음’이라는 한계를 직면할 때 비로소 생애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인간과 달리 기계는 전력 혹은 어떠한 기계적 동력으로 ‘작동’되므로 기계적 결함이나 고장이 아니고서야 전원이 꺼지는 것 이상의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빠르게 ‘생산’되어 오래도록 ‘작동’하는데 힘까지 좋으니 어찌 로봇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지닌 태생의 숙명인 죽음을 가지지 않은 기계에게 두려움이란 없고,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전쟁을 일으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킬 것만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와 같이 인공지능이 고차원적인 진화(라고 해봐야 인간의 상상 속에서 뿐이다)를 거치면서 인류와 상생 가능한 존재로 그려지곤 한다. 친구가 되기도, 가족이 되기도, 연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인간이 기계라는 타자에 의한 생존 불안을 느꼈다면, 요즈음에는 인간인 나는 죽고, 인공지능이 영원한 것에서 슬픔을 느끼고 자기 존재 내부의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곤 한다.



인간은 주인이 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로봇에게 종속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인간이 수명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고귀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스스로가 만든 피조물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굴욕적이다. 애초에 로봇을 만듦으로써 인간이 더욱 편안해지자고 한 것인데 노동이 추가된다면 더욱 비참한 것이다.

이상으로 인간이 인공지능의 무한한(무한할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갖는 두려움을 세 가지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며,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방편이 된다. 점점 더 인간을 닮은 타자를 상상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히고 있는 것이다.

‘특이점Singularity’ 그 이상의 현실, ‘초월Transcendence’

많은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데에 익숙했던 서양문화의 기반 아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여 보았다. 토마스 홉스는 이를 부정하고 인간은 기계적인 행동이 가능한 그 자체로 보기도 했다. 인간의 본성을 논함에 있어서 육신과 정신의 상관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개념이다. 칸트를 비롯한 지성주의는 육체를 형이하학의 범주로 몰아내었다. 그러나 격하된 육체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 것은 메를로 퐁티였다. 그는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육체와 감각을 말한다. 육체는 더 이상 생애의 한계를 지닌, 잠시 머무르는 몸이 아니다.



윌이 초월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윌이 예언한 인공지능의 미래는 초월한 인간으로서, 육신을 벗어나도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인공지능으로 새롭게 부활한 ‘윌’은 기존의 AI를 초월했다. 단순히 기계적 장치와 데이터베이스가 아닌, 살아있던 인간의 기억과 감정, 의지가 부활한 것이다.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인 죽음을 초월하여 영생을 누리게 되었고, 더 나아가 자신을 새로운 객체에 복제시켜 증식시킬 수 있게 된다. 육신을 초월한 ‘정신’이 훼손된 것을 다시 소생시키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의 기억이 보존되어도, 육체를 만들어 기억을 다시 주입해 현생해도 그는 ‘윌’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왜 믿어주지 않았’냐는 질문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억만으로는 그 자신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는 에블린을 업데이트시킴과 동시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눈을 감기까지 스스로는 언제나 윌이었음을 말한다.



초월에 이르지 못한 이카루스의 추락

윌이 ‘인공지능 윌’로서 부활함에 있어 진정한 초월을 이룩하고자 했다면 어떠해야 했는가? 여기서 니체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윌이 진정한 초월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가치에 더욱 엄격했어야 했다. 단순히 데이터를 확장시키고 본체를 찾아 나서며, 통신망을 넓히기만 해서는 안 되었다. 주인으로서의 인간 주체로의 초월을 위해 객관적으로 가장 옳은 가치, 궁극적으로는 가장 합리적이고 정당한 가치를 탐구해 그것을 실현시켰어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임에도, 인간 존재를 뛰어넘는 초월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윌이었던’ 윌이 초월을 시도했음에도 자신이 인간임을 주장하고 신체를 만들어낸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결국 자기 존재가 초월적 존재가 아닌 인간적 존재임을, 정신이 육체를 떠나 온전한 자기존재로서 현존할 수 없음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극한의 존재가 되고자 했음에도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했던 윌은 결국 육체로 추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늘 그래오지 않았습니까?

윌이 처음 제시했던 초월은 너무나도 초월적이라서 한 기자가 묻는다. ‘새로운 신을 창조하겠다는 말인가요?’

시대를 막론하고 동서고금에서 언제나 인간은 자연 앞에 나약한 자기 존재를 깨달아야만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심리적 불안, 설명할 수 없는 현상 등에 인간은 두려움을 느끼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 ‘신’을 ‘만들었다’. 그것은 한때 동물이나 자연이었고, 사고능력이 고등해지자 종교의 신이었으며, 이성이 차지한 시기에는 과학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윌의 말대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존재의 한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을 경외심에 가득 차 받아들였다. 거창한 설명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질문하는 이에게 털털하게 대답하는, “우리 인간은 늘 그래오지 않았습니까?”라는 윌의 답변은 인간존재의 나약함,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한 초월존재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영화 <트랜센던스>는 더욱 두려운 AI 상상물을 만들어내어 막연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것이 아니다. 여타의 영화가 내포하는 것과 비슷하게 인간 존재에 대한 심고한 고찰을 하게 만드는 작품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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