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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렬 Oct 15. 2018

추억의 빙판 빙질 관리

<꼬불꼬불 컬링 교과서>저자와의 만남


어린 시절 부모님 손에 이끌려 체험한 스포츠는 성인이 된 후 어떻게 추억될까. 추억으로 남는 경우와 남지 않는 경우의 차이는 뭘까. 이틀 전 의정부컬링장에서 열린 어린이를 위한 스포츠 교양서 『꼬불꼬불 컬링 교과서』 저자와의 대화 및 컬링체험 행사에 다녀오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거리다. 이날 행사는 30여명의 어린이들이 책 저자들의 컬링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1부와 경기장에 들어가 국가대표 지도자의 지도로 컬링 체험을 하는 2부로 진행됐다.

1부가 시작된 지 20분 정도 지날 즈음 내 앞에 있던 아이가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빨리 나가고 싶다며 투정을 부렸다. 옆의 친구도 고개를 끄덕이며 딴청을 피웠다. 이를 눈치 챈 부모는 입에 묻은 짜장면 양념을 닦아주듯 아이를 다독이고, 추운 겨울 열린 점퍼 지퍼를 올려줄 때의 손길로 구부러진 아이의 자세를 잡아주었다. 반면 정중앙 앞자리에 앉은 아이는 “왜 책 제목을 꼬불꼬불한 컬링이라고 지었나요”와 같은 질문을 세 개나 던질 정도로 매우 적극적이었다. 저자를 비롯한 주변에 학부모들은 아이가 질문을 할 때마다 감탄과 박수를 보냈다.    




내가 주목한 건 아이들이 아닌 부모였다. 비록 두 아이의 사례를 들었지만 다른 부모들도 모두 아이보다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부모들이 먼 거리 긴 시간을 감수하고 수도권 끝자락 의정부에서도 구석진 곳에 위치한 국내 최대 컬링경기장을 찾은 이유를 생각해봤다. 아이에게 평소 접하기 힘든 컬링을 체험시켜주고픈 마음, 그러니까 좋은 걸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 게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됐다. 부모님은 내게 어떤 체험을 시켜주려 했는지 추억을 더듬어봤다. 쉽게 떠올려지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보다 너무도 생뚱맞은 잡채 당면과 피곤하고 씁쓸했던 인천으로 바다구경을 갔던 날이 어른거렸다.

10살 무렵 아버지 조기축구회 행사로 난생처음 방문한 군부대 병사식당에서 배식 받은 식판에 담겨있던 아이스커피  빨대만큼 두꺼운 잡채 당면이 떠오르다니, 정말 생뚱맞다. 피곤하고 씁쓸했던 바다구경은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바다를 갔던 날이다. 인천 월미도를 갔는데 당시 우리 집은 자가용이 없어서 왕복으로 장작 6시간에 걸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월미도에 도착해 유람선을 타고 근처 횟집에서 회를 먹고 다시 의정부행 전철에 올랐다. 어째서 내 추억은 이따위란 말인가. 아아..컬링스톤만한 머리통을 지닌 슬픔짐승이여.  

사실 기억이라는 건 괴팍한 성질을 지녔다. 좋은 기억이 제공하는 기쁨과 위로는 희미하지만 나쁜 기억이 제공하는 고통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몇 년 전 부서질 듯한 굉음을 내며 닫히는 문소리에 기겁을 하고 잠에 깼던 날이 생각난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한 채 두려움에 심장이 부들부들 떨렸다. 언제까지 이런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지 부친을 향해 무력감과 적의가 일어났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우리 집이 아닌 친구네 집이었다. 새벽에 일을 나간 친구가 급한 나머지 문을 쎄게 닫고 나간 것이다. 이토록 트라우마는 무섭도록 질기다. 따라서 내 고민과 과제는 두 가지다. 나쁜 순간을 만들지 말기와 좋은 순간을 많이 만들고 만끽하기. 좋은 기억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싶다. 부모들이 자녀에게 스포츠나 예술 체험을 해주려는 것도 어찌 보면 순간의 감각을 만끽하는 기회를 보다 많이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에 기인하지 않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컬링장에 온 아이들이 매우 부러웠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가 훗날 컬링에 대한 기억을 까맣게 잊고 지내겠지만, 마치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우연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0년 만에 본 친구를 알아보는 것처럼, 어느 순간 어린 시절 컬링을 했던 기억이 빙판처럼 반짝이는 날이 있을 것이다. 추억의 빙질 비법은 좋은 추억을 자주 떠올리게 하는 것 아닐까. 이를테면 월말에 이번 달에 가장 즐거웠던 추억 세 개를 적어 보기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어제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에게 올해 가장 좋았던 추억 세 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조카는 술술 추억을 꺼냈다.

“첫 번째는 엄마가 새우버터 구이를 해줬던 날이고, 두 번째는 여름에 친구들이랑 시민회관 수영장 가서 놀았던 거, 세 번째는 추석 때 평택 친척집 갔을 때.”

누나와 엄마의 음식 솜씨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누나가 3일 동안 우려낸 육수로 끓인 김치찌개보다 엄마가 수돗물로 30분 만에 만들어낸 김치찌개가 훨씬 맛이 좋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준 맛있는 음식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을 텐데, 엄마가 내 생일 때 해준 잡채를 전부 합하면 드럼통 하나를 가득 채울 텐데, 컬링스톤 크기 두상에 둘러 쌓인 내 알량한 두뇌는 아이스커피 빨대 굵기 만한 병사 식당 잡채를 떠올린다.

이제부터라도 좋은 순간을 많이 만들고, 추억을 떠올리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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