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창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민 Jul 21. 2019

울릉 기행

남자 셋 무계획 여행

간밤에는 비가 내렸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늘 저 멀리 보이던 산의 능선은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밖이 어색하지 않았다. 여행을 많이 다녀서 그런가? 방학이 되면 부모님을 따라 가끔 비행기를 타던 기억이 난다. 조금이라도 멀리 갔다 하면 주변 지인들에게 기념품이 필수였던 때다. 산 역시 많이도 다녔다. 소백산, 태백산, 지리산, 주왕산 등등. 내려올 생각은 않고 앞만 보며 겁 없이 오르기만 시절이 아주 그립다. 초등학교 때 여행을 다녀온 뒤 '현장학습 보고서'를 끄적이던 버릇이 남았기 때문에 글을 쓴다.


여행은 내게 집으로 돌아가기 전 반드시 거치는 일종의 절차이자 집의 편안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하나의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를 갈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굳이 정하자면 최대한 멀리 그리고 나중에 가기 어려운 곳이 목표였다. 사실 누구와 같이 가느냐가 더 중요했다. 마음 맞는 동기 2명과 함께 가기로 했다. 함께 몇 시간을 아무 말도 않고 있어도 편안한 친구들이었다.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배를 타러 가기 전 항구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봤다. 고기는 준비해 왔으니 됐고. 햇반, 라면부터 넣자. 쌈장도 빼먹으면 안 되지. 아니 큰 거 말고 작은 거. 상추만 살까? 아냐 깻잎도 사고 이참에 송이버섯도 사자.


나름 셋이 머리를 맞댄 걸 계산대에 가져갔다. 얼굴을 쓱 보더니 아저씨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제일 중요한 게 빠졌네."


"뭔데요?"


"소주. 섬에서 젤 비싼 게 술이지."


술에 약한 셋의 눈빛이 빠르게 교차했다. 남자 셋이서 조그맣게 쫑알대는 소주의 구매 여부가 못마땅했는지 아저씨는 그냥 가보라고 했다. 젊을 때 그러면서 배우는 거라는 말을 하며. 일단 나와서 걸었다. 우리는 걷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띈 편의점에서 소주 세 병과 과자를 샀다.


섬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는 가장 높을 때였고, 선글라스와 선크림 중 어느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뭐 괜찮다. 다행히 햇빛은 따갑기보다는 오히려 따스했으니까. 머릿속에서 그게 무슨 합리화냐라며 빨리 옆에 있는 놈의 선크림을 빌리라고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타는 것도 괜찮겠지.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우선 배가 고프니 밥을 먹어야겠다. 네이버 블로그가 보증하는 두꺼비식당에 들어가 남자 셋은 말없이 밥을 먹는다. 울릉도의 첫 민심은 감격적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젊은 총각들을 보니 군대 간 조카 생각이 난다며 반찬을 듬뿍듬뿍 주었다. 서비스라며 어묵을 무쳐 주기도 했다. 오징어가 참 맛있었다. 오삼불고기를 주문했는데 불고기보다 오징어에 손이 훨씬 많이 갔다.


펜션에 가는 도중 탄 택시에서 울릉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냐 물었다. 기사는 활짝 웃었다. 울릉도 토박이를 잘 만났다며 사진까지 잘 찍어줄 테니 4시간 투어에 18만 원을 달라고 했다. 토박이라는 그의 자랑답게 울릉도는 흥미로워 보였다. 좀 더 얘기를 듣다 가격을 혹시 낮출 수 있겠냐 넌지시 물으니 3만 원이 훌쩍 사라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명함을 받았지만 연락하지는 않았다. 숙소 사장님께 부탁해 다음날 아침에 인당 2만 5천 원에 투어를 다녀왔다.


갈매기만이 하늘과 바다를 구분 지었다


기대하지 않고 온 것이 미안할 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물은 가까이에서는 한없이 투명했고 마치 유리와 같았다. 수심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이는 멀리 내다볼수록 검은빛을 내게 했다. 하늘은 한없이 넓었고 바다는 하늘을 품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포근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래도 여행을 왔으니 기념사진은 찍어야지. 괜찮은 곳을 점찍어두고 카메라를 놔두러 가는데 애매한 곳이었다. 뛰어내리면 코앞이었지만 둘러가면 몇 초가 더 걸렸다. 고민을 하다 자신 없이 뛰어내리는 찰나에 미끄러졌다. 왼팔 안쪽에 길게 상처가 생겼다.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바닷물에 씻을 수는 없었다. 피와 바다. 뭐가 덜 더러울까 싶기도 했지만 애써 참았다. 바위가 무참히 그어놓은 자상을 물끄러미 보다 보니 얼른 물로 씻어내고 싶었다.


가까운 약국을 금방 찾을 수 없어 숙소로 돌아가 혹시 후시딘이 있느냐 물었다. 잠시 기다리라 하더니 주인은 대일밴드에 후시딘을 한 방울 떨어뜨려 주었다. 나가서 팔을 제대로 보여주어야 하나 생각하다 그냥 바르기로 했다.


얕고, 아주 넓게.


문득 며칠 전 일이 생각이 났다. 멀리 있는 친구가 힘들어 울었다. 수화기 너머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정말 위로가 될까. 마음속에서 여러 말 중 하나를 고르는 이 시간을 반대편에선 어떻게 생각할까. 이렇게 고르는 것 자체가 너무 계산적이게 보이지는 않을까.


위로도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상대방이 무엇이라 말을 하면 그게 성에 차지 않아도 일단은 그냥 고맙다.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하는 거지.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는 게 정말 가능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그냥 믿고 하기로 했다. 세상엔 그렇지 않아도 그냥 하고 보는 것들 투성이니까.


바다를 보며 먹는 고기는 아주 맛있었다. 다음에 또 먹고 싶었다. 소주는 두 병만 마시고 한 병은 냉장고에 넣고 왔다.


집에 돌아오니 바람은 울릉의 그것과 아주 비슷하게 서늘했고 짠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밤이 되어 어두웠지만 왠지 모르게 날씨가 개어 저 멀리 능선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B급으로 시작해 A급으로 마무리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