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시민의식에 대해서
정치. 신문에서 1면을 가장 크게 장식하고 내 생각에는 경제와 더불어 세상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축 중 하나이지만 왠지 딴 세상 이야기처럼 멀어 보인다. 작년 한 해는 일단 나에게 모든 면에서 아주 역동적이고 중요한 한 해였다. 대학병원의 임상현장을 보며 느낀 점이 가장 많았지만 그것 외에도 사회 전반적인 현상을 보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조국 사태와 그에 따라 극단적으로 나뉜 여론들이 기점이었다. (개인적으로 20대에게 정치의 참맛을 느끼게 해 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일들이 다른 정권에서도 비일비재했다는 것도 알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이번 일처럼 나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처음이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대체 정의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했다. 답을 찾아보려는 나름의 시도 중 하나로 마이클 샌댈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베스트셀러가 된 지 근 10년이 지난 이제야 읽었다. 개인으로서 앞으로 사회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셨다. 수업시간마다 담임선생님은 우리에게 능동적 읽기를 강조하셨다. 앞으로 나올 내용은 어떤 것일지 스스로 묻고 답하며 읽으라는 것이다. 사실 어렵다. 글의 의도를 계속 예측하면서 긴장 또한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그러한 방법이 매우 요구되는 책이다. 오랜만에 수능 비문학 지문을 읽는 기분을 느끼며 저자와 마치 대화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네이버 한자사전에 따르면 정치(政治)란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로운 것,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마땅히 그래야지. 그런데 어떤 게 바로잡을 것들이며, 또 그걸 정해주는 건 누가 해야 할까? 그러니까 일단 (사전적 정의이긴 하지만) 정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의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책에서 소개하는 정의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4가지인데, 조금 길지만 두고두고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저자가 정의를 어떻게 정의했는지는 마지막 4번째 관점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결론은 분명히 나와 있다.) 참고로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정치는 경제와 평행선에 있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정치는 경제, 법률, 인문, 자연과학 등 사회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것이며, 그렇다고 저 멀리에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으니 기원전 350년쯤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러한 가치 배분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안 끼는 데가 없다.) 그가 내린 결론은 '목적에 가장 적합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플루트를 누군가에게 주어야 한다면, 재산이나 타고난 신분, 외적 아름다움, 제비뽑기 등에 관계없이, 오직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플루트의 '목적'에 걸맞게 가장 플루트를 잘 부는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목적을 '텔로스'라고 칭했다. 일단 이런 목적론적 사고(ex: 돌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떨어지기 마련)가 가진 문제점을 다루기 전에 정치에 관해서 이 생각이 어떻게 통하는지 살펴보자.
그러니까, 정치의 정의로움에 대해서 논하려면 일단 정치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음, 그때그때 다르니까 투표를 통해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어 복지에 더욱 힘쓴다든가 하는 집단적인 어떤 목적과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으로 답한다. 정치의 목적이란, 무릇 동맹 관계를 맺어 상호 방위에 힘쓰거나 경제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과 같은 1차원적인 것에서 나아가, 사람들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여 공동선을 고민하며 판단력을 기르고, 궁극적으로는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라는 거다.
시민의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정치적으로 인정받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재산이 있는 사람, 다수결주의자의 말들도 중요하지만 최고 권력은 무엇보다도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를지, 치른다면 언제 어떻게 치를지를 결정할 자질과 판단력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쾌락과 고통을 나타내는 것을 넘어서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도구가 되는 언어 능력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가장 큰 본성이라 보고, 많은 연습을 통해 실천적 지혜를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집에 틀어박혀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며, 사람들과 생각을 서로 교류하며 여러 대안을 저울질해보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은 후세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게 되며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의'의 정의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목적론적 사고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노예의 본질에 맞게 태어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여성은 정치적으로 열등하게 태어났으므로 시민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정치론은 노예제에서와 같이 적합하지 않은 사회적 역할 수행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본성을 판단하기보다는 '자유'롭게 직접 자신의 역할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유주의 정치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일단 공리주의를 먼저 살펴보자.
자유주의의 주요 골자는 공리주의의 약점을 예리하게 파고들기 때문이다.
공리주의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인간의 본능을 가장 자극한다. 그 말인즉슨 단순해서 이해하기도 쉬우며, 대중들에게도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본능을 굳이 배제하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벤담의 공리주의 철학은 도덕적 및 정치적 기초로 삼는다. 하지만 아주 그럴듯한 이 논리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불행은 감내될 수도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되며, 개인의 의지와 개성 그리고 보편적인 인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고문과 같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단순히 쾌락의 총합과 고통의 총합을 저울질하려고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더러 이런 벤담의 공리주의가 가장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므로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분명 문제가 있다는 점도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벤담의 제자인 제임스 밀의 아들로 태어난 존 스튜어트 밀은 그래서 개인의 권리와 관련된 공리주의 오류를 어떻게든 그럴듯하게 고쳐 보려고 애썼다. 밀은 공리주의가 모든 가치를 하나의 기준으로 다룬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쾌락의 급을 나누려는 시도를 하며, 미술품을 보거나 오페라를 보는 행위가 집에서 잠옷 차림으로 넷플릭스를 보는 것보다 질적으로 더 우수하며 고급 쾌락이라 여겼다. 고급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수반된다고 하며 유명한 말을 했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공리주의가 하나의 가치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점을 보완하려고 했지만, 밀은 오히려 공리와는 무관하게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이상을 강조해버렸다. 왜냐면, 오페라가 넷플릭스보다 고급 쾌락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오페라를 더 좋아해서가 아니고, 그것을 고급으로 인식해서 더 좋아하며 더욱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흥미롭게 공감이 많이 가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단순한 목적보다는 그것에 어떻게 보이는지에도 분명 많은 관심이 있지 않은가?
드디어 자유주의 정치론이다. 잘 따라오셨다. 자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당연히 '자유'인데, 칸트는 천부인권에서와 같이 '인권은 하느님이 선물한 것'이라는 종교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적'이라는 말은 어렵게 하자면 다소 난해할 수도 있지만 (칸트의 철학이 어려운 이유다), 쉽게 말하자면 나 이외의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칸트가 주장하는 자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는 다른 개념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바닐라와 초콜릿 맛 중 선택한다고 하자. 자유로운 선택지를 놓고 골랐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칸트는 내가 선택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결정된 내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 지적한다. 내가 초콜릿을 선택하는 행위는 외부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칸트가 말하는 자유로운 행동은 사회적 관습을 따르기보다는,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우리를 우리 밖에 주어진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ex: 공부하자. 왜? 돈을 많이 벌어서 원하는 것을 사기 위해서)로 취급하지 않고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명은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추상적인 견해보다는 더욱 타당한 이유를 제공한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자살은 자신을 고통 완화 수단으로 이용하는 물건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옳지 않은 것이다. 칸트는 타살 또한 분노를 표출하거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다른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같은 이유로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공리주의를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복 극대화를 위한 목적을 위해서 인간을 사용하기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해야 하니까. 칸트는 공리주의에서와 같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다수의 기호나 쾌락에만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자유롭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자 했다. 칸트는 이런 시도 중 하나로 행동의 결과보다는 동기에 집중한다. 이는 우리나라 형법 제13조 인 ‘죄의 성립 요소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에서 보듯이 법률에도 영향을 분명히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헌법이나 혹은 정부가 설립되는데 동의한 바가 없다. 칸트는 이에 대중 전체가 동의한듯한 의무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법이 공정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롤스는 이에 이렇게 묻는다.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하겠는가? 나는 부자로 태어날 수도 있지만, 가난하게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분명 복지정책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질 것이다. 롤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출생의 우연뿐만 아니라 재능, 노력 여부 또한 우연의 산물이라는, 즉 인생은 운빨이라는 말까지 한다. 분명 모든 사람이 반발할 내용이지만 롤스는 한발 물러서며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사회 공동의 이익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로 살펴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정치의 목적과 일맥상통하며 저자인 마이클 샌델이 가장 이상적으로 꼽은 관점이다. (책에서 분명히 결론을 제시했다) 공동체란 말에 주목하자. 우선 당신은 타인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단순히 누군가의 가족으로, 직업 등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요소의 총합으로 흔히 바라보지 않은가? 이는 나 자신을 바라볼 때도 일맥상통한다. 즉, 개인은 사회로부터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바로 매킨타이어가 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서사적 설명이다. 개인은 큰 이야기의 한 흐름이며 사회적 맥락을 빼놓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설명은 인간을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니며 부담을 감수하지 않는 자발적 존재로 보는 개인주의적 시각과 분명히 대조된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서사적 해석은 위안부와 같은 과거 문제에 대한 배상 책임, 애국심, 연대감과 관련된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한다는 큰 장점이 있다.
공동체주의적 정의가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실생활의 반영에 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정의는 바람직한 사회적 규범을 개인에게 억지로 끼워 맞출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지만 공리주의나 자유주의는 종교와 같이 생활에서 당연히 쓰이는 여러 가치들을 철저하게 배제한 후 시민의 권리나 의무를 규정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 사회에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샌델은 도덕적, 종교적 신념이 정치와 법에서 빠져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샌델은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를 제안한다. 국가는 시민의 도덕적이고 종교적 신념을 모른 척하고 공적으로는 가급적 언급하지 않기보다, 다양한 가치가 무시되지 않도록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많은 연습을 통해 실천적 지혜를 쌓아야 한다고 언급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연습만이 습관을 만들고 그것이 변화를 이끌어 온다. 연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인간의 특기인 언어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과 생각을 충분히 나누고 여러 대안을 저울질해보며 이루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