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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Apr 04. 2020

21세기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책 '팩트풀니스' 리뷰)

2005년 당시 전국 오직 한 곳에서만 개봉된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도입부는 은하계의 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철거되기 직전 지구로부터, 지나가던 우주선에 히치하이킹을 얼떨결에 하게 된 한 주인공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이제 지구라는 고향을 잃은 우주 난민의 처지로 우주를 여기저기 불쌍하게 돌아다니며 여러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전에 책을 한 권 받는다. 책의 이름이 바로 영화 제목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며, 책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DON'T PANIC. 


일단, 겁내지 마세요




잘 모르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무지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전부터 자신이 잘 설명할 수 없는 분야에서도 소위 '아는 척'을 많이 해왔다. 역사책을 보면 지금은 당연시되는 과학적 사실이 그 당시에는 미친 소리로 취급되기도 한 걸 보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 때 살았다면 아마 평생 그게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죽었겠구나라는 생각과, 그렇다면 내가 지금 아는 지식 역시 상당 부분은 진리가 아닐 가능성이 더욱 크겠구나라는 생각. 


요즘에는 각종 미디어와 통신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지구 반대편의 소식도 바로 옆집 소식처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제 사람이 몇 명 죽었다는 소식은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는다. 미디어는 점점 자극적인 소식만을 들고 와야 사람들을 반응시킬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그에 따라 신경이 곤두섬과 동시에 더욱더 둔감해지게 되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세상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내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해 내 가족들과 친구들(나아가서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까지)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정녕 방법은 없고 세계는 보이고 들리는 것 그대로, 그러니까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 채 빈부격차는 좁혀질 일이 없고 다 같이 파국만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살던 때, 인스타에서 팔로우하던 작가(@jessoo)님이 포스팅한 책의 한 페이지가 눈에 띄었다. 곧바로 서점으로 가서 책을 샀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진짜 제목 대신 '21세기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왼쪽의 다람이 캐릭터로 유명한 재수 작가와 올린 포스팅




책 '팩트풀니스'는 세계에 대한 13개 문제로 시작한다. 일단 여기 링크를 눌러 한 번 문제를 풀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http://forms.gapminder.org/s3/test-2018 (갭마인더는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으로 심각한 무지와 싸운다는 사명감을 갖고 글쓴이와 가족들이 설립한 스웨덴의 비영리 통계분석 단체이며, 이름 Gapminder는 생각과 실제 사이의 Gap을 의식하고 줄여보자는 의미다.)


2017년 14개국의 각계각층(의대생, 교사, 대학 강사, 저명한 과학자, 투자은행 종사자, 다국적 경영인, 언론인, 정치권의 고위 의사 결정자까지 등등) 약 1만 2000명에게 테스트한 결과는 놀라웠다. 당시에는 12문제였는데, 정답을 맞힌 문제는 평균 2개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역시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해가 단순히 틀렸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라는 데에 있다. 당장 침팬지만 데려다 놓고 3개의 보기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해도 평균적으로 12개 중에 4개는 맞을 테니, 오히려 '무지'보다 나쁜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책 내내 '침팬지보다 못한'이란 농담 반 진담 반인 말로 독자를 채찍질한다. 


억울하게도 우리는 세상을 심각하게 오해할 만큼 잘못한 적이 없다. 우린 그저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 배웠고, 뉴스와 신문에서 말한 걸 듣고 자랐을 뿐인걸. 그럼 우리는 위에서 했던 13문제짜리 문제(단순 통계에 관한 문제이니 몇 년마다 업데이트가 된다)들을 매년 풀고 오답풀이를 해가며 지식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이 내 질문에 무척 극적이고 부정적인 답을 하는 이유는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 탓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추측하고, 학습할 때 끊임없이 그리고 직관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참고한다. 그래서 세계관이 잘못되면 체계적으로 잘못된 추측을 내놓는다. 한때 나는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이 낡은 지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조차 세계를 오해하는 걸 보면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악마 같은 언론이나 선전 선동, 가짜 뉴스, 엉터리 사실 탓도 아니라고 확신한다. 

수십 년의 강연과 테스트 경험 그리고 사람들이 사실을 눈앞에 두고도 그걸 잘못 해석하는 방식을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나는 마침내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은 우리 뇌의 작동 방식에서 나오는 탓에 바꾸기가 너무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29 페이지 끝자락부터 30 페이지 중간 즈음까지



인정하자. 어차피 평균 13개월마다 지식량은 2배로 증가하는데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다 아는 건 불가능하다. (설령 안다고 해도 전문가 수준으로 정말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러니 우리로 하여금 명확한 사실을 오해하도록 만드는 뇌의 작동 방식인 '본능'에 대해 공부하고 머리로 한 번 더 거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책은 이 본능 10가지에 대해 아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어떻게 그것을 잘 다스리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부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끄덕끄덕할 그래프 / 21세기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생각해볼 만한 거리가 또 있다. 스웨덴은 이미 1인당 GDP 11위 (우리나라는 28위) 국가다. 책을 쓴 사람을 생각해보자. 세계에 관심을 가진다는 이야기는 돌려 말하면 자국의 문제에 신경 쓸 필요가 아무래도 덜하다는 걸 뜻하지 않을까. 그래서 궁금해서 찾아봤다. 이 사람 말대로라면 스웨덴도 현재 우리나라처럼 엄청난 사회 간 갈등을 겪었을 텐데 옛날에는 대체 어땠으려나. (뉴스나 책에서 허구한 날 말하는 북유럽식 모델에 대한 왠지 모를 반감도 사실 어느 정도 작용했다) 


이것저것 찾아본 결과 나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도 똑바로는 아닐지라도 앞으로 점차 나아가고 있구나. 역시 우리나라도 세계의 우상향에 일조하고 있구나. 



19세기 말부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계급이 급속히 늘어났고 파업과 직장 폐쇄, 실업과 빈곤 등 사회갈등이 심각해졌다. 1938년 타협으로 자본 세력은 노조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복지국가를 통한 과감한 소득 재분배정책을 수용하는 대신, 소유 및 경영권 보장, 파업 자제를 약속받았다. 또한 기업 이익을 소유주의 소득과 분리하여 기업의 부의 축적이 주주 또는 개인의 자산이 되는 것을 최대한 막았다. 높은 소득세(1970년대 이후 최고 세율이 80%에 달함)와 재산세, 상속세를 통해 소유주의 부와 소득에 대해서는 매우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중략)


1970년대 기업 이윤의 일부를 노조가 관할하는 기금에 내는 방식을 노조가 제안하며 자본가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노사협력이 약화되며 결과적으로 1991~1992년 경제위기가 초래되었다. 사회적 조정과 협력의 중요성이 다시 부상되었으며 1990년대 초중반의 조세개혁, 복지개혁, 재정개혁이 정치적 조정과 타협에 힘입어 성공을 이루면서 스웨덴 경제와 복지국가는 더 안정되고 효율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김인춘,  <스웨덴 사례로 살펴본 사회갈등 해결과 국가 발전>



이게 바로 틈만 나면 미디어에 출현하는 '북유럽식' 모델의 대표적 국가인 스웨덴 역사의 한 단면이다. 100년이다. 산업화가 진행된 뒤부터 안정된 복지국가로의 정착에까지. (우리나라는 참고로 산업화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스웨덴 기준으로 아직 40년 정도 남았다ㅎㅎ) 이건 그렇다 치고, 그럼 스웨덴 사람들은 항상 자유롭고 건전한 성 가치관을 지녔었을까? 정말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에 바탕을 둔 선비의 나라라서 이렇고, 저들은 자유로운 감성을 지닌 유럽 사람들이라 매사에 저렇게 쿨해 보이는 걸까?



스웨덴 사람은 꽤 자유롭고 성과 피임에 개방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 문화가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 구스타브는 그 세대의 전형적인 스웨덴 남자였다. 자녀가 일곱인 대가족을 몹시 자랑스러워했고, 기저귀를 갈거나 요리를 하거나 집안 청소를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할아버지가 일곱 번째 아이를 낳은 뒤 큰딸이 피임을 권유하자, 자상하고 조용한 할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며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할아버지의 가치는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이었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그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스웨덴 문화는 변했다. 오늘날 스웨덴 사람은 거의 다 여성의 낙태 권리를 지지한다. (중략) 


오늘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는 마초적 가치는 아시아의 가치도, 아프리카의 가치도 아니며 이슬람의 가치도 아니고 동양의 가치도 아니다. 스웨덴에서 60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가부장적 가치이며, 스웨덴에서 그랬듯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라질 가치다. 불변의 가치가 결코 아니다.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251 페이지 중간부터
 254 페이지까지 



당연히 아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사실 엄청나게 신기했다) 어찌 됐건 우리 사회의 갈등은 사회가 발전함에 있어 나타나는 열병과 같은 것이며 우리나라나 세계가 급속히 나빠지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놀고 있지 않으며, 나나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자신의 위치에서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 


내 생각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해 한 분야에서 사람들이 나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게 사회의 효율성 면에서도 나을 테고 나에게도 여러모로 바람직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Reference


'인류의 지식 2배 증가 속도는 곧 12개월에서 12시간이 될 것' 기사 
https://www.industrytap.com/knowledge-doubling-every-12-months-soon-to-be-every-12-hours/3950

스웨덴 사례로 살펴본 사회갈등 해결과 국가 발전, 김인춘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연구교수
Yonsei-SERI Eu centre. EUBrief Vol.4 No.1 2012. 02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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