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책 '팩트풀니스' 리뷰)
2005년 당시 전국 오직 한 곳에서만 개봉된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도입부는 은하계의 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철거되기 직전 지구로부터, 지나가던 우주선에 히치하이킹을 얼떨결에 하게 된 한 주인공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이제 지구라는 고향을 잃은 우주 난민의 처지로 우주를 여기저기 불쌍하게 돌아다니며 여러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전에 책을 한 권 받는다. 책의 이름이 바로 영화 제목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며, 책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DON'T PANIC.
잘 모르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무지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전부터 자신이 잘 설명할 수 없는 분야에서도 소위 '아는 척'을 많이 해왔다. 역사책을 보면 지금은 당연시되는 과학적 사실이 그 당시에는 미친 소리로 취급되기도 한 걸 보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 때 살았다면 아마 평생 그게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죽었겠구나라는 생각과, 그렇다면 내가 지금 아는 지식 역시 상당 부분은 진리가 아닐 가능성이 더욱 크겠구나라는 생각.
요즘에는 각종 미디어와 통신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지구 반대편의 소식도 바로 옆집 소식처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제 사람이 몇 명 죽었다는 소식은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는다. 미디어는 점점 자극적인 소식만을 들고 와야 사람들을 반응시킬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그에 따라 신경이 곤두섬과 동시에 더욱더 둔감해지게 되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세상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내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해 내 가족들과 친구들(나아가서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까지)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정녕 방법은 없고 세계는 보이고 들리는 것 그대로, 그러니까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 채 빈부격차는 좁혀질 일이 없고 다 같이 파국만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살던 때, 인스타에서 팔로우하던 작가(@jessoo)님이 포스팅한 책의 한 페이지가 눈에 띄었다. 곧바로 서점으로 가서 책을 샀다.
책 '팩트풀니스'는 세계에 대한 13개 문제로 시작한다. 일단 여기 링크를 눌러 한 번 문제를 풀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http://forms.gapminder.org/s3/test-2018 (갭마인더는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으로 심각한 무지와 싸운다는 사명감을 갖고 글쓴이와 가족들이 설립한 스웨덴의 비영리 통계분석 단체이며, 이름 Gapminder는 생각과 실제 사이의 Gap을 의식하고 줄여보자는 의미다.)
2017년 14개국의 각계각층(의대생, 교사, 대학 강사, 저명한 과학자, 투자은행 종사자, 다국적 경영인, 언론인, 정치권의 고위 의사 결정자까지 등등) 약 1만 2000명에게 테스트한 결과는 놀라웠다. 당시에는 12문제였는데, 정답을 맞힌 문제는 평균 2개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역시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해가 단순히 틀렸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라는 데에 있다. 당장 침팬지만 데려다 놓고 3개의 보기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해도 평균적으로 12개 중에 4개는 맞을 테니, 오히려 '무지'보다 나쁜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책 내내 '침팬지보다 못한'이란 농담 반 진담 반인 말로 독자를 채찍질한다.
억울하게도 우리는 세상을 심각하게 오해할 만큼 잘못한 적이 없다. 우린 그저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 배웠고, 뉴스와 신문에서 말한 걸 듣고 자랐을 뿐인걸. 그럼 우리는 위에서 했던 13문제짜리 문제(단순 통계에 관한 문제이니 몇 년마다 업데이트가 된다)들을 매년 풀고 오답풀이를 해가며 지식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야 하는 걸까?
인정하자. 어차피 평균 13개월마다 지식량은 2배로 증가하는데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다 아는 건 불가능하다. (설령 안다고 해도 전문가 수준으로 정말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러니 우리로 하여금 명확한 사실을 오해하도록 만드는 뇌의 작동 방식인 '본능'에 대해 공부하고 머리로 한 번 더 거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책은 이 본능 10가지에 대해 아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어떻게 그것을 잘 다스리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각해볼 만한 거리가 또 있다. 스웨덴은 이미 1인당 GDP 11위 (우리나라는 28위) 국가다. 책을 쓴 사람을 생각해보자. 세계에 관심을 가진다는 이야기는 돌려 말하면 자국의 문제에 신경 쓸 필요가 아무래도 덜하다는 걸 뜻하지 않을까. 그래서 궁금해서 찾아봤다. 이 사람 말대로라면 스웨덴도 현재 우리나라처럼 엄청난 사회 간 갈등을 겪었을 텐데 옛날에는 대체 어땠으려나. (뉴스나 책에서 허구한 날 말하는 북유럽식 모델에 대한 왠지 모를 반감도 사실 어느 정도 작용했다)
이것저것 찾아본 결과 나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도 똑바로는 아닐지라도 앞으로 점차 나아가고 있구나. 역시 우리나라도 세계의 우상향에 일조하고 있구나.
이게 바로 틈만 나면 미디어에 출현하는 '북유럽식' 모델의 대표적 국가인 스웨덴 역사의 한 단면이다. 100년이다. 산업화가 진행된 뒤부터 안정된 복지국가로의 정착에까지. (우리나라는 참고로 산업화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스웨덴 기준으로 아직 40년 정도 남았다ㅎㅎ) 이건 그렇다 치고, 그럼 스웨덴 사람들은 항상 자유롭고 건전한 성 가치관을 지녔었을까? 정말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에 바탕을 둔 선비의 나라라서 이렇고, 저들은 자유로운 감성을 지닌 유럽 사람들이라 매사에 저렇게 쿨해 보이는 걸까?
당연히 아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사실 엄청나게 신기했다) 어찌 됐건 우리 사회의 갈등은 사회가 발전함에 있어 나타나는 열병과 같은 것이며 우리나라나 세계가 급속히 나빠지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놀고 있지 않으며, 나나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자신의 위치에서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
내 생각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해 한 분야에서 사람들이 나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게 사회의 효율성 면에서도 나을 테고 나에게도 여러모로 바람직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Reference
'인류의 지식 2배 증가 속도는 곧 12개월에서 12시간이 될 것' 기사
https://www.industrytap.com/knowledge-doubling-every-12-months-soon-to-be-every-12-hours/3950
스웨덴 사례로 살펴본 사회갈등 해결과 국가 발전, 김인춘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연구교수
Yonsei-SERI Eu centre. EUBrief Vol.4 No.1 2012. 02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