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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백 자판기 Sep 30. 2022

퇴근을 못했다 : 직장인에겐 자아가 없다

Day 7 : 카프카의 <변신>과 실존주의

Day 7's Topic : Quitting Time

카프카의 <변신>과 실존주의



퇴근을 못했다

  회의가 6시에 끝났다. 내일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회의도 풀타임으로 잡혔다. 그런데 상사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내일까지 자료 전달 가능하죠?"


   상사는 어제 저녁 6시에도 내일까지 전달이 필요한 자료를 요청했다. 그렇다. 나는 높으신 분의 요구사항대로 쭉쭉 자료를 만들어대는 자판기였던 것이다.



변신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엄청나게 큰 갑충으로 변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카프카의 <변신>의 첫 문장이다. 지금 내 모습이 이렇다. 언젠가의 나는 분명 인간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인간보다는 언제든 툭툭 주문하신 자료를 뱉어내야 하는 자판기가 되었다. 조만간 주인공 그레고리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의 상처가 낫지 않아 서서히 죽어갔던 것처럼 상사의 기분에 따라 집어던진 말에 맞아 앓아누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어쨌거나 지금의 내게 중요한 건 오전 9시가 되면 재고가 딱딱 채워지는 자판기처럼 상사에게 보고할 자료를 오전까지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죽여줘...


실존주의

  "실존은 반드시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실존주의 학자들이 하는 말이다. 즉,  내가 왜 존재하는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와 같은 본질보다 내가 존재한다는 실존 그 자체가 앞서 있다는 말이다.

  이 생각을 살펴보다 보니 내가 왜 야근을 하게 되었는지도 알겠다. 회사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슨 일에 관심 있고, 시간이 있는지, 사생활이 무엇인지, 오늘 하루 내 감정이 어떤지와 같은 본질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작동 가능해 보이는 업무 자판기가 눈앞에 실존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자라나라 월급월급



자아는 중요하지 않다

  요즘 들어 늘 마음을 다스릴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회사원에게 자아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본질 없이 실존하는 자판기일 뿐이다. 자판기에서 뽑은 자료들로 비행기를 날리건, 성을 쌓건, 다시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건 결과물로 뭐라도 목적성 있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돈을 쥐고 있는 높으신 분들의 고귀한 의지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도를 닦는다. 자아는 중요하지 않다. 생계를 이어줄 돈이 본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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