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파랑이.

by 국어쌤

잘 가, 파랑이.


그간 타고 다녔던 파란색 스포티지를 폐차 처리하였습니다. 차량 수리비가 차량 평가액을 넘어서 수리보다는 폐차가 맞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해 여름,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와이퍼가 멈춰 섰을 때만 해도 저는 어떻게든 이 인연을 연장하고 싶었습니다. 전국을 수소문해 귀하게 구한 부속을 갈아 끼우며, 아이들에게 늘 말하던 '작심삼일'의 마음으로 조금만 더 곁에 있어 달라고 녀석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기계에도 수명이 있고 인연에도 다함이 있는지, 파랑이는 결국 다시 멈춰 섰고 이제는 폐차라는 서글픈 결론에 닿았습니다.


2018년, 동료 선생님의 가족이 타던 차를 중고로 넘겨받은 뒤로 이 파란색 스포티지는 우리 학교의 이정표 같은 존재였습니다. 교무실 앞 그 자리에 파란 차체가 보이면, 딴청을 피우던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 오셨다"며 서둘러 제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가끔은 학생들이 같은 색의 다른 선생님 차를 제 차로 착각해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고 도망치다가도 다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과거엔 자율학습이 말만 자율이었고, 실제로는 강제였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차 안에는 수많은 추억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명절 연휴에도 공부하는 학생들이 마음이 쓰여서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먹고 들어온 날(그때는 카카오T가 활성화되지 않았거든요.) 역이나 터미널로 향하는 기숙사 아이들을 태워주며 건넸던 위로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참 괜찮은 녀석들이라고 한 명이라도 더 잘 봐달라며 입학사정관들을 모셔다 드렸던 그 간절했던 길 위에도 늘 파랑이가 함께였습니다. 선생님들과 어느 선생님의 결혼식을 함께 가서 축하를 하기도 했고, 어느 선생님의 부친상, 모친상에 장례식장에 들르며 위로를 전했던 날도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저는 차를 고쳐 탄 것이 아니라, 그 차에 스며 있는 기억들을 고쳐 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졸업한 제자들이 찾아와 "선생님, 차 아직 그대로네요!"라고 반겨줄 때마다, 마치 어제의 추억이 오늘로 이어지는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으니까요. 물건 하나를 보내는 마음이 이토록 무거운 것은, 그 안에 담긴 사람 냄새 나는 순간들까지 함께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파랑이가 비워준 자리에 새로운 추억을 채워 넣어야 할 시간임을 받아들입니다. 늘 뒤만 돌아보며 살 수는 없으니까요. 비록 파란색 차체는 사라지겠지만, 아이들과 함께 달렸던 그 길 위의 추억은 또 문득문득 떠오를 겁니다.


고마웠다, 파랑아.

덕분에 나의 교직 생활 한 귀퉁이가 참 푸르고 든든했단다. 이제는 무거운 짐 내려놓고, 너의 긴 여정을 편히 마무리하길 바란다.


*

아주 어린 날 차를 폐차하며 차에 막걸리를 부어주고, 눈물을 글썽이던 아저씨들을 보며 그때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마음들이 이해가 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야, 어른이 되어야 더 오롯이 이해되는 감정들이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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