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밥'은 없어

ft. 부추양념장

by 꾀돌이

쌀밥이 없다.

우리 학교 급식에 ‘그냥 쌀밥’은 나오지 않는다.


현미찹쌀밥, 찰흑미기장밥, 찰보리밥, 녹두밥, 옥수수알밥, 강황쌀밥, 강낭콩밥, 기장밥, 찰흑미밥, 발아현미밥, 칼슘강화찹쌀밥, 수수밥, 차조밥, 병아리콩밥, 녹두밥, 차수수밥, 아미노쌀밥, 클로렐라밥, 팥밥, 혼합잡곡밥, 율무밥, 렌틸콩밥, 녹차칼슘쌀밥, 울타리콩밥, 찹쌀밥, 완두콩밥, 곤드레밥, 버섯카로틴밥, 기장현미찹쌀밥, 검정콩밥, 현미밥.


끝이 아니다.


짜장밥, 소고기야채비빔밥, 김가루명란양념밥, 스팸김치덮밥, 고추참치소보로덮밥, 불닭덮밥, 콩나물밥, 김가루양념밥, 치킨마요덮밥, 참치야채비빔밥, 문어솥밥, 열무비빔밥, 나시고랭볶음밥, 목살필라프, 비빔밥, 참치마요삼각김밥, 제육&야채비빔밥, 카레라이스, 톳후리가케양념밥, 콩나물비빔밥, 삼색소보로덮밥, 달걀볶음밥, 전복소라죽, 톳후리가케주먹밥, 김치볶음밥.


이 많은 밥 중에 단연 으뜸은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이다. 곤드레밥이 더 좋으냐, 콩나물밥이 더 좋으냐 묻지 마시길. 내게는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를 묻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에는 부추양념장이 함께 나온다. 참고로 콩나물비빔밥에는 부추양념장이 나오지 않는다. 콩나물비빔밥은 밥을 콩나물과 비벼 먹도록 데친 콩나물을 약한 양념으로 무쳐서 밥과 따로 반찬처럼 차려내기 때문에 고추장이 곁들여지는 게 일반적이다. 콩나물밥과 콩나물비빔밥은 완전히 다른 메뉴다.




곤드레밥이나 콩나물밥과 함께 나오는 반찬들은 그저 거들뿐, 주인공은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이다. 그런데 이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을 완성시키는 메뉴가 있으니, 그게 바로 부추양념장이다. 부추양념장 없는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은 그냥 쌀밥보다 못하다. 주인공을 완성시키는 메뉴라니. 어찌 보면 진짜 주인공인 셈인데, 주인공 없이는 주인공 역할을 못 하는 주인공이라, 주인공이라 해도 될는지. ‘주인공인 듯 주인공 아닌 주인공 같은’ 부추양념장이다.


여하튼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은 부추양념장이 ‘킥이다’. 부추양념장이 밥맛의 8할을 담당한다. 나머지 2할은 밥 자체가 맡는다. 양념장에 비벼 먹는 밥이라, 고두밥은 그나마 괜찮은데, 밥이 질거나 곤드레와 콩나물이 과하게 쪄져서 숨이 너무 죽어 있으면 부추양념장이 아무리 맛있어도 전체적인 맛이나 완성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밥 자체가 잘 지어져야 한다.


곤드레와 콩나물은 적당히 숨이 죽어 먹기에 알맞게, 곤드레는 부드럽게 씹히되 향이 은은하게 날 정도로, 콩나물은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있는 정도로, 잘 된 곤드레밥과 콩나물밥 위에 부추양념장을 취향만큼 알맞게 끼얹어 쓱쓱 비벼 먹으면 된다.


먹을 때 목구멍으로 꾸울꺽! 넘어가는 소리가 동료들에게 들릴까 봐 조심하면서 꼭꼭 씹어먹으려 애쓴다. 빨리 더 먹고 싶은 마음에 흥분해서 대충 씹고 삼켰다가는 피차 민망하게 웃어야 한다. 나도 모르게 빨리 먹게 될 만큼 맛있다. 곤드레나 콩나물과 함께 쪄진 밥은 향부터 다르다. 밥에 곤드레와 콩나물에서 나온 채즙으로 맛과 풍미가 가미되어 있다. 여기에 부추양념장에 들어간 부추의 향이 더해져 싱그러운 맛이 난다. 간장은 밥의 심심한 간을 적절히 올려 잡아준다. 밥과 함께 쪄진 곤드레는 부드럽게, 콩나물은 아삭하게 씹히는 맛까지 있으니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지경이다. 밥만 먹어도 충분히 맛있다.


연두부가 반찬으로 나올 때도 부추양념장이 같이 제공되는데, 동료들은 밥을 먼저 먹고 연두부를 부추양념장에 찍거나 부추양념장을 연두부에 부어 반찬으로 먹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좀 특별하게 먹는다. (난 먹잘알, 일반적인 방법으로 먹지 않지. 보고 배우라구. 후후훗.) 밥에 연두부를 떠 넣고 부추양념장을 끼얹어 골고루 비벼 먹는다. 이게 곤드레밥이나 콩나물밥과는 맛이 또 다른데, 야채가 씹히는 맛은 부족하지만, 연두부가 밥알 사이사이에 들어가 밥의 질감을 훨씬 촉촉하게 만들어줘서 식감은 부드럽고 목 넘김은 미끄러지는 듯하다. 먹으면서 저작활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드시기 좋은 메뉴라고 생각했다. 연두부에 비빌 때는 살짝 진밥도 괜찮다. 되려 고두밥이 연두부와 따로 노는 느낌에다 밥알이 입안에서 유독 까끌거리게 느껴졌다. 잡곡밥도 마찬가지. 보다 부드러운 식감을 가진 잡곡이 그나마 낫다.




이쯤에서 혼자서는 주인공이 못 되지만,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은 물론이고 그냥 쌀밥만 있어도 주인공이 되는 부추양념장을 미식해 보자. 부추양념장이 얼마나 맛있냐면, (나는 이 맛을 알기에 생각만 해도 침샘 폭발이다.) 급식을 먹으면서 이 부추양념장만 집에 가져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꽤 여러 번 있었다. 냉장고에 부추양념장만 잔뜩 쟁여놔도 반찬 걱정은 없겠다, 싶다.

부추양념장은 간장에 잘게 썬 부추를 듬뿍 넣고 통깨까지 적당량 들어간, 이름 그대로 양념장이다. 그냥 소스인 셈이다. 부추 대신 쪽파를 넣으면 쪽파양념장이 되겠지.

이 부추양념장은 부추에 간장이 알맞게 배어 있고, 간장에도 부추의 향이 엷게 올라와서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에 비벼 먹으면 밥의 맛을 한껏 끌어올린다. 부추양념장의 간장은 그냥 간장보다 맛이 훨씬 풍부한데, 부추가 마늘이나 고추만큼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 음식에서 간장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느낌이랄까. 부추와 간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맛이 좋은데, 각자 내는 맛의 역할도 아주 분명하고 맛있다. 그냥 쌀밥이나 두부 같이 간이 되어 있지 않은 한식 재료에 곁들이면 그것만으로 완성된 음식이 될 정도다.

부추의 향도 좋지만 간장의 농도가 기가 막힌데, 원액 그대로의 간장은 확실히 아니다. 분명 시중에 판매되는 양조간장에 물만 혹은 물과 함께 다른 액체류를 약간량 섞어서 간장의 농도를 맞춘 것 같은데, 적당히 달큰하면서 너무 짜지도 않고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은 정도의 농도로 간장의 맛과 간을 맞췄다. 우리 학교 급식실에 급식대가들만 있다고 해도,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때부터 내려오는 씨간장이 있다거나, 100년 전통의 간장 담그는 비법이 있어, 급식실에서 직접 담근 간장으로 부추양념장을 만드는 게 아닐 텐데 이 정도의 맛을 내다니. 평범한 재료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진정한 대가들이 아닌가 싶다.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은 언제쯤에나 또다시 나오려나. 난 이달의 식단표를 사뭇 진지하게 쳐다보며 메뉴에 형광펜을 덧칠한다. (나 지금 궁서체다.)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이 나오는 날의 형광펜은 부추양념장이 '먼저' 차지한다. 곤드레밥과 콩나물밥이 아니라.




이미지 출처: Pixabay의 Georg Scho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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