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선물하는 일.
나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와인을 꺼내든다. 와인은 언제나 나에게 낭만을 건네는 술이다. 무엇보다 와인은 급하게 마실 수 없는 술이다. 한 모금씩 천천히 넘기다 보면, 어느새 이번 연도 한 해가 함께 넘어가 있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마스에 와인을 마신다. 마지막 시간을 서두르지 않고 보내기 위해서다.
내가 와인을 처음 맛보게 된 것은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아마 여섯 살 쯤이었을 것이다. 그때 엄마는 가끔 컴퓨터 앞에 앉아 와인을 마시곤 했는데, 어린 나의 눈에는 그 모습이 무척 멋져 보였다. 붉은색의 그 음료는 괜히 어른의 세계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맛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늘 호시탐탐 엄마의 와인을 노렸다.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와인을 올려둔 컵에 다가가 아주 조금, 정말 엄마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한 모금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사실 속으로 딸의 발칙함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그 순간은 완벽한 완전범죄였다. 친구들이 컵에 담긴 것이 물인 줄 알고, 소주를 마셨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나눌 때면, 나는 그날을 떠올린다. 그것이 나의 첫 음주 기억이다. 혀끝에 남은 떨떠름한 감각은 술이 쓴 지 단지도 모른 채, 그저 묘하게 짜릿하기만 했다. 어릴 때의 나는 와인을 기다리지 못했다. 호기심은 늘 엄마가 자리를 잠시 비운 그 찰나까지 겨우 버텼고, 결국 몰래 한 모금을 훔쳐 마셨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는 와인을 미리 사 두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맛이 완성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나는 와인과 샴페인을 집에 미리 올려두었다. 반짝이는 조명과 따뜻한 음식들, 그리고 경쾌한 캐럴에는 와인이 제격이다. 크리스마스에는 어김없이 느끼한 양식들이 식탁에 오르는데, 와인은 그런 음식들로 가득 찬 입안을 한순간에 개운하게 정리해 준다. 요즘은 굳이 비싼 와인이 아니어도 좋다. 복숭아 와인, 키위 와인, 머루 와인처럼 다양한 와인들이 있어, 고르는 일마저 즐겁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주변 지인들에게 와인을 선물한다. 당신들도 나처럼 잠시나마 낭만을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람마다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제각각 다른 와인을 고른다. 통통 튀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지인에게는 스파클링 와인을, 차분하고 고요한 지인에게는 묵직한 레드 와인을, 유난히 힘든 한 해를 보낸 지인에게는 산뜻하고 달콤한 와인을 건넨다. 나는 잠시 와인 산타가 된다.
이렇게 와인 산타가 되는 일은, 다음 해를 맞이하기 전 내가 누리는 마지막 행복이다. 한 해 동안 쌓였던 감정들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 와인 병 하나에 마음을 담는 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대신해 준다. 잘 버텼다는 말도, 고생했다는 위로도, 내년에는 조금 더 괜찮아질 거라는 바람도 모두 와인 속에 섞여 있다. 선물을 고르며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해의 온도와 표정을 가만히 되짚어 보는 동안 나는 비로소 한 해의 끝에 서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렇게 와인을 선물하고 나면, 나 역시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내 연말의 마침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