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서점 / 광안리 북카페

한 권, 그리고 일 년

by 잔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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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광안리의 작은 골목 안쪽에는 서점 하나가 있다. 우연한 서점이라는 이름의 이곳은 이름처럼 뜻하지 않은 만남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바로 책과의 우연한 만남이다. 서점에 책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특별한 책을 판다. 책들은 모두 표지가 가려진 채, 같은 갈색 포장지로 단정하게 싸여 있다. 포장 위에 적힌 것은 검은 사인펜으로 쓰인 숫자뿐이다. 책장에는 숫자들이 순서대로 꽂혀있다. 그 숫자는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작가의 나이일 수도 있고, 이야기 속 주인공의 나이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블라인드 북이다. 나는 이곳이 아닌 다른 서점에서도 블라인드 북을 만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장르별로 구분되어 있어 자신이 선호하는 장르 안에서 새로운 책을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나이 책은 다르다. 장르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이를 기준으로 책을 고르는 것은 지금의 나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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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1월을 보내던 어느 날, 이 서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서점에 들어서자 쌉싸름하고 깊은 커피 향이 먼저 코끝을 스쳤고, 빼곡히 꽂힌 책들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이런 공간에서 위로를 얻는 사람인 것 같다. 책으로 가득 찬 공간은 언제나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 안에 커피 향까지 더해지면 마음은 가득 채워진다. 서점이 가진 특유의 편안함이 기분이 좋아졌다. 이곳은 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서점이었다. 계산을 도와주던 그녀는 분명 친절했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모습은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나는 작년의 나이와 올해의 나이로 책을 한 권씩 골라 들었다. 포장을 뜯는 순간의 설렘은 어릴 적 산타할아버지가 두고 간 선물을 뜯던 순간과 닮아 있어, 괜히 마음이 들떴다. 천천히 포장을 풀자 내가 모르는 얼굴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 얼굴이 반가웠다. 나는 책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마치 내가 오래전에 써두고 잊고 있던 메모를 다시 읽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두 권 모두, 작가가 그 나이에 출간한 작품이었기에 꼭 나를 읽는 것 같기도 내 주변 친구들의 비밀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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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을 나와 골목을 벗어나자 겨울 바다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가방 속 두 권의 책은 나를 든든하게 만들었다. 이곳의 책은 누군가의 신년을 조용히 축하해 주기 위한 선물이 될 수도 있고, 나 자신의 새로운 시작을 스스로에게 건네는 인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서점이 건네는 우연은 충분히 다정하다. 나는 언젠가 또 다른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이 서점이 여전히 이 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때의 나 역시, 다시 이곳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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