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바빴어?"
오랜만에 본 너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다.
눈은 살짝 충혈되어 부운 것도 같고,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안색이 까칠한 것이…
어디 아픈 사람인양.
“잘 모르겠어. 그냥 좀 바빴어. 이래저래”
“논문 쓰느라 정신이 없지?”
“아니 뭐 그보다는…근데 유리야. 나 차 한 잔 마실 수 있을까?
으응? 네가 먼저 찾아와 차를 달라고 말한 건 처음이다. 무슨 일이지?
“물론이지. 무슨 차 줄까?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아, 맞다…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질문이, 뭐 먹고 싶어?라고 했지. 그냥 알아서 줄까?”
“어… 근데… 오늘은 내가 상당히… 좀 안절부절이라. 뭐든… 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혀주는 차가 있을까?
이건 또 무슨 일…??
마음을 안정시키는 차라…
아무래도 카페인 작용을 완화 시켜주는 데아닌 성분이 많은… 차로 골라보는 게 좋겠지?
“그럼 백호은침이라는 차 한 번 마셔볼래?”
“백호??? 은침??”
“차의 싹과 어린 잎으로 만든 차인데, 차의 싹에는 흰색 털이 많아서...”
“근데 왜 은침이야?
“그건 찻잎 모양이 은바늘처럼 뾰족하게 생겨서…”
네가 눈을 살짝 찌푸리더니 묻는다.
“그건 어떤 맛인데?”
“뭐랄까, 매우 은은하고 부드럽고 여리여리한 꽃향기와 풀향기가 살짝…”
“유리야. 나 지금 말이야. 흙냄새 나뭇잎 냄새 같은게 끌리거든. 왜 산에 가서 푹신푹신한 나뭇잎 위에 누웠을 때 느끼는 그런 편안함 같은 거???”
오 마이 갓!!!
놀랄 일이다 정말.
네가 이토록 구체적으로, 원하는 향기나 맛을 이야기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나뭇잎 위에 누웠을 때 느낌이라…차들이 놓인 선반 앞에서 잠시 고민하다 하나 골라본다.
“이걸로 하자. 황차야. 자닮황차”
“자담?”
“아니 아니 자닮. 자연을 닮았다는 뜻인가? 정확한 건 모르겠어. 그렇지만 은은한 버섯향, 카카오향도 나고… 뭔가 구수하고 달큰한 것이… 상당히 편한했었거든. 황차 종류인데…”
“좋아좋아! 빨리 마셔보자!”
오늘따라 갈급하게 차 한 잔을 찾는 너.
무슨 일이 있는걸까?
달그락 달그락. 다호를 꺼내고, 찻잔을 준비하고,
주전자에 물을 따르는 동안도 너는 별 말이 없다.
잠시 후.
물 끓는 소리만 편안하게 공간을 채울 무렵.
“유리야. 나 아무래도 성인 ADHD인거 같아”
“응? 갑자기?”
“요즘 도저히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 논문 마감이 코 앞인데 30분도 안 되서 다른 걸 해”
“이를테면?”
“구직사이트도 들어갔다가, 영어랑 중국어 공부도 했다가, 요즘 자기 피씨에 로컬 AI 에이전시 세팅한다고들 난리라 그것도 알아보다가, 피씨 중고 가격 알아보다가, sns 뒤져다보다가, 어느샌가 숏츠 보고 있고, 게임하다가,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운동하러 가는데, 친구한테 전화 와서…”
“잠깐 잠깐 영민아”
“응?”
“우리 차 마시자. 우린 지금 차부터 마셔야 해”
“차부터?”
“응. 세상 잠시 로그 아웃하고. 차 마시기. 그냥 딱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 10분만이라도. 어때? 오케이?”
“그래. 좋아. 차 마시자”
나뭇잎 향, 카카오 향, 버섯향 은은한 황차 한 잔을 네게 따른다.
호로록-
호로록-
둘 다 말 없이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며 다른 생각하지 않기.
그냥 차의 향기와,
차의 맛과,
유리잔에 찰랑이는 차의 고운 빛깔,
물 끓는 소리와,
한 모금, 호로록 넘기는 소리에만 집중하기.
우리 그래보자.
이 짧은 온전한 집중의 시간이 우릴 살릴지도 몰라.
사실 영민아…
나도 너랑 똑같은 사정이거든;;;;;;
그래서 차를 마시거든;;;;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