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째 마시는 차 vs n차 관람 영화

귀하다 귀해...

by 구름소리

마셔도 마셔도, 신선한 감동을 주는 차들이 생겼다.

모든 차가 다 그런 건 아니고…

같은 차가 매번 그건 것도 아니지만,

대체로 그 차들은 마실 때마다 혀가 즐겁고, 마음이 풀어지고, 몸이 편해지며, 행복감을 준다.

혼자 맛과 향기의 결을 켜켜이 느끼며,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게도 만든다.

풀어진 마음을 한 곳에 모아주기도 한다.


그 차들의 어떤 점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단지 ‘취향’이야,라고 말하기엔 어딘지 설명이 좀 부족한 것 같고,

모두가 인정하는 명차입니다, 하기엔 고개를 좀 갸웃하게 되기도 하고,

‘운명의 짝’까지는 과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어쨌든 차를 많이 마시다 보니, 옆에 두고 즐겨 마시는 애호하는 차 목록이 생겼다.


그런데 문득 그런 애호 차의 목록들은 n차 관람 영화 목록과 어딘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앤딩 타이틀 보고 돌아섰는데도 바로 또 그리워지는 영화들.


언젠가부터 나는 (순전히 내 맘대로) ‘좋은 영화’의 기준을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삼기 시작했는데,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하고 많이 봤던 탓에 제법 긴 n차 관람 리스트, 애호 리스트를 갖고 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들도 많았다는 말인가…


그런데 한동안, 어찌 보면 상당 기간 동안, 그런 영화들을 만나지 못해 꽤 우울한 상태로 지냈다.

물론 세상의 다른 기준으로야 훌륭한 영화들은 계속 쏟아져 나왔겠지만, 그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정작 내가 다시 보고 싶은, 나의 새로운 영화는 만나지 못했는데.

새로운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데.


어쩌면 네가 열심히 새 친구들을 찾아다니지 않은 탓!이라고 타박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동안 너무 많은 영화들을 보았으니 지나치게 까다로워진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혹은 만사가 시들해지는 우울증 아니냐고 조심스레 물을 수도.


글쎄 이유 진단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월등히! n차 관람하고픈 영화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최근에 일본의 미야케 쇼 감독 영화들을 보고, 다시 좋은 친구를 만난 듯 설레기도 한다)


도대체 n차 영화는, 혹은 n번 마셔도 질리지 않는 차는 어떤 존재들이길래 나에게 점점 희귀해지는 걸까?


물론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훌륭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걸작 혹은 명차일 뿐 아니라, 나에게 ‘말을 거는’ ‘특별한 매력’을 지닌 존재 들이기도 하다.


나의 마음 상태나, 상처 한 자락, 숨겨진 욕망, 깊은 질문들, 심지어 콤플렉스마저도 지긋이 건드리고 흥미로운 대화를 건네는 존재들. 그런 존재와 마주쳤을 때의 느낌은 마치-

어떤 사람과 만나 대화하다가, '아…이 사람과 꼭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 편으로는

나이 들수록 그런 존재를 새로 만나기 점점 드물어지는 게 당연하다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n차 영화, 책, 음악 목록 정도만 가지고 있다가, 새로운 애호의 대상, 차를 만나게 되었으니 복 받았다 싶기도 하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