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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그업 Feb 03. 2017

최대 80%의 노력

스타트업 관람가 47. <옥희의 영화>

뭐든 너무 잘 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창작에 해당하는 일을 할 때 특히 그런 것 같네요. 글을 쓸 때도 그렇죠. 멋진 문장을 욕심내면 금세 지저분해지고 맙니다.


기획, 디자인, 개발, 마케팅. 가만 보면 스타트업의 일에도 상당한 창작능력이 필요합니다. '욕심내지 않기'는 스타트업의 업무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번엔 내가 가진 능력의 최대 80%만 쓴다."


어떤 중요한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예컨대 이런 문장을 되새기며 출발하는 건 어떨까 합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헛스윙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너무 세게 차면 대기권 돌파슛이 나옵니다.


중요한 일일수록 우리는 좀 의식적으로 쿨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하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차서 덤벼들다 스트레스만 잔뜩 받고 망쳐버린 경험, 다들 한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옥희의 영화>는 창작자가 어깨에 힘을 빼고 접근했을 때 어떤 재밌는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제작방식은 말도 안 되는데요. 겨우 4명의 스텝이 13회차 촬영으로 장편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심지어 시나리오도 촬영 당일에 나왔습니다. 아침 일찍 시나리오를 쓰고선 배우한테 전화해 "오늘 뭐해? 나올래요?" 했다는 것입니다.


홍상수 감독은 "이 영화를 찍을 당시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저히 영화를 찍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영화를 찍으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했다고 하네요.


그렇게 만들어진 <옥희의 영화>엔 묘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어떤 요소도 규정되거나 강제되지 않았고, 그래서 도식적인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클리셰 가득한 대한민국에 사는 관객으로서는 어쩐지 통쾌함마저 느껴지는 입체적인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영화는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돼있습니다.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가 차례로 나오고,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매번 엔딩크레딧이 오릅니다.


이선균(진구), 정유미(옥희), 문성근(송 교수)은 같은 사람인 것 같기도, 혹은 다른 사람인 것 같기도 한 인물들을 연기합니다. 각 장은 연결되어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습니다. 4개의 토막인 동시에 1개의 전체입니다.


시간 순서 역시 1-2-3-4일 수도 있고 1-2-4-3일 수도, 그게 아니면 2-3-4-1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홍상수 감독이 밝힌 촬영방식을 보니 기가 막히네요(편집해서 인용합니다).


"우선 이선균씨와 하기로 정하고 촬영 이틀 전에 영화의 대강을 두세장에 썼다. 찍으면서 그 장면들이 늘어지면 영화 한편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편집해보니 27분 정도밖에 안됐다. 뭘 더하라는 뜻 같았다.
이전 단편 <첩첩산중>에 출현한 정유미씨와 문성근씨에게 연락해 계속 찍었다. 그것이 2편 ‘키스왕’이 됐다. 2편의 중간쯤까지 갔을 때 장편까지 가볼까 생각이 들었다. 1, 2편에서 문성근씨가 연기하는 송 교수가 완전히 다르고 2편에서 옥희와 송의 관계가 암시되니까 그것을 더 풀어줘야 할 것 같아 다시 4편을 만들었다. 몇 분부터 장편으로 간주되냐고 주변에 물어보니 80분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1, 2, 4편을 편집해보니 80분이 안됐다. 긴 중편으로 남긴 채 더 건드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꼭 중편이나 장편이 돼야 한다는 압박은 없었다.
그런데 마침 103년 만의 폭설이 내렸고, 3편(폭설 후)이 바로 떠올랐다. 아침에 일어나 3편 대본을 쓰다가 송 교수가 나와야 한다는 판단이 들어 문성근씨에게 전화를 했다. 안 받더라. 연락을 기다리며 계속 썼다. 40분 뒤 전화가 왔고 나와달라고 해서 그날 오후에 바로 3편을 찍었다(웃음)."



워낙 한정된 자원이다보니 4명의 스텝은 온갖 일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문성근씨도 자신의 촬영분량을 다 찍은 후에 차량통제를 했다고 합니다.


4번 오르는 엔딩크레딧에도 사실 사연이 있습니다. 각 장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으나, 편집해보니 장편영화 기준인 80분이 안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엔딩크레딧을 4번 넣었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4번째 크레딧은 배우 이름이 한번 더 반복해서 오릅니다. 얄밉게도(?) 이 영화의 길이는 딱 80분입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자원만으로 만든 이 경쾌한 창작방식. 이걸 보면서 저는 흡사 스타업들의 '스프린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4번의 스프린트로 찍은 4개의 장이었습니다. <옥희의 영화>는 빠르게 기획(아이디에이션)하고, 빠르게 시나리오(스케치 목업)를 써서, 빠르게 찍고(프로토타입 제작), 빠르게 편집(테스트)해 만든 영화입니다.


모든 홍상수 영화 중에서 저는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합니다. 일단 보기에 무척 편합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만들었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속도감있는 그 제작방식 만큼이나 경쾌함이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지켜보기 괴롭고 체할 것 같은 과잉이 느껴졌던 전작들보다 이 영화가 훨씬 더 좋습니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완전히 갖춰진 환경에서 모든 노력과 능력을 끌어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주어진 자원으로, 경쾌하게, 최대 80%의 동력으로도 좋은 창작은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무언가 잔뜩 잘하고 싶은 욕심에 체할 것 같다면, 한번 20%는 내려놓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반드시 이번에 다 보여줄 필요는 없습니다.


원문보기: 스타트업 미디어 비석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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