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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안 Jun 24. 2022

어떤 신념을 이기는 유대(혹은 연대)


94년 서울에 살았던 개인의 성장을 다루며 빠지기 어려운 사건이 몇 가지 있다. 김일성의 죽음이 그렇고 성수대교 사건이 그럴 것이다.  특정 시대 속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다루는 여느 영화들이 가장 많이 다루는 방식은 인물을 사건의 참여자로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벌새>는 차별점을 가진다고도 할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다. 주인공인 은희는 중학생이고, 시대의 대표성을 띠는 사건들의 참여자로서 기능할 조건이 충족되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그런 인물을 주요 인물 삼았다는 점 자체가 특이 사항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사실, 특별히 94년이 아니어도 어지간한 영화는 중학교에서 우열반 중 열반에 속하며 날라리 투표에서 뽑히는 대치동 방앗간 집 막내딸을 주요 화자로 삼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점에서 영화에 대한 의견이 갈리는 일이 가능하다. 왜 특출 날 것 없는 중학교 2학년의 은희를, 하필이면 94년이라는 시간에 데려다 놓았는지에 대한 관점에서.

영화 도입부의 구조요청처럼 절박한 엄마를 향한 외침은 94년 은희의 좌표를 알려주는 듯하다. 편복도 형 아파트에서 은희의 구조요청은 은희가 선 좌표가 잘못됐다는 듯 외면당한다. 902호를 두드려봤자 열리지 않던 문은 은희의 집인 1002호에 도달해도 다만 열렸다 뿐 적절한 응답이 되진 못한다. 은희의 아빠는 성적 때문에 고등학교를 강북으로 다니는 큰 딸 수희를 질책하고, 장차 대원 외고와 서울대를 갈 인재인 아들 대훈의 은희를 향한 폭력은 방임한다. 은희의 엄마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익숙한 가족을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맞닥 드렸을 때의 당혹스러움처럼. 집에서 멀지 않은, 은희네 아파트 단지 한구석이었을 뿐인데도 은희의 엄마는 영화의 오프닝처럼 또 한 번 엄마를 찾는 외침을 듣지 못한다. 외면 일지 망연함 일지 모를 엄마의 묵묵부답에 모녀의 심연이 있다.

실제 촬영 당시 엄마를 간절히 외치는 소리에 인근 주민들이 엄마를 잃은 아이가 있는지 염려돼 나왔다는 일화는 제법 뭉클한데, 하나 둘 나와서 엄마를 찾는 아이를 걱정했을 마음들처럼 은희를 보듬는 것은 엄마나 아빠보다는 외부에서 직조된 유대감이다. 편복도에서 자기 집과 엄마를 찾는 은희의 외침은 집과 엄마에겐 닿지 않았을지언정 은희의 좌표는 베틀에 맞춰지며 촘촘해지는 직물처럼 한 칸 한 칸 자리를 찾아간다. 어느 날 목에서 만져진 혹 때문에 처음 찾아가게 된 정작 은희는 잘 모르지만 엄마가 잘 안 다는 병원의 원장은 은희에게 있어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아픔을 떼어낼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오빠의 폭력으로 다시 문제가 생기자 진단서를 써줄지 여부를 건조하게 묻는다. 정작 당사자인 은희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그게 왜 필요한지 묻지만, 원장의 대답은 간결해서 더욱 마음에 남는다. "증거가 되니까." 몸에 남은 폭력의 흔적을 간결하게 피해 사실의 증명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확인시켜주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의 존재가 은희를 발돋움하게 한다. 수술을 위해 입원한 병원의 병실 사람들은 은희에게 가족보다 상냥한 관심을 기울이고 은희는 그 안에서 기묘한 안정감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집에서보다 덜 겉도는 듯 보이기도 한다. 가족과는 집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은희는 한문 학원 친구 지숙과는 짜증 나는 학교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남자 친구 지완을 적극적으로 이끌 수도 있으며 자신을 동경해왔다는 후배에게는 후배의 이름이 들어간 노래를 부를 땐 제법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씨실과 날실을 엮어가듯 이어지는 은희의 여정에 베틀의 발판을 조이듯 단단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94년, 영지 선생님과 함께​


​함께 저지른 비행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은희의 부모님을 이르지도 않고, 경찰에 데려가도 상관없다는 부모도 아니며, 남자 친구처럼 자신을 배신하지도 않으면서 널 좋아했던 건 그저 지난 학기의 일이라고도 말하지 않는,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영지 선생님의 등장은 은희의 발돋움을 격려하되 재촉하지 않는다.  가족도 친구도 물은 적 없던 너는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묻는, 은희가 처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조심스레 고백할 수 있던 사람. 학교 선생님이 강요한 구호 속 주인공처럼 노래방을 안 가서 서울대에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영지 선생님은 세상은 신기하고 아름답지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함부로 동정해선 안된다 말한다.  엉성하게 교차되며 차곡차곡 직조되는 은희의 세계에, 눈높이를 맞추고 신발 끈을 조여주듯 단단한 위로를 건넨다. "누구든 널 때리면 맞서 싸워"라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직접적인 조언과 폭력의 증거를 제시해 줄 수 있다는 실질적 제안은 당장 효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은희의 여정이 견고 해지는 밑거름이 된다.


​​은희의 언니 수희는 삼 남매 중 가장 맏이다. 집이 대치동이지만 성적 때문에 강북으로 학교를 타고 다니며, 은희에게 옷장에 숨겨줄 것을 부탁하거나 학원을 빠지기 일쑤고 어떤 날은 밤늦게 은희가 방에 있는데도 남자 친구를 들인다. 영화 자체가 은희를 중심으로 이어지며 당연한 듯 부모님과 오빠처럼 여겨지기에는 비중은 적지만 수희의 얼굴이 갖는 힘은 남다르다. 은희가 오빠에게 맞은 일을 온 가족이 있는 자리에서 토로하지만 부모님에게 돌아오는 것은 은희를 향한 질책뿐이다. 다만 언니 수희만은 어떤 유대(혹은 연대)의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보내본 적이 없거나 받아본 적이 없는 이가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다. 자칫 골칫덩이로 치부되기 쉬운 언니 수희에게 영지 선생님처럼 등을 밀어주는 바람 같은 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수희는 어떤 얼굴로 매일 버스를 타고 강북에 있는 학교를 건너기 위해 성수대교를 건넜을까 생각하면 은희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희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맏이로서 부모님을 가장 먼저 실망시키고, 내쳐진 기대를 배로 짊어지며 더욱 모질어지는 남동생과 막내에게 대물림되는 폭력을 지켜만 봐야 했을 수희의 얼굴이 가장 마음이 쓰인다. 결국 가족들에게 실망을 안겨왔던 행동으로 살아남아 아마도 다른 다리로 돌고 돌아 학교에 다녔을 수희가 은희와 어떤 마음으로 새벽에 그 다리를 목격하러 갔을지를.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쓰였어야 한다. 그것이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보편의 힘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것이 내 믿음이자 내가 믿는 윤리다.




 <벌새>의 방점은 그렇게 찍혀선 안됐다고 생각한다. 켜켜이 쌓인 은희의 여정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여름으로 남을 테지만 성수대교가 쓰인 방식에 대해선 찜찜함이 남는다.  은희의 성장이 팬시한 서정으로 남겨지지 않기 위해서 더욱. 그럼에도 종종 어떤 유대(혹은 연대)가 갖는 힘은 신념을 이기는 것 같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평등과 불의에 날을 세울수록 네가 뾰족한 탓이라고 들어온 이들이 받아온 개별적인 사건들이 영화에 구체적으로 소환되며 보편의 힘이 되었을 때 이미 그러고 말았다. 20년 정도가 지나고 또 어떤 사건이 개인의 성장의 소품처럼 다뤄진다면 나는 또 같은 이야길 할 것 같다. 그때도 또 다른 유대가 그 신념을 이기게 될까? 다만 바라는 것은 그땐 나의 의식이 시험대에 오르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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