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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안 Jun 24. 2022

내게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는가

여기에는 없다

  

6개월 전 아내를 잃고 혼자 살아가는 남자 오베는 늙고 가난한 남자다. 아내의 곁 으로 가기 위해 수의를 차려입고 세상과 안녕을 하려던 찰나, 고요하기 그지없던 그의 정원 잔디밭을 망치며 그의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들이 등장한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오베라는 남자>는 살아가야할 이유가 없어져 삶을 중단 하려던 순간 그의 곁에 하나 씩 침투하는 아직은 더 살아볼만한 이유를 제시하며 삶의 끄트머리에서 발을 내딛으려던 그를 (어쩌면) 세계의 중심으로 소환한다.

복지국가 스웨덴의 고요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당연한 듯 그 제도를 과시 하기보다는 제도의 허점을 은근슬쩍 폭로한다. 오베를 잃지 못해 안달인 주변인들 이 유색인종의 이민자, 임신부, 성소수자, 그리고 먼저 보낸 아내가 장애인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차량 이용금지인 마을을 괴팍하게 종횡무진하며 등장하는 일종의 빌런이 금발 벽안의 남자라는 점은 다소 상징적이다. '스웨덴은 왜 복지 천국인가?' 기사가 등장하며 청정 복지국가로서의 위세를 자랑하던 것과 다르게 스웨덴의 현 재를 사는 이들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관대하고 여유로운 복지혜택은 노동자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걷힌 세금으로 유지되지만 가만히 있 어도 꼬박꼬박 걷히는 세금의 눈먼 구석을 노리는 이들은 이 곳에도 존재하며 평등 과 차별 없는 낙원 같을 것만 같은 이곳에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존재한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것은 홀로 남은 오베의 삶이다.

도심이나 중심가가 아닌 지역이며 호화로운 시스템을 갖춘 전원주택은 아니지만 오베가 혼자 살고 있는 집은 우리가 노년 남성의 고독사 같은 기사를 접하며 마주 하는 공간과 현저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는 평생 일한 직장에서 정리해고 당하지만 넉넉지 않고 물가 비싼 스웨덴에서 그가 착실하게 납부한 연금이 있다. 플래시백이 아내의 빈자리를 자꾸만 상기시키지만 잔디 정원을 가진 아늑한 단독주택이 복지 의 최전선에서 그의 노후를 방어하고 있다. 43년 일한 직장에서 잘려도 그가 만원 지하철에서 백화점 쇼핑백을 짊어지고 지하철 퀵 서비스에 복무하거나 폐지를 주 우며 살 필요는 없던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삶으로 2016년 개봉했던 이재용 감독의 한국영화 <죽여주는 여자> 속 소영의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박카스 할머니’로 불리며 탑골 공원을 비롯 한 종로 일대에서 자양강장제를 팔며 성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소영은 일대의 노인 들에게는 솜씨로 유명하며 동종업자들에게는 시샘을 받는 삶을 산다. 질투 받을 정 도의 커리어라는 허울인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트랜스젠더 집주인 티나와 한 쪽 다리가 불구인 장애인 피겨 작가 도훈, 그리고 우연히 그녀가 떠맡게 된 코피노

                    

 소년 우성이다. 영화 속 오베가 그가 죽음의 문턱에 다가갈 때마다 다가와 방해했 던 이웃들과 결국엔 일종의 대안가족을 이루며 생활동반자로서의 공동체적 미래 를 희망적으로 제시한 것과 달리 소영의 삶에는 낭만이 자리할 틈이 없다. 소영은 이 세계의 빌런처럼 단 한 번도 눈먼 돈을 좀먹은 적이 없음에도, 곁에 자리한 이들 과 서먹하지만 끈끈한 유대로 일상을 이어갈 수 있음에도 사회가 그녀를 보는 시선 은 다소 징벌적이다. 아내를 잃고 난 오베의 성정이 괴팍해도 혼자 남겨진 그의 삶 이 벌처럼 느껴지기는커녕 애처롭고 따스했던 것과 대비된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젊은 시절 알던 손님을 마주친 소영은 자신의 옛 단골손님이 병으로 누워 있단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가고, 그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죽여 주는 솜씨’로 추앙 받던 그녀가 정말로 사람을 ‘죽여주는’ 사람이 되어달란 부탁을 받게 된 것이다. “품위 있게 죽을 권리”라는 존엄사의 목적과 그리 멀지 않지만 죽 음의 근거리에서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삶을 연명하던 이들이 삶을 중단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일종의 조력자살이다.

오베는 삶의 끄트머리에서 아직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과 만든 복작복작 한 공동체 안에서 어느 새 자신의 반려묘가 된 유기묘의 곁에서 생을 마감한다. 젊 을 때에도 성노동자로서 구매자들의 착취로 삶을 유지한 그녀는, 간절한 부탁을 외 면하지 못해서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가부장적 압력에 자신도 모르게 굴복된 것일 지 모른다.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 그녀의 곁에 오베의 고양이처럼 누가 있었 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간절한 부탁과 더불어 농담일지 모르지만 그녀의 선택 을 추동했을지 모를 그녀의 한마디는 잊히기 어렵다. “그래도 거기는 밥은 나올테 니까...” 대비되는 죽음과 공동체의 한 가운데에서 정말이지, 묻고싶은 질문은 단 하나 뿐이다. 과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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