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초안
"아니, 그래서 너무 섭섭하더라니까."
선배의 목소리에는 속상함이 섞여 있었다. 오늘의 술안주는 싸움 경험담이다. 내가 십여 년 지기와 소원해진 지 일주일째 만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상처받은 말 한 마디들이 차례대로 도마 위를 거쳐 갔다. 입을 모아 이름 모를 누군가를 욕하기도 했고 일순간에 상황이 뒤바뀌어 술자리에 앉은 한 사람을 질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묻는다.
"그러니까 겨우 그것 때문에 친구랑 싸운 거예요?"
괜히 그 질문에 내가 움찔한다. 갑자기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너를 알게 된 게 중학교 때였으니까 햇수로 17년째다.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하던 네 모습이 참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너와 나는 모든 취향이 비슷했다. 콜린 퍼스와 크리스찬 베일을 좋아했었고 '<위플래쉬>보다 <버드맨>이 좋다'라는 말에 기쁨의 맞장구도 쳤었다. 가장 친한 친구를 꼽아야 할 때면 당연하다는 듯이 서로를 위해 일순위를 비워두곤 했었다. 그렇게 단 한 번의 다툼 없이 우리의 사이는 계속 되었다.
너도 바빴고 나도 바빴다. 한 달에 한 번 보던 것이 서너 달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좋았다. 옛날이야기에 빠져서 당장의 일거리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미래를 마음껏 얘기했고 그 대화 속에서 만큼은 늘상 자유로웠다. 부질없는 푸념도 허황된 꿈도 버릴 것 하나 없었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무조건적으로 이해를 구하는 일도 없었기에 우리의 사이는 무엇보다 평화로웠다.
너도 변하지 않았고 나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에게 조심스러워졌다. 바쁠까 싶어 전화하지 못했고 마음 아파할까 싶어 걱정거리를 전하지 않았다.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질수록 가족이 병원을 오가는 일이 거듭될수록 연락은 뜸해졌다. 마음을 나누고 싶었으나 그리움의 크기만큼이나 우리는 각자 예민해져 있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반가운 얼굴은 여전했다.
"맥주나 한잔 할까?"
"좋지."
얼른 아무데나 주저앉아서 밀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는 사람이 많아서 싫고 저기는 너무 조용한 분위기라서 싫단다. 급한 마음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다 싫으면 네가 정하든지!"
누가 들어도 짜증 섞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차 싶었으나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동안 전하지 못한 아픔을 상처 주는 말로 대신했다.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과 미운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너는 그저 미안하다고만 되풀이했었다.
술잔을 보고 있으니 너와 마시지 못한 맥주 생각이 난다. 술이 한껏 들어갔다. 거세졌던 분위기도 한껏 늘어졌다. 못난 내 모습이 떠올라서 한 잔을 거든다. 한 잔이 아니라 여러 잔을 거든다. 소란스럽던 도마 위도 조용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친구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던 선배의 말투가 슬그머니 자조적으로 바뀐다.
그리고는 "나도 잘 한 거 없지 뭐......" 하고 어투가 흐려진다.
나도 자꾸만 미안해진다.
"맞아요. 선배가 잘못했네요."
나도 모르게 한 마디 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