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아메리카노~똬잎
한 손엔 커피를, 다른 한 손엔 유모차 손잡이를 잡은 아빠를 가리키는 말로 육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아빠를 의미한다. 선구적인 육아휴직제로 인해 육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아빠들이 대거 생겨난 스웨덴에서 유래했다. 스웨덴은 1974년부터 여성 인력 활용의 중요성을 깨닫고, 세계 최초로 부모 공동 육아휴직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이러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정책이 사회 인식과 조직의 기업문화를 바꾸었고 남녀 공동육아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 산물이 바로 라떼파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떼파파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한 손에는 테이크 아웃을 한 부드러운 카페라떼, 다른 한 손에는 핸들링이 좋은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젊고 깔끔한 옷차림의 아빠. 아기띠를 해도 엄마가 한 것보다 훨씬 안정감 있고, 폼도 나는 그런 아빠를 상상했었다. 아이와 함께 나온 산책에 주변 사람들은 친절한 미소와 귀여운 아기를 만져보고 싶어 하는 그런 주변을 상상했었다. 내가 생각하는 육아 하는 아빠의 모습은 이런 모습들이었다. 엄마보다 체력 좋은 아빠가 아이와 쉬지 않고 놀아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이의 분유정도야 먹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아이를 키우는 일이니 당연히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우아~ 하게
세상 당연한 진리를 잊고 있었다.
당연하게란 건 없다. 공짜로 얻어지는 것도,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나는 육아의 1도 모르고 있던 셈이었다. 나의 육아는 라떼보다는 씁쓸한 아메리카노와도 같았다. 배울 것도 익혀야 할 것도 감당해야 할 일도 너무 많은 영역이었다.
아메파파가 깨달은 여성의 고단함
첫 번째. 테이크아웃 커피? 일단 커피숍 갈 시간이 없다. 집안에서 캡슐 머신도 제대로 내려 마실 시간이 없다. 그나마 신생아 시절에는 울고 보채기는 해도 위험한 것을 만지거나 돌아다니질 못하니 나름 여유가 있다. 하지만 쉬지 않고 싸대는 탓에 기저귀를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히는 것은 거의 숙련공 급의 스킬이 완성되었다. 그때까지는 어린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불안하니 집에서 캡슐 커피를 마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커피를 내리고 향긋한 커피 향에 육아의 우아함도 잠시 느끼곤 했다. 하지만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느새 배밀이를 시작해 기어다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캡슐 머신도 상상하기 어렵다. 눈을 떼면 순식간에 어디론가 기어가 잡고 일어서거나, 눈에 보이는 데로 입에 넣거나 하는 통에 눈을 떼면 사고다. 이때부터 아이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미어캣이 되어야 한다. 고개를 아이에 고정한 나의 삶은 점점 아이의 삶에 동화되어 간다.
두 번째. 점점 사용하는 단어들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변한다.
-오르르르 까꿍~ 크롱크롱~ 에베베베베-
30대 초중반의 고학력의 사회인이 사용할 법한 단어들은 잊은 지 오래다. 경제가 어쩌고 문화가 어쩌고 전략이며, 마케팅이며, 콘텐츠 같은 고오급 스런 단어들은 사용할 때가 없다. 동물 소리, 공룡이름, 애니메이션 캐릭터 이름을 훨씬 더 많이 부르게 된다.
세 번째. 옷차림
아이와 함께 집에만 있으니 깔끔한 옷이 무슨 소용인가. 편한 옷만 찾게 되고 어쩌다 집 밖을 나서도 아이는 깔끔하게 입히는데 지쳐 난 움직이기 쉬운 트레이닝 복만 찾게 되더라.
네 번째. 체력
아이와 함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체력소모가 너무 크다. 일단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신생아는 두세 시간 간격으로 분유를 먹고, 그 사이사이 기저귀를 간다. 움직이기 시작할 때부터 아이는 잠든 시간을 빼고는 얌전히 있질 못하니 체력 좋은 아빠들도 육아보다 밖에서 일하는 게 더 수월하단다. 그걸 엄마들이 하는 거더라.
다섯 번째. 사회는 아이에 대해 관대하면서도, 눈치가 보인다.
아직 한국 사회는 아직 "아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는 관대함과 "맘 X"과 같은 날카로움의 이중 잣대가 있다. 아이니까 마냥 관대하리라는 기대는 접은 지 오래. 혹여나 식당이나 카페에서 눈총을 받을까 아이가 조금만 칭얼거리거나 울게 되면 들쳐 안고, 구석으로 가거나 가게를 나서길 반복하게 된다. 아무도 주의를 주거나 직접적으로 항의를 받은 적은 없지만 간혹 뉴스로 접하는 민폐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더 조심하며 행동하곤 한다.
마지막. 육아 휴직은 아니 집에 있는 아빠는 없진 않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간혹 아이를 어린이 집을 등하원 시킬 때를 보면 아빠들이 제법 보이기도 한다. 그중에는 직장 출근 전이거나 직장에서 서둘러 돌아온 것 같은 옷차림의 아빠들도 있고 나처럼 전업으로 아이를 돌보는 듯한 옷차림의 아빠들도 있다. 입고 온 옷차림이나 풍기는 냄새가 서로를 알아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아빠들은 아이들의 등하원 시간이 아니면 잘 볼 수가 없다. 나 역시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밖으로 나서질 않기도 하지만 가끔 낮에 볼일을 보기 위해 아파트 단지나 어딜 다녀보아도 나와 같은 사람은 찾기 어렵다. 나처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오질 않던가 혹은 밖에 나올 때는 철저히 사회인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아할 것 같은 라떼파파는 씁쓸한 아메리카노가 되어 나의 정신을 번쩍 깨웠지만 무를 수도 되돌릴 수도 없게 되었다. 마치 홈쇼핑에서 완벽해 보였던 팬츠가 입어보니 다리가 너무 길어 한참을 잘라내야 했던 것처럼 이상과 현실은 그 차이가 분명했다. 냉정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내 선택이면서도 스스로 적응하지 못했던 시간들도 분명 존재했고, 받아들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육아를 했던 모든 시간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씁쓸한 아메리카노에서도 향긋한 커피 향이 느껴지거나 부드럽게 나를 깨운 날도 분명 많았다. 기대만큼 부드럽고 고소한 맛의 라떼파파는 아니지만 씁쓸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나는 아메리카노 정도의 풍미는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