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준 Nov 17. 2023

내가 황희정승은 아닌데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https://brunch.co.kr/@ede5eb6cd69c4b4/16


나는 낀세대다. 586세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MZ 세대도 아니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노인과 청년의 중간에 낀세대쯤이지 않을까? 장점이라면 이전 세대들의 고생과 노고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감사할 줄 알며, MZ 세대들의 문화와 방식들을 가슴속 까지는 아니더라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세대 정도로 할 수 있겠다. 중간에 끼여 위아래 어느 세대와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단점이라면, 내 윗세대의 노고와 고생은 이해하지만 그들처럼 희생하듯 목소리 내지 않고 살고 싶지는 않고 아래 세대들의 철 모르는 듯한 행동들이 무례하다. 라떼는 그러지 않았는데...라는 말을 가장 많이 달고 사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가치관의 변화는 고속열차만큼이나 빠른 듯하다. 세대 간뿐만 아니라 태어난 년도에 따라 가치관과 생활 방식이 변하고, 달라질 정도로 사회적인 변화 속도가 빠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다이내믹함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은 남녀의 성 역할이 역전된 상황이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아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을 우리 집에서는 반대의 성이 담당하고 있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길지만 꽤 오랜 시간을 이런 방식으로 집안을 잘 꾸려오고 있으니 크게 불만도 없다. 가정의 모든 재산은 경제를 담당하는 와이프의 명의다. 집, 차, 심지어 빚까지. 내 명의라고는 최근에 내 명의의 금융거래가 없으니 신용이 너무 안 좋아 만든 신용카드 한 장이 전부다. 가끔 비상금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싶지만 라떼파파는 현금의 흐름을 컨트롤할 부분이 없다. 가끔 와잎님이 쥐어주시는 현금이 고작이며 이나마도 아이들 장난감이나 군것질 몇 번 하면 끝이다. 


솔직히 큰 불만은 없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여성이 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외벌이 실력이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감사했다. 그렇지 못한 남성 가장들도 많고, 맞벌이로 바쁘게 생활하는 가정들도 많다. 그에 비하면 나는 호강인 셈이다. 약간의 남성성에 스크레치가 날 때도 있고, 스스로의 자존감이 떨어지긴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물론 나 역시 맞벌이를 시작하고, 경제에 보탬이 된다면 남성성이나 자존감이 회복될 수도 있겠다. 허나 아직 막내가 어리고 손이 가는 시기라 많은 시간을 내기도 어려우며, 그 시간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소득과 기타 등등의 고려로 인해 외벌이로 합의를 보았다. 


어쩌면 나는 외형적으로는 실패한 남성 가장이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와 똑같은 상황을 여성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1. 남편이 외벌이다. 

2. 모든 재산은 남편의 명의다. 

3.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신용카드 한 장. 현금은 없다. 

4. 여건상 지금 당장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놓인 여성이라면 그 생활에 만족할 수 있을까? 당연히 남편이 돈을 벌기에 모든 재산이 남편의 명의가 되고 내가 마음 편히 사용한 현금이 없다는 생활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자체를 불합리하다고 받아들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이 어떠한지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은 못된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 놓인 한 사람은 답답함을 인터넷에 토로할 수 있고, 남편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한껏 낮아진 자신의 자존감을 한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가정에는 각자의 문제가 있는 법이다. 


일반적인 성역할, 고정적인 성관념은 차치하고 단순히 한 가정의 경제권, 가정의 화목과 가족들과의 합의 만을 고려할 때 나는 지금의 상황에 만족한다. 하지만 찬찬히 보면 나는 판단의 앞에 스스로 내 역할을 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상대방의 메꿈을 감사할 뿐인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기준에 스스로가 미치지 못함이라는 결핍을 전제로 이루어진 판단이다. 이에 저울을 기울어진 상태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내 선의에서 비롯된 판단과 결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가정. 아니 어떠한 가정이건 간에 가정의 재산은 가정 구성원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직접적으로 돈을 벌어오건, 집안에서 아이를 키우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야 직접 현금을 만들어 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인식은 점점 바뀌고 있다. 사회적 인식에 따른 결과물일 수도 있고, 이제는 월급만으로 재산 증식을 기대하기 어려워 부동산 등의 금융재테크의 영향일 수도 있다. 아버지의 월급보다 어머님의 이사 계획이 더 큰 부의 증식을 가져왔던 경우가 그 증거일 수도 있겠다. 


나는 기울어진 저울에 서 있어서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모든 명의와 재산은 반반씩 해야 해!라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와이프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의 모든 짐을 떠 넘긴 것 같아 미안하다. 이런 생각들이 나의 자존감을 많이 낮아지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여성들도 더 감사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원래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그런 거잖아"

라고 하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아직까지 남성들이 밖에서 일을 하는 게 더 큰 소득을 벌어들일 수 있는 선택지는 분명하니까. 


이 입장에서는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 입장에서는 저것도 맞는 것 같고. 이건 아무래도 내가 판단 내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난 황희 정승도 아닌다. 


이분의 말도 맞고 

저분의 말도 맞다. 


오늘은 두 손 다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염치불구하고 넙죽 인사드립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