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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Nov 29. 2023

친구 ; 親舊

90년대 후반만 하여도 야간 자율 학습이 빡세게 시행되었을 때다. 나는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를 나왔고, 그 말은 고등학교를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우리 지역은 고등학교를 재수하는 녀석들도 간간이 나오곤 했다. 내 초등학교 동창은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져 다른 지역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다 다시 이곳으로 전학을 오는 편법까지 썼다. 어렵게 학교를 와서인지 공부를 심하게 시키는 데에 대해 다들 잘 받아들였다. 지금에 비하면 선생님의 위치는 하늘과 땅이기도 했고, 근근한 입시 학원도 없는 곳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결국 학교에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던 터라 다들 야간 자율학습을 잘했다. 그 길만이 좋은 대학을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A는 내 초등학교 친구다. 6학년이 되어 A와 C 그리고 내가 잘 몰려다녔다. 오래된 기억으로는 그 당시 나와 A는 각자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둘 다 같은 반의 여자아이를 좋아했다. 우리는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를 이야기하면서 친해졌다. 어떻게 하면 고백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관심을 끌 수 있을지가 당시 우리의 가장 큰 숙제였다. 우리의 D-Day는 여름 방학 전이었다. 방학을 일주일쯤 남기고는 우리 집에 모였다. 그리고 A와 나는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다. 내가 졌다. 나는 그 여자애 집에 전화를 했고, 다행히 여자애가 받았다. 길지 않은 통화에 나는 그 애 에게 고백을 했다. 지금 보면 나는 그 애랑 어느 정도 썸을 타고 있었다. 아니 내 생각은 그랬다. 우리는 통하고 있을 거라고. 13살의 풋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방학이 끝나면서 나의 짧은 사랑도 끝이 났지만 나는 이제 모태 솔로는 아니게 되었다. 가위바위보에 이긴 A는 전화 통화를 끊고 나와 함께 콜라를 나눠마시며 인생의 쓴 맛을 토했다. 톡 쏘는 콜라가 그 날 만큼은 달달하면서도 아팠다. 


우리는 서로 다른 중학교로 나뉘었다. 집도 가깝지 않고 학교도 달랐기에 멀어질 법하기도 한데 별로 달라진 것도 없었다. 당연한 듯 주말이면 만나서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고 오락실을 가고 때로는 개울가로 낚시를 가기도 했다. 나와 달리 제법 깡이 있었던 친구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덩치도 그만큼 커졌다. 


"어제도 내가 시내에서 시비가 붙었잖아. 그 X 끼들 아주 죽여놓으려 했는데 말이야."

"너 D 알아 가 주먹이 엄청 나 한 대 맞으면 완전 골로 간다니까."


사춘기의 호르몬 때문인지 사내가 되어가나 보다. 점점 거칠어지는 언행과 욕설이 조금 낯설어졌지만 그래도 나에게만은 욕도 하지 않았고, 주먹도 휘두르지 않았다. 다른 학교여서 일까 아니면 나와 노는 것이 시시해져서일까. 우리는 점점 만나는 시간이 줄었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었을 때는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만나는 대신 동창들을 통해 제법 잘 나간다는 소식만이 전해질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야간자율학습은 밤 10시에 끝이 났다. 이미 중 3 때부터 9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우리들에게 고작 한 시간의 야자시간이 늘은 건 별로 일도 아니다. 그저 일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건물과 동급생들 그리고 새롭게 부임한 학생주임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숨죽여 딴짓을 하는 것에 집중하곤 했다. 그렇게 벚꽃이 지고 이제는 제법 밤공기도 차갑지 않다. 밤 열 시가 땡 하자마자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 들리던 학교에서는 사내들의 왁자지껄 떠들고 뛰어다니는 소리가 대신했다. 우리는 어차피 내일 다시 올 학교이기에 대부분 책은 책상 위에 올려둔 채로 도시락만 넣은 가방을 챙겨 하교를 한다. 오늘 운이 좋으면 드라마를 좀 보다가 잘 수도 있다. 


평소에도 시끌벅적한 교문이 오늘은 이상하게 정체다. 내리막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교문을 목을 빼고 내려다보았다. 우리 학교와 다른 교복을 입은 한 놈이 휘청 휘청 걸어오며 학생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 걸음걸이가 똑바르지 못한 게 술도 좀 마신 듯하다. 


"에이 X발 비키라고 X발 새 X들아"

"뭐야. 야 뭐야.. 뭐야.."

"야 재 뭐야? 왜 저래?

"아 몰라 저 새끼 미쳤나 봐~"


피라미가 잔뜩 있는 도랑에 메기 한 마리를 풀어놓으면 피라미는 떼를 지어 죽어라 도망 다닌다. 메기는 육중한 몸짓으로 설렁설렁 휘젓고만 다녀도 피라미에게는 죽을 동 살 동 도망쳐야 한다. 지금 형국이 그렇다. 


- 뭐야 저 새끼 저거 왜 저래? 후문으로 가야 하나? - 

휘말리기 싫어 후문으로 갈까 망설이는 데 이상하게 움직이는 태가 낯익다. 겁이 나 아주 가까이 갈 생각은 못하고 멀리서 목만 더 길게 빼었다. 


- 어?! A잖아? 쟤가 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안 그래도 내 뒤로 선생님을 부르러 가자는 애들도 있었는데 빨리 데리고 도망쳐야 한다.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생각만큼 몸이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탁. 탁. 탁. 탁. 탁.


내 귓가로 누군가 쌩 뛰어 내려간다. 저 형은 학교에서 쌈 좀 한다는 2학년 선배다. 누군가 소식을 전한 것 같다. 그 형은 내리막을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서는 A의 뒷목덜미를 움켜쥔다. 한 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아래로 찍어 누르기 시작한다. 누가 자신을 막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지 A는 당황하면서 손을 뿌리치려 버둥거린다. 


"뭐야 X발. 너 이 X끼 누구야 뒤 X래?"

"너 이 새끼 교복 보니 공고가 본데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술주정이야 이 새끼야"


선배는 목덜미를 찍어 누른 채로 그대로 A의 옆구리에 무릎을 쑤셔 박았다. 헉 소리와 함께 A의 몸이 순간 멈춘다. 선배는 그대로 A의 발목을 걷어차 넘어트렸다. A는 정신이 없는지 한 손으로는 땅을 짚고 한 손으로는 배를 움켜쥐고 고개를 들어 선배를 노려보았다. 선배는 그대로 짧은 머리를 움켜쥐고는 사정없이 뺨을 갈기고 있었다. 


짝! 짝! 짝! 짝! 짝! 


멀리서 들었다면 박수를 치는 줄 알았겠다. 꽤 먼 거리에서도 뺨을 치는 소리가 귓가에 꽂힌다. 세 대, 네 대, 다섯 대 A는 더 이상 맞고 싶지 않았는지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고개를 땅에 박고는 일어서지 않는다. 


"너 이 X발새끼 너 학교랑 이름이랑 다 외웠으니까. 이 근처 한 번만 더 눈에 띄어봐 아주 X여 버릴 테니까."

"예~~ 제성하미다..줴엉하니다"


선배가 내 곁을 스쳐간지 몇 분 되지 않아 상황은 정리가 되었고, 나는 그 순간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저 친구를 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고 손은 덜덜 발은 꼼짝도 못 하게 굳어버렸다. 


A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얼굴을 박은 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후문으로 나섰다. 

다행일지 불행일지 A와 나는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후문으로 나서며 A가 나를 못 봤기를 바랬다. 



그 일이 있은지 20년 가까지 흘렀고, 우리는 아직 그 일을 다 한 번도 서로의 입에서 꺼낸 적이 없다. 

A는 내가 없었을 거라 믿었을 거고 

나는 A가 나를 못 봤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정을 지켰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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