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의 태풍이 지난다. 며칠만 더 기다리면 상품성이 높아지리라 욕심을 내었던 농부는 60년 만에 강한 바람을 동반했다는 태풍 앞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과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투둑 투두둑'
떨어지는 낙과가 바닥에 떨어지며 던지는 리드미컬 한 소리가 바람에 묻혀 들리지 않을 텐데, 떨어지는 과수를 보니 가슴속에 소리가 울린다. 올해 농사는 끝이 났다. 조금이라도 건져보려 바구니를 끌고 나무 사이사이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담아 보았지만 떨어진 그 순간부터 사과는 멍들어 버렸다. 건져봐야 사과주스 가공용으로도 쓸 수 있을까 싶다. 올해는 유달리 과수가 많이 달려 기대가 컸다. 주변의 다른 과수원들에 비해 유난히 크고 과수도 많았기에 부러움도 받았고, 이번 출하만 잘 넘기면 그간의 빚도 조금은 정리해 숨통이 트일 거라 기대도 컸다. 근 몇 년 만에 오는 풍작이었다. 그랬다. 비바람에 속절없이 꺾여 부러진 가지를 보니 사과농사는 내년도 장담할 수가 없겠다.
- 해진아 이제 고만허자~ 들어가자 -
- 예~ 아부지 요 바구니만 채우고 들어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
장화에 우비까지 준비를 갖췄지만 사방팔방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할 수가 없다. 빗물인지 땀인지 모르는 습기로 속옷까지 젖어버렸고, 입안에서는 단내가 올라왔다. 기죽어 있을 아들에게 든든한 저녁이라도 한 끼 먹이고자 서울에서 불렀는데 태풍을 만만히 본 우를 범했나 보다. 30년 농사꾼의 경험도 자연 앞에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바람은 오늘 밤도 가라앉지 않을 거다. 먹먹한 하늘을 올려다보니 입안에 빗물이 닥친다.
카악 ~ 퉤
빗물인지 아쉬움인지를 뱉어내고는 다시 아들을 불렀다. 젖은 봉지가 찢어져 속살을 드러내는 사과가 두 컨테이너쯤 되었다. 오늘만 아니었으면 백화점에서나 만날 사과였는데 아쉬움에 속이 쓰리다
- 고생했다. 한 잔 받아라 -
초저녁부터 술 상을 차렸다. 안주라고는 조미김과 떨어진 사과를 깎아내 온 게 전부다. 남자의 살림살이라 구색 갖추기도 쉽지 않다.
- 오늘 밤도 많이 떨어질 거 같은데 이거 어째요? -
- 뭐 별수 있나~ 내가 떨구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이래 부니 어쩔 수 없것지... -
- 이놈의 태풍은 왜 하필... 바람이 세서 아고 아까워라...-
- 괜찮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욕심이 과했나 보다. 저번 주에 사람을 사다 땄어야 했는데 에이그... 그나저나 넌 괜찮으냐 -
-... 괜찮아요... 죄송해요..-
- 무슨 죄송은 그래도 최종까지 간 거면 가능성이 있다는 거 아니냐. 올해 이렇게 왔으니 내년에는.. -
- 아버지.. -
-.. 응 그래.. 왜? -
- 저...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
- 뭐를? -
- 내년시험까지 또 버틸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어요 -
-... 그러냐... 그럼 한 잔 더 하자... 따라봐라 -
-... 예... -
농부는 아들에게 왜냐고 더 묻지 않았다. 최종까지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심 방송국에 취직한 아들의 모습을 상상했고, 주변 사람들의 물음에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고 겸손을 빼면서도 내심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참지 못할 때도 있었다. 부추기기 좋아하는 옆 집 동생에게 기분 좋게 술 값도 몇 번 내주기도 했다. 그래서 아쉬웠다. 풀이 죽어있는 아들의 목소리도 안쓰러웠고, 그 옛 시절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먹고살기 위해 등 떠밀려 과수원일을 시작했던 일이 떠올라 속이 쓰렸다. 아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게 될까 봐 속이 상했다. 또 한편으로는 1년 더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부담도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묻지 못했다. 못난 아비라 턱 하니 일 년 더 해보라고, 내가 뒷배가 되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해주지 못해 속상했다. 떨어지는 사과만 아니었으면, 이번 태풍만 아니었으면 아들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괜스레 하늘이 야속했고, 불운이 연달아 닥치는 인생사가 속상했다.
- 어련히 잘하겠지... 나는 너를 믿는다. 어떤 길을 가도 괜찮아.. 너무 기죽지는 마라! -
아비가 되어서 해줄 수 있는 말이 고작 너를 믿는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어 속이 아프다. 부실한 안주 탓인지 술기운이 올라오고 아들과 함께 있으면 말이 많아질 것 같아 술상을 물렸다.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방에 누웠다. 내일 아침이 밝아오면 떨어진 사과를 걷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아부지? 웬일로 늦잠을 다...-
농사를 시작하며 30여 년을 늦잠을 모르시던 아버지는 웬일로 늦잠을 주무셨다. 아니 늦잠이 아니라 긴 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늦여름의 태풍에 떨어진 과일을 아버지는 걷어내지 못하셨다. 그냥 그렇게 눈을 감으셨다. 그냥 심장이 멈춰버렸다고 했다. 고통은 없으셨을 거라고 의사는 말했다. 주무시다가 심장이 멈추신 거라고...
나를 믿는다는 그 말씀이 마지막 대화가 될 거라고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무리해 오셨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몸보신이나 하자시던 그 약속은 태풍으로 떨어진 사과에 소주 한 잔이 전부였다.
돌아봐도 다시 생각해 봐도 현실적이지 않은 이별이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데 갑자기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버렸다. 나무에 달려있는 새빨간 사과가 원망스러웠다. 나도 그렇게 탐스럽게 달려있고 싶었는데. 나는 이제 나무에서 떨어진 낙과가 되었다. 더 이상 가족이라 부를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세상에 덩그러니 떨어진 낙과처럼. 나도 그렇다. 외톨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