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처음이라 모든 게 두려웠고, 둘째는 한 번 경험해 보았다고 자만했다. 셋 째가 되니 이제는 체력이 달린다 두렵다. 처음도 세 번째도 모두 어려운 것이 육아다. 단순히 아이를 키워내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육아다. 그래서 매번의 육아가 다르고 어렵다.
딸아이는 여자아이라서, 아들은 사내아이라서 관심도 행동도 표현도 다르다. 매번의 육아가 경험치가 쌓이지 않는다. 매번 새로운 튜토리얼을 하는 것처럼 새롭고 낯설기까지 하다. 마치 비슷한 보드게임을 연달아하는 것 같다. 패턴은 알겠는데 이전 게임의 필살기가 통하지 않는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육아에 대해 차분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아이는 기쁨이다. 어쩌면 결혼 이후 가장 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할 곳이 바로 육아다. 잘 먹는 것 하나만으로 기쁘고, 한 번의 고열만으로도 세상에 구멍이 뚫린다. 응차 일어서 아장 걷는 날에는 벅찬 감동에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친다. 어린이집에서 발표회라도 하는 날이면, 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꼬물꼬물 거리며 친구들과 합을 맞추는 모습에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유치원을 가고 학교를 가면서 조금씩 옷 사이즈가, 신발 사이즈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기도, 한 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한다. 사춘기라도 오면, 그동안의 예쁜 천사는 어디 가고 내 속을 이렇게 헤집어 놓는 꼬마 악마가 생겼나 속상하기까지 하다. 그러다 독립을 한다면 얼마나 가슴이 허전할는지 상상도 어렵다.
이런 육아의 기쁨과 상처의 골이 새 자동차만 못할까? 직장에서의 승진과 누락만 못할까? 내 집 장만의 기쁨만 못할까? 아무리 비교해 봐도 내 모든 것들보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행복과 절망이 더 깊고도 높은 듯하다. 원래 산이 깊은 곳에 골도 깊은 법. 갓난쟁이를 키울 때 누렸던 그 기쁨의 순간만큼 실망과 허전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지 모른다.
육아는 신체적으로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벅차다. 부모를 갈아 넣어 아이를 키우는 심정이 아닐까? 때로는 이런 육아로 부모들이 침전되기도 한다. 모든 스케줄과 대소사와 활동 범위가 아이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우주가 된다. 부모의 일상이 사라진다. 아이를 위한 삶을 살면서도 때로는 내가 누구인가를 묻게 되고, 부모의 우주를 잃게 된다. 또 아이가 중심인 부모는 반대로 아이에게 중심이 되어주지 못한다. 아이는 부모가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외동이 형제가 되고 형제가 수가 늘었을 때 아이는 중심점에서 구성원이 되었다. 자신의 것을 나눠야 했고, 잘 먹지 않으면 반찬은 모자라게 되었다. 옷과 가방을 물려받아야 했다. 부족함이 인내하는 법과 나누는 법,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했다. 분명 사회에서도 잘 써먹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작은 사회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손을 덜 간다. 다만 자녀의 경쟁을 부모가 대신할 타임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본격적인 학업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때부터는 학교보다 학원 고르는데 더 많은 비교 분석을 하고, 학교에서의 배움보다 학원에서의 배움에 열중한다. 그뿐만 아니라 필요한 과목, 학원들, 성적, 봉사, 스펙들 모두 부모가 챙기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서 하기 어렵다. 물론 아이가 알아서 잘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가 하기에도 만만치 않은 일은 분명하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입시제도에 대해 때때로 개탄하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육아가 아니라 공동 대응해야 한다. 일방적인 부모의 강요는 아이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거나 아이의 수준에 맞는 레벨을 선택해야 한다. 이제는 내 아이가 천재가 아님을 실감할 시간이기도 하다.
아직 아이를 온전히 다 키워보지 못했다. 아직 키워내야 할 날이 더 많다. 이제 겨우 사람 행색을 갖추게 키워놓은 것일 뿐, 그 안에 무엇이 담겨 놓아야 할지 우리는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제 육아의 전반전을 마친 느낌이다. 나의 육아는 이 단계쯤이다. 아직 본격적인 아이들뿐 아닌 부모들의 인생 하이라이트인 대입을 거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한 아이의 육아가 끝이 날까? 설마 그럴까? 나 역시 아직 내 부모의 그늘에 살고 있다 생각하면 육아란 끝이 없는지도 모른다.